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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아
김필산 지음 / 허블 / 2025년 7월
평점 :
엔트로피아
시간을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니, 소재부터가 너무 흥미로워서 단숨에 읽게 되었는데 읽고 나서 오히려 혼란스러워졌다. 벤자민 버튼 정도의 느낌을 생각하고 읽었는데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각 잡힌 SF소설이었다니! 요즘 많이 읽었던 SF 소설은 과학이 첨가된 사랑, 감정 위주의 소설이었다면 ‘엔트로피아‘는 과학에 치중된 소설이다. 그렇기에 상상 그 이상의 스케일을 보여주고, 시간이라는 개념을 재창조하는 소설이다. 책 뒷표지에 써져 있는 우다영 작가님의 추천사가 딱 어울리는 책이다. “가여운 김필산, 어서 이 놀라운 책을 쓰렴.”
‘엔트로피아‘는 1800년을 사는 선지자의 이야기다. 그는 마땅히 부를 이름도 없고 부모도 없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미래만을 기억한다. 그런 그가 들려주는 세 가지의 에피소드는 각자 별개의 이야기다. 미래의 이야기를 로마 시대의 사람에게 들려준 선지자는 이야기를 마친 뒤, 부모를 찾아 갓난아이로 돌아가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세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공통적으로 ’시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님을 말하고, 두 번째 이야기는 자신의 시간을 멈춤으로써 영생을 누리는 것에 대해 말하며, 세 번째 이야기는 각기 다른 시간대의 자신들이 서로 만나는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간에 대해 말하는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어떠한 ‘존재‘로 느껴진다. 시간은 멈춰 있고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미래는 내가 하는 거에 따라 바뀔 거라 믿으면서. 선지자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자신이 이미 미래를 보고 왔기에 바뀌지 않을 것이고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로 미래는 바뀌지 않고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걸까? 선지자의 세 번째 에피소드은 ’두 서울 전쟁’을 읽다 보면 미래는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냐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냐에 따라 미래는 바뀔 수 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믿는 것도 개인의 선택이다. 선지자는 이야기를 할 뿐,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한 독자의 몫이다.
기존의 SF와 달리 과학에 치중된 소설이라 혹시 하고 작가 소개를 읽었는데 작가님이 역시나 물리학을 전공하셨다. 얼마전에 읽은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과 비슷한 결로 과학적인 개념들이 많이 사용되었지만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은 과학이 도구로 사용된 책이라면, ‘엔트로피아‘는 과학이 목적 그 자체다.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다루고 있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이 떠오르는 책이었다. 여러 번 보면 매번 새로운 해석이 떠오르고, 사람들의 해석이 전부 제각각이기에 독서 모임용 책으로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과학에 좀 더 집중되어 있고 사람들의 해석이 전부 다를 수 있는, 독서 토의하기 좋은 책으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