+ 진정한 의미의 '보다'는 그 사물이 걸어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 '눈으로 보고 마음에 꽂히는 순간' 그 순간이 사물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아닐까? 결국 사물이 내게 하는 말이란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속삭이던 말, 그 사물을 바라봄으로써 꺼내보이게 된 말일 것이다. 그 사물이 내는 소리와 내 마음의 소리가 일치하는 순간 그 공명과 진동으로 인해 우리는 그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일까? 본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 구본창씨가 말하는 '보다', '낯설게하기'란 결국 그 사물의 본질을 꿰뚫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본질이란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기 보다, original한 것, 말그대로 그 사물의 참모습, 그 사물만이 낼 수 있는 빛깔과 목소리와 같은 것이다. 본다는 것은 그 사물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고유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본다는 것도 결국 그런 의미일 것이다. 처음엔 그 사람을 알지 못해서 그 사람을 그의 말과 행동으로 규정지으려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그 사람을 정의하기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자극에 대한 불안을 없애기위해 본능적으로 발현하게 되는 방어기제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방어기제로 인해 때로 우리는 그 사람을 오인하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결국 내가 만들어낸 선입관들이 그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우리가 어떤 누군가와 진정한 조우를 하기 위해서는, 구본창씨가 사물과의 진정한 조우를 위해 그러했듯, 그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우리가 만들어낸 안개를 걷어내고 그의 고유한 목소리를 듣기위해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 목소리는 역시 다른 곳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찾아야한다. 그의 목소리와 내 마음의 소리가 만나 공명과 울림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매우 매우.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말굽자석을 앞에 갖다놓고 공명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한쪽을 두드리면 다른 한쪽이 공명을 일으키며 웅웅 소리를 반복하던 두 개의 말굽자석, 그때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의 바람도 결국 그런 사진적인 공명이다. 나는 내가 찍은 사물과의 교감이 일종의 에너지처럼 필름 속에 스며든다고 믿는다.

`푼크툼(punctum)` "고유한 우연성, 순수한 우연, 고유한 기회, 고유한 만남"



사건처럼 우리를 엄습하여 사로잡아버리는 사진의 효과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푼크툼은 "코드 없는 메시지"이기에 예술가가 의도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의 본질이 푼크툼에 있다면, 예술가는 그 본질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롤랑 바르뜨는 사진의 본질은 피사체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진은 본질적으로 암실(camera obscura)이 아니라 그 바깥의 밝은 방(camera lucida)에 속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구본창 작가에게도 중요한 것은 역시 사물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사물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렇다면 사진가의 임무는 사물이 내는 그 소리 없는 목소리를 필름에 담는 데에 있을 것이다. 물론 사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철저히 주관적인 내밀한 체험이라서, 모든 사람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그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리라. 그에게 피사체오의 조우는 푼크툼의 정의처럼 "고유한 우연성이며 순수한 우연, 고유한 기회이자 고유한 만남"이리라. 그 만남을 통해 사물은 그동안 감춰져 있었던 자신의 참된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그 사물을 바라보던 우리의 상투적 시각은 파괴되고, 별 생각없이 지나치던 그 사물이 불현듯 우리 눈에 낯설게 보이게 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를 `낯설게하기`라 불렀다. 하이데거라면 이를 알레테이아(aletheia), 즉 탈은폐로서의 진리라고 불렀을 것이다. 탈은폐로서의 진리는 아직 없었던 것을 있게하고, 아직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의식 속에서 백자는 아주 오랫동안 박물관 카탈로그 속에 분류학적으로만 존재했다. 하지만 그의 카메라는 조선의 백자가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 열어 보여주었다. 그의 카메라 덕분에 우리는 백자를 진정으로 보게 되었고, 그렇게 변화된 우리의 눈앞에서 백자가 비로소 참되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창의성이란 결국 남들과 다르게 해석하려는 노력이다. 사람들은 보통 선입관을 가지고 남이 이미 만들어놓은 지식에 맞춰 생각하지만, `이것은 이렇다`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세상을 낯설게 보며 다시 내 눈으로 받아들이고 조합하고 새로운 해석을 할 때 창의성이 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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