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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ㅣ 현대미술가 시리즈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2년 10월
평점 :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 때문에 급하게 책을 구입했다. 원서를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바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역본을 주문했는데 결과는 낭패였다.
이 책은 미술비평가인 마틴 게이퍼드와 호크니가 10여년간 나눈 대담을 통해서 호크니가 전달하려고 하는 <더 큰 메시지(A Bigger Message원제)>를 소개하는 책이다. 메시지의 핵심은 험난한 동시대미술 현장에 되돌아온 회화에 대한 호크니식의 변론이다. 출판사에서 원제를 버리고 <다시, 그림이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낸 것은 그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호크니 미학의 선언 격에 해당하는 작품이 바로 67쪽부터 등장하는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Bigger Trees Near Warter>이다. 이 작품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전시되고 있다.
문제는 이 작품 부제의 한국어 번역이다. 작품명에 이어 바로 불어로 <ou Peinture Sur le Motif pour le Nouvel Age Post-Photographique>이라는 부제가 따라나오는데 이것을 역자는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라고 번역하였다.
“모티브에 관한 회화”는 도대체 어떤 회화인가? 역자가 번역한 “Peinture sur le motif”는 미술전문사전을 들춰볼 필요도 없이 위키디피아만 봐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En plein air is a French expression which means "in the open air," and is particularly used to describe the act of painting outdoors, which is also called peinture sur le motif ("painting on the ground") in French.
그러니까 “Peinture sur le motif”란 "Peinture en plein air"의 다른 말로 19세기 인상주의 작품처럼 화가가 작업실에서 나와 야외에서 대상을 눈 앞에 두고 그린 외광 회화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부제는 포스트-사진 시대에 도래할 회화의 조건을 풀어서 설명하는 기능을 맡고 있던 것인데 역자의 “모티브에 관한 회화”가 이 기능을 깨끗이 말소하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불어를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감당도 못하면서 번역을 맡고 책을 낸 것은 지적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역자의 무지와 무책임이 오롯이 드러나는 이런 발번역 때문에 얼마나 크고 심각한 문제가 양산될 수 있는지 역자는 알까?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전시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양산될 수 있는 “더 큰” 문제 말이다.
이렇게 해서 역자가 불어를 모르는 것은 확실해졌지만 그 외에도 미술사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어 번역에 대해서 더 많이 공부하고 심각하게 고민해본 다음에 번역계에 뛰어들었으면 싶다. 역자가 이 책을 자신의 연구 업적 가운데 포함시킬 때도 조금은 창피해 할 줄 알았으면 한다.
어서 빨리 원서를 구입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