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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기분 - 한문학자가 빚어낸 한 글자 마음사전
최다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한자의 기분
시의적절한 단어를 사용하여 나의 감정을 내가 알아채고 스스로 어루만지기.
우리나라 단어 7-80센트 이상이 한자로 이루어진 한자어인데, 막상 우리는 한자를 공부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상황에 알맞은 단어를 사용하기보다, 좋다 나쁘다 힘들다 같은 쉬운 단어들로만 상황과 기분을 묘사하는 게 대부분이다.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도 정말 많지만, 우리는 기분이 좋다 나쁘다 기쁘다 정도의 간단한 단어로만 내 기분을 나타낸다. 전 세대에 걸쳐 자신의 기분을 이모지로 나타내거나, 단순한 단어로만 말한다. 내 상황과 기분에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기분이 왜 안 좋은지 생각하기 보다, ‘그냥’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상황을 무마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회피하고 인간 관계가 좁아지는 상황이 많아진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님은 한자를 사용하여 내 기분을 나타낼 단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우울감이 좀 해소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자의 기분’은 각 한자의 의미를 간단하게 풀어내며, 20개의 한자를 12부로 나눠서 각 주제별로 어울리는 한자에 관한 산문들을 엮은 책이다. 각 한자와 관련된 작가님의 일화를 풀어내는데, 한자 하나하나에 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읽었다. 그냥 에세이로 풀어쓸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한자에 어울리는 상황을 뽑아서 글로 풀어내 어떤 단어이고 어떤 한자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어서 아는 한자도 새롭게 보이는 재미를 느끼며 산문집을 읽었다. 책은 한 번 읽으면 그 자리에서 끝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한자의 기분’은 출근해서 하루에 한 쪽씩 읽어 나가는 재미를 느낄 법한 책이다. 꼭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내가 마음에 드는 쪽을 펼쳐 읽으면서 천천히 완독하는 성취감을 느끼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에세이가 아니라 산문집인 ‘한자의 기분’.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기분을 느끼는 사람, 덜 외롭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기분을 말해줄 정확한 단어를 찾는 것만으로도 덜 외로울 수 있다는 작가님의 따스한 시선을 직접 느껴보시길 바라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46쪽) 어둠 속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불을 밝혀주는 마음과, 어둠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한 톨의 빛이라도 막아주는 마음. 두 마음은 같은 모양의 사랑이리라. 사랑은 분홍이나 빨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흑과 세상 만물을 비추는 백으로부터 번진다.
62쪽) 나에게 그런 ‘세심’의 이식은 곧 내가 한껏 어지럽힌 집을 청소하는 일인 것 같다. 청소하면서 닦아내 말갛게 된 마음은 나도 모르는 구석 자리에 꽁꽁 잘 숨겨두어야 한다. 그래야 또 생활이 너저분해지고 나면 뽀얗게 씻겨 한동안 나를 잘 운영할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194쪽) 나의 사랑은 나의 마음[心] 속에 존재하는 것. 마찬가지로 너의 사랑은 너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니 누군가가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 방법은 마음을 꺼내어 드러낸 그 사람의 표현을 통해서뿐이다.… 번역되지 못한 사랑들은 마음 곳곳에서 어긋난 채로도 하염없는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