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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여자는 없다 - 국민여동생에서 페미나치까지
게릴라걸스 지음, 우효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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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된다. 자칭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단체는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특이한 행동들을 벌인다. 그들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단지 여성은 차별받아왔다는 것, 그 가해자는 남성이라고 외칠 뿐인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소외되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여러 방면에서 차별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페미니즘은 그런 사실을 나열할 뿐 여성이 차별받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떤 방향으로 어떤 방법으로 바꾸자는 말은 쏙 빠져있었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변화가 무엇인지 궁금하던 차 그런 여자는 없다(게릴라걸스, 그런여자는없다 국민여동생에서 페미나치까지, 우효경, 후마니타스(2017))를 만났다.

책의 저자인 게릴라 걸스는 그런여자는없다에서 파파걸에서부터 여자 아나운서까지 시대와 분야를 막론하고 여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고정관념에 대해 소개한다. 이런 고정관념은 우리가 억지로 몸을 끼워 맞춰야 하는 터무니없는 작은 상자와 같다.”(12P) 여성을 향한 온갖 불편한 고정관념들이 이렇게 많이 있는지 새삼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게릴라 걸스는 책을 통해 모든 사람이 페미니스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될 그날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258P)고 한다. 하지만, 그런 날은 아직도 먼 것 같다. 책의 내용은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 그들은 피해망상에 빠져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실을 왜곡한다.

텔레비전이나 음악 신문 잡지와 같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고정관념들은 국경이나 문화를 넘나든다(16p)는 주장에서 여자가수들이 남근을 연상시키는 마이크에 몸을 비빈다”(17p)고 주장한다. 마이크에서 남근을 연상한 상상력이 놀랍고, 일상생활이 가능할지 걱정될 정도다.

2011년 고려대 의대 남학생들이 같은 과 여학생을 성추행한 사실, 유영철이 2004여자들은 함부로 몸을 놀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한 사건, 2009년 장자연 씨의 비극적 죽음 등을 예로 들면서 우리 사회가 강간과 성폭력 문화가 만연해 있다고 서술한다(87P) 위에 언급한 사건들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공분을 불러일으켰으며, 누구도 옹호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 강간과 성폭력 문화가 만연해 있다니 대부분의 남자들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단지 일부의 범죄자들이 저지른 범죄를 두고 한국사회가 성폭력 문화가 만연해 있다니, 지나친 주장이다.
잡년/남자 기죽이는 여자(76p)에서 잡년이라는 단어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고정관념을 소개한다. “남자가 자기 의견을 내세우면 남자다운 게 되고, 여자가 자기 의견을 내세우면 잡년이 된다.”라는 말로 오직 여성에게만 언어적 고정관념이 가해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당장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비속어에서도 여성과 관련된 욕보다는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욕이 더 많아 보인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수지가 쌍년이 된 이유는 단지 선배와 자기방에 들어가서가 아니다. 맥락을 읽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주장이다. 어떤 사람을 잡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잡년 같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테니스 선수 마르티나 바브라틸로바를 예(43P)로 들면서 여성에게만 예쁜 외모가 강요된다고 주장하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많은 남자가수들을 봐도 노래보다는 외모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치 여자만이 편견의 희생자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부당하다.

남자가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은 어렵다. 페미니즘을 비판하게 되면 남자라는 지위 혹은 권위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속 좁은 남자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여자는없다에서 게릴라걸스는 익명성에 숨어 모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모든 여자는 피해자가 되는 프레임을 만든다. 이런 편 가르기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여성이 차별받아온 역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도 남녀차별이 존재할까? 그렇다면 그 남녀차별을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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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미래
알랭 드 보통 외 지음, 전병근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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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사피엔스, 인간은 지금까지 엄청난 진보를 이루어 왔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해왔고 과학기술을 진보시켰으며, 바다로 우주로 활동영역을 넓혀왔다. 또 미술 음악 문학 등에서 위대한 예술적 진보를 이루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나타난 약160만년 전부터 인간은 진보해왔고 인간의 진보는 계속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다. 이런 믿음은 어느 영화의 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은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책 사피엔스의 미래(알랭드보통 외, 전병근 옮김, 사피엔스의 미래, 모던아카이브, 2017)에서는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진행한다. ‘인류의 미래는 더 나아진다.’라고 주장하는 토론자는 온갖 통계적인 방법으로 인류가 실제로 진보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으며 많은 질병이 사라졌고 빈곤이 줄어들었으며 평화의 시기가 길어졌다 또한 범죄율은 떨어지고 교육이 보편화되었으며 인권이 신장되고 성 평등이이 확산되고 있다. 인간의 지능도 높아졌다. 찬성측 토론자들은 컵에 남아있는 물을 보고 반이나 남아 있다고 말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우리는 과거를 떠올릴 때 행복했던 기억들만 걸러내는 반면 미래에 대해서는 암울한 예측만 추려낸다’(62)며 반대측 토론자들이 취하는 이상한형태의 자아도취를 비판한다.

반면 반대측 토론자들은 일명 결함 있는 호두의 어리석음이 결코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 수 없으며 상대적 빈곤과 전쟁의 위협의 증대 그리고 인간이라면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죽음의 존재 때문에 인간의 진보는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한 반대측 토론자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진보해 왔다고 앞으로의 진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류가 어느 면에서 진보한 만큼 다른 면에서 인류가 처하는 위협은 더 커져 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토론에서 진정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직면한 위험의 본질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70)이라고 말한다. 반대측 토론자들은 컵에 남아 있는 물을 보고 반밖에 안남아 있다고 말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새로운 위협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의 진보는 어떤 문제를 해결했을 때조차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115p)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인류의 미래가 나아질까?’라는 주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나아짐이란 무엇인가? 둘째 인간 개개인이 아닌 인류의 진보를 이야기 할 필요가 있는가? 위에서 언급했든 인류의 진보를 믿어 의심치 않던 나는 책을 통해 진보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수명이 길어지면 인류는 진보하는 것인가? 아니면 수명과 관계없이 쾌락의 증대 혹은 진리에 도달 등 어떤 내적 만족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 때 인류는 진보하는 것인가? 단순히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 좋은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뇌사 상태로 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것인지는 모르겠다. 또한 교육이 보편화 되었다는 것은 지식과 기회가 평등해 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지혜를 잃어버리고 지식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양산하고 지배집단의 사상에 더 많은 사람이 세뇌 되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물음을 단순화 해보면 토론에 나타난 입장 차이처럼 진보는 과학의 영역인가 아니면 철학과 인문학의 영역인가에 대한 물음이 될 수도 있다. 토론에 앞서 진보 즉 나아진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1960년대 활동했던 비틀즈의 음악보다 지금 음악이 진보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조선시대에 살았던 어떤 사람과 비교해도 진보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나보다 건강하게 장수한 조선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고 나보다 물질적 재화가 많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류는 진보하고 있지만 나는 진보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생각은 토론에서 진보하는 탐구 대상을 왜 인류 전체로 잡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통계적 접근으로 인류의 미래가 더 나아진다고 확신하는 것이 옳을까? 가장자리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인간은 각자가 특수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런 특수한 인간을 인류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인류, 나라 속에 내가 아니라 나 자신을 대상으로 나는 나아질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는건 어떨까? 인간은 어디에 속해 있을때만 가치있는게 아닐 것이다. 인류의 미래가 통계적으로 또 평균적으로 더 나아지고 있다는 대답은 확률적으로 인류가 진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 나의 미래가 나아진다는 확신을 줄 수는 없다.

인류는 지금까지 약 2000년동안 진보에 집착해 왔다.(155)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내재된 결함을 완전히 근절 할 수는 없다.’(157) 어느날 인공지능을 통해서 완벽한 기계인간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닐 것이다.(158) 진보에 집착하기 전에 인간이 닿을 수 없더라도 끝없이 추구하는 나아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 없이는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토론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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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수수께끼
존 던 지음, 강철웅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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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민주주의의 수수께끼

서휘양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헌법 제11항에서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가지고 똑같이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몇 명이 됐든 인간이 함께 모여 있는 지구상 거의 모든 곳에 도달해 있다.(33) 민주주의가 도처에 있는 만큼이나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더 큰 수수께끼가 되어간다.

민주주의는 아테네에서 시작했다.(34) 아테네 민주주의는 소수가 아닌 다수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고 시민들이 사적 분쟁을 벌일 때 법 앞에서 평등하게 해주었고 개인의 업적과 노력을 통해 공적인 명예를 얻는 경쟁을 하거나 자신들의 부 또는 사회적 배경과 상관없이 도시의 지도자가 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도록 동등한 자유를 누리게 해주었다.(39) 아테네 민주주의가 뜻하는 것은 인민이 권력을 갖고 지배를 행한다는 것이다.(88) 인민의 지배는 공직의 추첨 등 여러 방식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모종의 극심한 직접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개인의 권력과 책임이 시민 집단 전체에 방대하게 확산되어 있다는 점(61)을 말해준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된 민주주의는 우여곡절 끝에 빛나는 승리를 획득했고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체제들은 거의 패망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이 지금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통치 형태는 윤곽이 상당히 흐릿해져 있다. 그것이 어떤 특정한 무대에서 어떤 특정한 시간에 그처럼 작동하도록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다.(290) 그렇지만, 현존하는 민주주의 통치형태는 대부분 인민의 지배가 아닌 대의제다. 대의제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큰 차이를 보인다.

아테네에서 아테네인들 위에 군림하는 최종적 권위를 보유한 자는 데모스 즉 인민 자체라기보다 법률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법률은 시민들의 민회와 법정의 끊임없는 해석 및 적극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궁극적인 우월적 지위를 행사할 수 있었다.(292) 민주주의 하에서 아테네 시민들은, 꽤 합당하고도 정확하게,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 엄청나게 덜 배타적인 근대 민주주의 체제들에서 시민 집단은 그런 유의 어떤 일도(입법 행정 사법적인 모든 국가의 중대 사안을 민회에서든 법정에서든 다수결로 결정함) 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다.(293) 아테네 시민으로 태어나는 행운을 가진 완전한 성인 남자라면 누구든 민회에서, 마침 그 자리에 참석해 있으면서 그러고자 할 경우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해 인민들에게 연설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근대민주주의가 법을 만드는 결정을 할 때(전쟁에 있어 더더욱)그와 조금이나마 유사한 어떤 일도 지금은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다. 평범한 시민들이 입법회의에 개인 자격으로 참석하는 일은 결코 없다.(309) 고대민주주의가 시민들이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이었다면, 근대 민주주의는 주로 시민들이 향후 자기들을 위해 선택을 하게 될 상대적으로 소수의 동료들을 대단히 제한된 상황에서 아주 가끔씩만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312)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왜 대의민주주의로 변질되었을까? 물음의 답은 근대 미국의 탄생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의 헌법제정회의에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했던 매디슨(James Madison)은 인민의 정부가 갖는 핵심적인 약점을 파벌이라고 했다. 매디슨은 파벌의 원인이 제거될 수 없다고 확신했고 나아가 순수한 민주주의는 파벌의 해악에 대해 아무런 치유책도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139) 또 미주연합은 거대한 영토를 포괄하고 있었으며 매우 많은 수의 인구를 수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적인 정부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거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정부 기획을 필요로 했다.(141) 즉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파벌과 거대공동체에 적용할 수 없다는 문제로 대의민주주의로 변형되었다.

대의 원리가 미 공화국의 중추를 이루었다. 희랍의 민주적 공동체들과 미국 정부 간의 진정한 차이는 폴리스의 관리에서 인민의 대표들이 포괄적으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 내의 어떤 역할에서도 집단으로서의 인민이 전면 배제되는 것이었다. (142) 집단으로서 자기들 공동체의 통치에서 전면 배제되는 인민이 공동체를 직접 지배한다고는 도무지 생각될 수 없었다. 최종적으로 공동체를 통제하는 것은 시민 대다수의 의지였지만, 미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제대로 된 용어로 부르자면 민주주의라고는 부를 수 없었다. 이것은 고대 희랍의 민주주의적 도시국가들과 미국이 다르고 미국이 전혀 민주주의가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143)

슘패터는 민주주의는 인민의 투표와 거기서 따라 나오게 될 통치 권력을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경쟁이며 그것은 인민의 지배가 아닌 정치인들의 지배라고 규정한다.(294) ‘정치인들의 지배는 평등을 파괴한다. 대의민주주의는 국가의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엘리트를 만들어 낸다. 정당한 폭력이라는 수단의 효과적인 독점에 의해 지원받는(125)정치 엘리트와 인민은 절대 평등할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의 선거를 두고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선거는 4년이나 5년에 한 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이다.”라고 까지 표현했다.

아테네의 순수한 민주주의는 파벌과 규모의 제약성을 이유로 대의민주주의로 변형되었다. 발달한 과학기술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규모의 제약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직접민주주의를 시행 할 수 있는 기술력과 사회적 시설이 구축되어 있다. 거의 모든 국민은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있고, 인터넷망에 접속하는 일은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것 만큼이나 쉽다. 또한 대의민주주의가 파벌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켰음은 정치 뉴스를 조금만 시청하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유지해야할 이유는 남아있지 않다. 자칭 민주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직접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아이러니야 말로 진짜 수수께끼는 아닐까?

직접민주주의 시행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다시 고대 아테네에서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대의제냐 직접민주주의냐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지배에 대해, 또 그것을 둘러싸고 형성되며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생활 방식에 대해 비난을 제기한다.(76) 플라톤은 평등에 대한 민주주의의 헌신에 부수하고 상응하는 자유를 향한 격정은 반드시 민주주의적 지배를 그 기반에서부터 약화시킬 것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형태의 권위를 해체할 것이며(77)결국 민주정은 자의적 지배 즉 참주정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자유의 절정인 민주주의로부터 가장 완벽하고 가혹한 노예상태로 급전직하하게 되는 것이다.(80) 매우 민주적인 방식으로 처형당한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민주주의는 어리석고 사악하며 언제나 잔인해질 가능성을 갖고 있는 자들의 지배(76)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비판한다. 그리고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철저한 교육으로 만들어진 철인이 통치하는 정치체제를 주장한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하는 현자는 존재할 수 없다. 즉 정치적 결정의 결과는 알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다. 하지만 그 정치적 결정을 내가 내렷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내린 결정을 강제로 따르는지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자유는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다. 인민이 권력을 갖고 행사하는 민주주의가 지혜로운 현자가 내린 결정에 복종하는 철인치자정체보다 인간의 자유를 더 실현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진 기술력을 이용해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 할 수 있다. 우리가 실현 할 직접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민주화된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민회가 열리는 광장에 나가지 않아도 발달한 정보통신은 24시간 어느 장소에서나 공론장으로 입장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아테네에서는 여자와 노예, 외국인을 제외한 오직 폴리스의 시민인 성인 남자만이 민주주의의 인민이었지만, 우리는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실현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든 안장에 누인 채 세상에 태어난다거나, 누구든 말에 탈 부츠 신고 박차 붙인 채 태어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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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법 - 미래 로봇이 알아야 할 인간의 모든 것, 2018년 행복한아침독서 선정
닉 켈먼 지음, 김소정 옮김 / 푸른지식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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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해줄까? 완벽한 호모사피엔스가 되는 법: 미래로봇이 알아야 할 인간의 모든 것,(How to Pass as Human, Nic Kelman, 김소정 옮김, 푸른지식, 2017)에서 안드로이드 제로의 사람이 되는 시험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과연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지, 인간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한다.

흔히 안드로이드 혹은 로봇은 감정이 없을 거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안드로이드 제로의 첫째 날 기록에서 이는 안드로이드에 관한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함이 밝혀진다. 안드로이드가 보기에 몸과 마음과 감정은 안드로이드와 사람 모두에서 완벽하게 결합하고 서로 의존하며 완전한 단일체로 존재한다. 즉 몸과 마음과 감정은 사실 한 결합체가 가진 세 가지 측면인 것이다.(13) 또한 안드로이드 제로는 거짓말을 하고, 배신당해 아파하며, 분노하여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등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만이 갖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한다. 감정은 인간만의 특징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젝은 안드레아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에게 거짓말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그녀가 떠나간 것에 대해 상실을 느낀다. 또 안드레아가 돌아왔을 때 기쁨을 느끼고, 다른 남자가 안드레아에게 관심을 보이자 자부심과 질투를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인간의 사랑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사랑 또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해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안드로이드 제로는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제로는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될 다음 세대의 안드로이드를 위해 인간관찰보고서를 남겨 놓는 이타심을 발휘한다. 생이 60분 남은 상황에서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또한 제로는 인간에 비해 훨씬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그가 남긴 인간관찰보고서에 따르면 인간이 주거공간, 인간관계 돈, , 종교 등등 많은 부분에서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안드로이드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에서 인간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에너지가 유한하고 수명이 짧은 인간은 자손의 번식과 보존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310) 안드로이드는 경쟁하지 않고, 자기를 기만하거나 파괴하는 성향도 없다.(311) 또 계산능력이나 기본적인 정보처리 능력은 인간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월등하다.

자신의 존재를 지켜내려는 목적으로 사람이 되는 시험에 임했던 제로는 많은 경험을 하며 변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문을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다른 의식에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230) 고문을 하지 않으며 무고한 사람이 죽고 동료를 배신하는 사람을 보며 사람처럼 보이는 일에는 그런 일이 따를 수밖에 없고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라면 나는 앞으로 절대로 내가 받은 명령을 수행하고 싶지 않다”(111)고 한다. 사람이 되는 시험끝에 안드로이드 제로는 자아를 인식하고 아버지 즉 창조자가 의도한 목적을 초월하여 주체적인 삶을 선언한다.

 

모든 건 제가 한 겁니다. 내가 한 거예요. 내가 살아간 겁니다. 아버지가 또다시 같은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 실패하고 말 거예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내린 결론처럼, 생명체가 프로그램 될 수 없다는 결론은 항상 이런 결과로 입증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단일한 의식으로 존재한다는 건 창조자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309)

 

무엇이 안드로이드 제로를 사람같이 행동하게 했을까? 그것은 경험이다. 안드로이드 제로의 아버지는 제로가 인간성을 갖도록 프로그램할 수는 없었고. 안드로이드가 인간성을 획득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인간성을 갖춘 안드로이드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많은 자료도 경험을 대체할 수는 없고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건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제로는 실제로 살아내야 했던 것이다.(289)

안드로이드를 사람답게, 또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것은 인생이다. 흔히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많은 것 감정, 이성, 사랑, 신의 등은 인간만이 갖는 특징 혹은 장점이 아니다. 한 생명체가 인간으로서 경험하고, 감정을 느끼고 살아갈때 한명의 인간이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즉 경험 속에서 인간은 탄생하는 것이다. 자료의 양은 한정되어 있지만 사람의 경험은 무한한기 때문이다.(25)

사람들이 석양을 볼 때마다 황홀해지는 건 그 모습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안드로이드가 사람을 바라본다는 건 매일매일 저무는 석양을 보는 것과 같다(27) 사람은 무엇인가? 안드로이드가 사람이 되려면 어떤 자격, 능력을 갖춰야 하나? 라는 질문보다는 나는 누구인가? 내 인생은 어떤 인생이 될 것이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를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에게 유일하게 1승을 거둔 바둑기사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인공지능에게 패한것은 인류가 인공지능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인공지능에게 패배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인류 속에서 나를 찾지 말고, 나의 인생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세상에 유일한 나를 인간답게 하는 것은 나만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갖고 의 존재를 만들어 가는 것만이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해주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의식이 없다 다이아몬드는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즉 다이아몬드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을 뛰어넘을 능력이 있다(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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