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침이면 세숫물이 한결 차가워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어느새 비가 내리면 썰렁한 기운을 이내 감출 수 없는 바로 가을이다. 인간을 가장 닮았다는 첼로의 무반주 선율은 나의 가슴에 표창을 하나씩 꽂는 것만 같고 우러러 하늘을 보면 별빛은 눈이 시리게 맑다. 여기저기 물이 든 산야가 더없이 정겹고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계절. 아직 남아 있는 생의 마지막 불씨를 몸으로 더디게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때.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일상 속에 파묻힌 안타까운 내게 깊은 위안과 성찰, 그리고 사색의 시간을 가져다 주었다.

<풍경과 상처>, 그리고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등에서 보여주었던 김훈의 감성은 실로 놀라웠었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 끌어 올려지는 그의 철학적 성찰은 '삶이 곧 철학이다'라는 말을 더욱 실감나게 하지 않았던가. 이제 쉰을 넘기고도 두 해.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에는 이미 쇠잔한 육체. 하지만 우리 산야에 대한 그의 식을 줄 모르는 애정은 낡은 몸에 대한 원망을 쉽게 떨쳐버리고 그의 표현대로 자전거를 저어가면서 끊임없는 항해를 가능하게 했던 것 같다.

그가 자전거를 택한 것은 간단하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모든 길들이 여과없이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의 구동축을 따라 길 위로 퍼져나가고,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 들어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간다. 우리의 산야, 그 길 위에 숨겨진 무한한 삶의 이야기와, 역사의 뒤안 속에 묻혀진 추억 속의 잔영은 구르는 자전거의 바퀴살과, 체인과, 톱니 속에 묻어서 고스란히 우리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자전거는 여수 돌산도로부터 시작한다. 그곳에서 자전거는 돌산도 길 위에 전해져내려오는 전설 하나를 집어든다.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 설요. 돌산도 앞 바닷가에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에 취해서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라고 한탄하다가 결국엔 한 남자의 첩이 되고 당나라를 떠돌다 통천에서 객사했다는 스물한 살의 슬픈 여인. 길 속에 파묻혀 드러나지 않던 이야기는 거침없이 구르는 자전거의 구심력에 의해 한없이 뽑혀져 나온 것이다. 자전거가 부석사를 달릴 땐 의상과 원효가 젊은날 나누었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그물코에 걸리듯 이끌어져 나오고, 진도대교를 건널 때쯤엔 충무공이 지니던 그 기개가 서슬 퍼렇게 살아나 다시 함선 위에서 호령을 내리는 것만 같다.

자전거는 자동차처럼 빠르지 않다. 빠르지 않음으로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그저 스쳐지나치는 풍경들은 고스란히 자전거 바퀴 살에 와서 부딪는다. 핸들 위에 달린 조막손만한 거울 속에는 만경강 위를 날아오르는 무한한 새떼의 행렬이 비춰지고, 두 차례의 대형 산불로 다 타버린 고성 땅에도 흙을 밀치고 돋아나는 새순들이 있음을 비춰준다. 무등산을 돌아 망월동에 이르면 한을 삭이고 살아가는 5월 항쟁의 피해자들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타인의 삶과 자연의 삶, 역사 속에 가로놓인 삶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아님을 알게 된다. 타인의 소박한 삶도 나의 길 위에 깔려 있으며, 자연과 역사, 역시 나의 길 위에 펼쳐져 있음을 느낀다. 그것들은 어느새 나의 몸 속에 빨려 들어와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고 내가 나아갈 길을 예비해준다. 때로는 가파른 오르막이 있어 힘껏 굴러야만 하는 길 위에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의 삶과, 세계가 있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내려오는 길을 위한 준비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잊혀져가는 우리 산야의 아름다움과, 소외된 우리 이웃과의 인연과, 우리의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려는 성찰과 사색의 여행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