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비시선 19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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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기 거부한다면>은 우선 야하다. 김선우의 시들은 대개가 너무 솔직할 정도로 야한 편이다. [얼레지]의 처음은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라고 시작하고 있고, [내력]의 마지막 부분은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함부로 꺼내기 어려운 말들이 당당한 시어의 옷을 입고 작품 속에 등장한 셈이다.

내밀한 기억, 수치스러운 과거, 남이 혹시 읽어볼까 두려움이 떨면서 적어내려가던 첫날밤의 기억. 시인은 이제 이것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놓는다. 사적인 이야기를 밖으로 내던져 나의 삶은 이러이러했다라는 충격적인 고백을 내뱉는 것이다. 이것은 90년대 초반, 최영미가 남성에 대한 복수극을 준비하던 때와는 다르다. 이런 구절은 어떨까.

'물마루 위에 지등을 띄웁니다 / 이 별의 어디엔가 / 고래들이 죽으러 돌아오는 해안이 있다지요 / 허파와 자궁의 기억을 못 버릴 줄 알면서 / 고래는 왜 바다로 가야 했을까요 / 두 마리의 고래가 죽었습니다 어젯밤 꿈에 / 작살을 꽂은 채 오래도록 떠돌아온 / 큰 고래 자궁 속에 새끼고래가 죽어 있었습니다 / 놀이터와 가로수길을 적시며 흘렀습니다 / 해안은 먼데 / 죽은 집이 벌써 서늘하였습니다.'

알쏭달쏭하기만 한 이 구절은 어느날 밤 꿈을 꾼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녀의 꿈 속에는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의 고래가 나오는데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은 분명 남자의 성기이다. 자궁 속에서 남자가 죽었다. 그 까닭은 '죽은 집' 때문이다. 곧 자궁이 죽었기 때문에 새끼고래가 죽었고, 결국 여성성이 파괴된 공간에서 남성 역시 생명력을 상실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시에서 보이는 성과 관련된 표현은 곧 여성성의 복원을 위한 한 준비인 셈이다.

좀더 치밀하게 텍스트를 읽어가야 할 터이지만 김선우 시인이 보여주는 온갖 시적 어법은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한 다소 거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남성성과 여성성은 서로 동등한 입장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 할 때이다. 그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내밀하고 수치스러운 부분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수치'가 '금기'가 되었던 시대는 이제 종말을 고한다. 수치도 결국 사람이 만들고, 제도가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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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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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세숫물이 한결 차가워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어느새 비가 내리면 썰렁한 기운을 이내 감출 수 없는 바로 가을이다. 인간을 가장 닮았다는 첼로의 무반주 선율은 나의 가슴에 표창을 하나씩 꽂는 것만 같고 우러러 하늘을 보면 별빛은 눈이 시리게 맑다. 여기저기 물이 든 산야가 더없이 정겹고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계절. 아직 남아 있는 생의 마지막 불씨를 몸으로 더디게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때.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일상 속에 파묻힌 안타까운 내게 깊은 위안과 성찰, 그리고 사색의 시간을 가져다 주었다.

<풍경과 상처>, 그리고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등에서 보여주었던 김훈의 감성은 실로 놀라웠었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 끌어 올려지는 그의 철학적 성찰은 '삶이 곧 철학이다'라는 말을 더욱 실감나게 하지 않았던가. 이제 쉰을 넘기고도 두 해.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에는 이미 쇠잔한 육체. 하지만 우리 산야에 대한 그의 식을 줄 모르는 애정은 낡은 몸에 대한 원망을 쉽게 떨쳐버리고 그의 표현대로 자전거를 저어가면서 끊임없는 항해를 가능하게 했던 것 같다.

그가 자전거를 택한 것은 간단하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모든 길들이 여과없이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의 구동축을 따라 길 위로 퍼져나가고,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 들어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간다. 우리의 산야, 그 길 위에 숨겨진 무한한 삶의 이야기와, 역사의 뒤안 속에 묻혀진 추억 속의 잔영은 구르는 자전거의 바퀴살과, 체인과, 톱니 속에 묻어서 고스란히 우리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자전거는 여수 돌산도로부터 시작한다. 그곳에서 자전거는 돌산도 길 위에 전해져내려오는 전설 하나를 집어든다.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 설요. 돌산도 앞 바닷가에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에 취해서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라고 한탄하다가 결국엔 한 남자의 첩이 되고 당나라를 떠돌다 통천에서 객사했다는 스물한 살의 슬픈 여인. 길 속에 파묻혀 드러나지 않던 이야기는 거침없이 구르는 자전거의 구심력에 의해 한없이 뽑혀져 나온 것이다. 자전거가 부석사를 달릴 땐 의상과 원효가 젊은날 나누었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그물코에 걸리듯 이끌어져 나오고, 진도대교를 건널 때쯤엔 충무공이 지니던 그 기개가 서슬 퍼렇게 살아나 다시 함선 위에서 호령을 내리는 것만 같다.

자전거는 자동차처럼 빠르지 않다. 빠르지 않음으로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그저 스쳐지나치는 풍경들은 고스란히 자전거 바퀴 살에 와서 부딪는다. 핸들 위에 달린 조막손만한 거울 속에는 만경강 위를 날아오르는 무한한 새떼의 행렬이 비춰지고, 두 차례의 대형 산불로 다 타버린 고성 땅에도 흙을 밀치고 돋아나는 새순들이 있음을 비춰준다. 무등산을 돌아 망월동에 이르면 한을 삭이고 살아가는 5월 항쟁의 피해자들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타인의 삶과 자연의 삶, 역사 속에 가로놓인 삶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아님을 알게 된다. 타인의 소박한 삶도 나의 길 위에 깔려 있으며, 자연과 역사, 역시 나의 길 위에 펼쳐져 있음을 느낀다. 그것들은 어느새 나의 몸 속에 빨려 들어와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고 내가 나아갈 길을 예비해준다. 때로는 가파른 오르막이 있어 힘껏 굴러야만 하는 길 위에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의 삶과, 세계가 있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내려오는 길을 위한 준비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잊혀져가는 우리 산야의 아름다움과, 소외된 우리 이웃과의 인연과, 우리의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려는 성찰과 사색의 여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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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최후의 고백: 나의 누이와 나
이덕희 옮김 / 작가정신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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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의 유고를 뒤척여 보는 일은 설레임과 더불어 미세한 떨림을 일으킨다. 최후의 기록에는 대개 숨길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우리들이 지난날 죽은 이에 대해 알고 지냈던 기존의 사실들을 전복시키는 마력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먼지로 가득 찬 서랍을 열고 비밀스런 노트 한 권을 조심스럽게 펼쳐보는 순간에 그 느낌이란. 만약 그것이 한 세기의 시작을 알리고 한 세기의 철학을 지배하며 지금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사상가의 것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1900년. 19세기는 마감되었고 니체는 죽었다. 지난 8월 25일은 그가 죽은 지 만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니체-최후의 고백>이란 책을 발견했다. 20년 전 이덕희 씨의 번역으로 <나의 누이와 나>로 소개된 이 책이 작년에 새로운 판본으로 다시 출판되어 나온 것이었는데 여지껏 출판소식을 몰랐다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이 우연히 눈에 띤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니체의 마지막 유고. 첫 페이지를 넘겨볼 때 그 떨림과 두근거림이란. 그리고 연이어 전해지는 전율과 경악이란.

니체 철학은 페미니스트의 비판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곤 한다. 그의 여러 저서 속에 '여자는 고양이처럼 채찍으로 다스려야 한다', '여자는 아직 동물성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다'라는 직설적인 어투가 고스란히 쓰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니체는 낭만적 사랑에 이끌려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나약한 덕(德) 역시 비판한다. 그가 낭만파 음악의 거장인 바그너와 결별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 여성성과 낭만적 사랑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 니체. 그의 생리적 오기는 내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제 그가 남긴 마지막 유고에서 그 미스테리의 실체가 드러난다. 근친상간. 니체는 엄격한 홀어머니 밑에서 사랑에 목말라 하는 누이 엘리자베트에게 처음으로 동정을 잃게 된 것이다. 한편에는 엄격한 기독교 윤리와 도덕이, 한편에는 거스를 수 없는 누이 엘리자베트의 손길이 그의 정신을 쉼없이 갉아먹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헛된 망령 사이에 존재하는 튀기(159쪽),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과 벌레로 머물러야 하는 숙명 사이의 투쟁(312쪽). 이런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니체가 선택한 길은 두 가지 모두를 배반하는 것. 그는 기독교의 윤리와 여성의 사랑 모두로부터 자유로운 길, 줄곧 주장하던 초인의 길, 영원한 비존재(Not-Being, 330쪽)로서 그 스스로 신성을 획득할 수 있는 초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로서의 삶이 아닌 짜라투스트라 니체의 탄생. 그것은 한층 더 진화된 인간 정신으로서, 신성한 아름다움의 현신으로서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친상간이라는 금기, 봉인된 우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니체의 철학은 이후 그의 말마따나 현대철학의 신화가 된다. 하이데거의 실존, 푸코의 포스트구조주의, 데리다의 해체, 들뢰즈의 차이, 이밖에도 아도르노, 하버마스, 알튀세르 등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비롯한 20세기 지성계를 이끌었던 대부분의 철학과 사유는 짜라투스트라 니체의 후광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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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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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권력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우화이다. 이 작품은 오웰이 러시아 혁명 이후 스탈린 시대의 권력 체계를 모델로 한 정치 풍자 소설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존스(부르주아)'라는 농장주의 폭압에 시달리던 동물들이 '스노우볼'과 '나폴레옹' 등 영리한 돼지들을 주축으로 농장주를 쫓아내는 혁명을 일으키는 내용이 작품의 전반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나폴레옹'이 '사냥개(군대)'를 거느린 독재자로서 대다수 동물들의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워 그 자신이 부르주아 세계로 편입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인간(부르주아)과의 전쟁과 반대파인 스노우볼 및 그 일당을 축출 또는 처형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여기까지 보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듯 보이고 또한 스노우볼은 좌파이면서도 비교적 온건했던 트로츠키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충실한 '복서'는 건장한 노동자이지만 부당한 권력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그 자체로서 스탈린 시대의 훌륭한 우화인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그건 아니다. 권력과 인간의 자유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은 완료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물농장>의 현재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시간과 공간의 틀을 벗어나 '권력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며 유지되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의 문제가 <동물농장>을 통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동물농장>을 통해서 드러나는 권력은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힘이다. 그러나 그것은 억압과 착취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우상과 도식 그리고 소문 등을 통해 베일 속에 감춰진다. 먼저 '나폴레옹'의 측근인 돼지들은 '스노우볼'이 동물의 복지를 위해 기획했던 풍차의 건설을 동물들에게 납득시킨다. 그러나 그 목적은 보다 많은 식량 생산을 통해 잉여농산물로 인간들과 교역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는 화폐유통과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혁명 이전의 불평등 사회로의 복귀를 의미했다. 그러나 복서 등은 자신의 노동력이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풍차건설'이란 우상 속에 빠지고 만다. 산업과 개발 논리 속에 부당하게 노동자들의 권익이 착취당했던 역사적 경험이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동물농장>의 돼지들은 혁명 직전의 칠계명을 자의적으로 바꾸어 나간다. 이는 글을 아는 지식인이 권력에 어떻게 부침하는지를 보여준다. 법조비리나 공권력의 부적절한 해석은 '동물농장 칠계명' 개악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몇가지 도식을 활용하여 이를 홍보, 지적인 토양이 부족한 대다수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모습은 '동물농장'에서나 현실사회에서나 크게 구분 되지 않는 것 같다. 참된 지식인과 단순히 전문적인 지식만을 습득한 이들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아마도 지식인이란 전문적인 기술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 그것이 소수에 한정되었는가, 혹은 악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는 않는가 하는 도덕적 감시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동물농장>은 인간의 자유와 권력 사이에서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을 되묻고 있는 셈이다.

<동물농장>의 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다. 노동을 하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 권력 독점에 의한 폐해가 없는 사회가 되기에는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는 너무나도 복잡하다. 디지털 사회, 정보화 사회라고 해서 평등한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도 역시 아니다. 정보의 독점으로 인한 폐해와 계급적인 차별이 이미 사이버 세계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 않은가. 독점적 권력 하에서 인간의 자유와 인권이 침해받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통치의 기본적인 전제로 삼아야 할 것이며 동물농장은 이를 역설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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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북라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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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글은 부담스럽지 않다. 2년 전에 출간되었던 <짧은 글 긴 침묵>에서도 그러했듯 결코 어렵고 난해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이 마구 읽혀대는 수필류는 절대로 아니다. 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아주 친근한 개념으로부터 철학적 사유의 극단을 보여주는 작가인 것이다. 시인 김정란씨가 번역한 이번 책 역시 이와같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명상을 보여준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투르니에가 생활로부터 얻은 철학적이고 신화적인 사유를 전개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웃음과 눈물, 건강과 병, 프로펠러와 지느러미, 철도와 도로, 피에로와 아를르캥, 유목민과 정착민, 소금과 설탕 등등이다. 우리 생활 속에서 익히 볼 수 있는 사물과 개념들에서 투르니에만의 사유가 펼쳐지는 것은 그의 사유체계가 신화적 상상력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어서 일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든지, 삼국유사와 같은 우리의 전통 신화를 살펴보면 사물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수선화나 히야신스가 피게된 전설, 혹은 울산바위가 생겨나게 된 전설들이 이야기의 형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사유체계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데 고대인들은 자연을 인간적인 것으로 보고 그와 의사소통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인 자연에 대한 존경과 배려가 신화적 상상력 속에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 역시 이와 같은 신화적 상상력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예컨대 [지하실과 다락방]에 대해서 투르니에는 '과거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다락방은 기억하고 보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지하실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계절이 익어가고 있다. 마늘은 천장에 매달려 있고, 쇠로 된 선반 위에서는 포도주가 익어가고 있다'처럼 다락방과 지하실을 마치 사람이 사유하는 형태로 묘사해놓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소금을 지혜의 상징으로서 중년의 나이와 관련시키고 설탕을 유년기에 비유하는 것, 스푼은 포크 덕분에 모성적인 부드러움을 보여주고 있다는 등 그의 비유가 주로 사물을 인격을 지닌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번뜩이는 사유의 정점! 미셸 투르니에의 마술적인 언어에 다시 한 번 경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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