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조화 - 심미적 경험의 파장
문광훈 지음 / 아트북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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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악의에 맞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게는 빗장이 있다.”(표지 뒷면) 이 책의 표지에서 저자가 독자에게 ‘심미적 동행’을 권하면서 하고 있는 말이다. 세상을 선의와 악의로 구분할 수 있다면-아마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선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악의에 맞서는 방법이 최소한 ‘빗장걸기’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빗장’이란 어찌보면 ‘감당할 수 없는 자유와 두려움으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수단’으로 이용될 우려가 있다. 까뮈의 말처럼 예술가는 ‘괴로움과 아름다움에 동시에 봉사’해야 한다.(예술가와 그의 시대) 마찬가지로 예술가는 선의와 악의에 동시에 맞서야 한다. 악의 없이는 선의도, 추함이 없이는 아름다움도, 괴로움이 없이는 행복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예쁘다’거나 ‘편안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추악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아름다움이다.”(21쪽), “폐허의 흔적을 지니지 않은 아름다움은 거짓이다.”(191쪽)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편견도, 의미도 부여함이 없이 독자의 눈으로 ‘예술가의 의지’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갈등의 현상이든, 숨은 조화든,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심미적 개인’의 몫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조화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빗장을 풀어야 한다. 예외없이 숨겨둔 그 빗장의 용도는 아마도 ‘빗장풀기’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상호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심미적’ 경험(10쪽)을 통해 저자는 다양한 예술의 재현형식들이 사회에 어떤 구속력(?)을 가진 공공재(11쪽)로서 기능할 것을 희망하고 있는 듯 하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의 ‘시대정신’을 탄생시키기 위한 ‘시대적 처방’으로서의 ‘심미적 경험쌓기’를 강조하고자 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개념상으로는 ‘미적’인 것이든, ‘심미적’인 것이든, ‘공공재로서의 그것의 경험’이란 아마도 소통과 공유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리라. 그런 각자의 ‘내적 경험들의 소통과 공유’, 그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또는 ‘인간 이후의 인간’들이 의지할 수 있는 ‘동행으로서의 휴머니즘’이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자신의 경험과 그 파장들은 하나의 파급으로서의 의미는 충분히 갖고 있다고 본다. 이미 그는 씨를 뿌리고 있으므로 수확과 그 이후는 전적으로 ‘심미적 독자’의 몫일 것이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한, 각자의 삶들은 그 형식 여하를 불문하고, 또 하나의 예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면서 보여지고, 느끼면서 느껴지는 존재’(31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로 난 통로’(29쪽) 중 하나로서 듣기의 대상인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리의 개별적 표현 가능성은 다른 소리의 가능성에 의해 보장되고 동시에 제한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공동체 속에 거주하는 개인의 가능성과 크게 다를 바 없다.”(38쪽) 공동체 속의 개인의 자유라는 것도 그 ‘가능성의 보장’만큼 ‘관계 속에서 제한’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관계속에서의 평형’(178쪽), 그것이 ‘정의의 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심미적 경험’을 ‘공감적 이해의 반성적 감수성을 연습하는 일’(74쪽)로 가둬둘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규범과 제도 속의 자유는 ‘최소한의 보장’에 그치고 있을지라도, ‘심미적 체험’을 위한 자유는 ‘최대한의 보장’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공감’하더라도 서로 ‘연인’아니라 ‘적’으로 맺어진들 그리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예술이란 그조차 자유로운 영역에 속한 것일 터이니, ‘반성’이 아니라 ‘반항’이더라도 무방하리라.

제2부 이하에서 서술하고 있는 저자의 고요한 심미적 경험의 파장에 ‘동행’함으로써 분명 하나의 문턱을 넘어선 세상, 그 확대된 어떤 지평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저자의 바램대로 희망과 절망의 경계에서 그 틈을 메우는 양식(115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소음현실’이 ‘있어야할 것으로서의 고요현실’(119쪽)임을 깨닫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예술로서의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럼으로써 예술가들과 그 심미적 경험들을 전하는 저자의 힘을 빌어 스스로의 ‘존재의 확장’(169쪽)을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예술가들의 그 은밀한 ‘숨은 조화’들을 찾아낼 때,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창조’이며, 더불어 ‘신의 탄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때만이 ‘신’은 절대 타자로서의 ‘영원성’(192쪽) 속에 소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 소멸되는 자신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발견되어져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염려대로 가장 두려워해야할 것은 ‘미숙한 채로 굳어버리는 일’(232쪽)이거나, ‘그냥 살아감’, 그 ‘살아감의 위대함’(231쪽)을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소박’한 삶인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그냥 살아감의 ‘용기’를 실행하고, 각자의 ‘길 위에서 흥얼거릴 가락’(237쪽)을 찾는 것도 또한 온전히 ‘심미적 독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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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의 신화 - 교양사상신서 13
알베르 까뮈 지음 / 육문사 / 199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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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운명은 그의 소유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들을 침묵케 한다.”(시지프스의 신화, 163쪽)

모든 우상들까지도 침묵케 하는 그 치열한 고통의 응시는 신의 행위인가? 인간의 행위인가? 인간의 행위라면, 누구나 그런 확고부동한 응시가 가능할 것인가?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개인의 운명인가? 새로운‘신을 창조하는 행위’인 것은 아닌가?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에는 인간적인 기원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몹시 보길 원하지만 그 밤엔 끝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눈먼 사람인 그는 여전히 바위를 굴려 올리고 있다. 바위는 여전히 굴러 내리고 있다.”(시지프스의 신화, 164쪽)

그가 갈망하고자 했던 것은‘성실히 반항’하는 인간 승리의 모습이었던가? 비록 어찌할 수없음을 알아차리더라도 그 속에 갇힌 듯 행복하게 체념(?)할 수 밖에 없는 ‘운명 속의 삶’은 결코 알을 깰 수는 없는 것인가? 깨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어느 정도까지만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인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나머지 시간의 영역들은 온전할 것인가?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다시 반항하는 것인가? 반항하면 더 행복해지는 것인가? 그냥 반항할 뿐인 ‘삶 자체’인 것인가? 좀 더 나은 방법으로 반항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산 꼭대기를 향한 그 투쟁 자체가 한 인간의 가슴을 채우기에 충분하다.”(시지프스의 신화, 164쪽)

한 인간의 가슴 속에는 산 꼭대기를 향한 그 투쟁말고는 어떤 것도 허용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불필요한 것인가? 투쟁 속의 고통까지도 ‘삶 자체’임을 알아차리라는 뜻인가? 그런 괴로움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는 것이 ‘삶’임을 알라는 것인가?

“오늘날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헬레네의 추방,236쪽)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좌절한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인가? 아니면 잃어버린 자유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인가? 그들의 길은 어디까지 아름다운 것인가?

“결국 배타적이 되도록 강요하는 것 치고 진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립된 아름다움은 억지 웃음을 웃는 것으로 끝나고, 고독한 정의는 억압으로 끝난다.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한 사람만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봉사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불공평함을 두 번 저지르게 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고집 때문에 아무것도 더 이상 의문을 일으키지 않고, 모르는 것이 없고, 한가지 일만을 거듭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에 온 생애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추방의 날들이며, 메마른 삶, 죽은 영혼의 날들이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은총 ․ 자기 망각, 혹은 고향 땅이 필요하다. 어느 아침, 한 모퉁이를 돌 때, 환희의 이슬방울이 가슴에 떨어졌다가는 이윽고 증발한다. 그러나 그 서늘함은 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가슴이 언제나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나는 다시 출발해야만 했다.”(티파사로 돌아오다, 242쪽)

공평한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인간은 관계 속에서 정의되어야 하는 것인가? 개인의 고독은 어떤 죄인가? 고향 땅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안식을 구할 것인가? 환희의 이슬방울이 떠나간 자리, 그 서늘함을 맛보기 위해 늘 길 위에 있어야 하는가?

“우리의 광기어린 그 최악의 세월 속에서도 그 하늘의 기억이 결코 나를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고서, 나는 나의 행운을 헤아려 보았다. 결국 내가 절망하지 않도록 막아 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티파사로 돌아오다, 246쪽)

시지프스가 굴러 내려온 돌을 주저없이 다시 밀어 올릴 때에도 그와 같은 행운인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려오는 길에 그런 하늘을 본 것이었을까? 아무튼 그런 ‘빛’들이,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불행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반항의 의지’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괴로움과 아름다움에 동시에 봉사’(예술가와 그의 시대, 256쪽)하는 예술가들의 위대함으로 인하여‘정글의 미래’는 앞으로도 계속 희망적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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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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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든 형식의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참가자들(주로 맹신자들)의 일련의 심리적 특성을 다룬다. ‘좌절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일정한 가설을 세우고, 이 책의 ‘현재’인 1951년을 기준으로 대중운동을 분석, 나름대로의 맹신자들의 심리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좌절’은 임상학적 용어가 아니라 ‘인생을 낭비하거나 망쳤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뒤의 주에서 밝히고 있다.(243쪽)

‘신을 믿지 않는 시대’에 그들이 만들어 내는 ‘신들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며, 덧붙여 몽테뉴의 말을 빌어, 단순히 자신의 견해에 불과할 뿐임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논의를 제안하는 것임(14쪽)을 밝히고 있다. 저자 ‘에릭 호퍼’는 이 책을 서술할 당시는 부두노동자로서 살았으며, 평생을 길 위의 노동자로 떠돌면서 남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연구한 사회철학자였다고 한다.

대중운동의 참여자들은 그 ‘운동’을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며, 그 방법으로 ‘종교화’ 기술-현실적 목표를 숭고한 대의로 바꿔놓는 기술-을 강조(20쪽)하면서, 변화를 향해 그들의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게 만드는 ‘갈망’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대중운동의 역동기-맹신자들이 형성하고 압도하는 단계-를 다룬다.(222쪽) 달리 말하자면 일종의 ‘위기사회이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로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현 상태를 보존하고 싶어하지만, ‘좌절한 사람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고 한다.(21쪽) 그러나 ‘충만’과 ‘좌절’이라는 외적인 요소와는 상관없이 순수한 ‘의지’적인 요소만으로, 단순히 맹신하는 차원이 아니라 합리적 수준의 ‘희망을 신뢰’하는 ‘양호한’ 사람들은 여기서의 주된 논의의 관심사는 아닌 듯하다. 또한 ‘맹신자’니 ‘광신자’란 어떤 도덕적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는 것 아니라, 단순히 사실적인 ‘믿음의 정도’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빈곤층의 보수성’(23쪽), 경험은 변화의 ‘장애’가 되며, ‘경험자’들은 대개 늦게 개입한다(28쪽)는 등의 의견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빈곤층의 보수성’으로 인하여 현대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라는 것도 효율적인 기득권 유지를 위해 어쩌면 의욕적으로 ‘의도’된 결과이거나 최소한 고의적으로 ‘방치’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역사라는 놀이는 흔히 중간자의 다수자들은 제쳐 놓고 최상위와 최하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46쪽)

어찌보면 역사의 일반적 보편성이란 개별 특수성들의 사후평가 작업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중운동의 개별 참여자들과 그들의 맹신성조차도 되돌아 보면, 그들의 좌절에 대한 ‘상황적 분노’의 표현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개개인의 삶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무엇보다 간절한 막다른 길 위의 ‘전부인 삶’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있었던 것인가? 위기의 사회는 그들을 얼마나 포용했을까?

그러나 상대적으로 최근에 우리 사회의 가난해진 ‘신빈곤층’(49쪽)의 확대는, 그들의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중산층의 기억’을 보상받지 못하는 한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대중운동에 적극적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와 관련하여서는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반항을 자극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경험이다.”(52쪽)

그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재능이 없는 한, 자유란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담이다.”(55쪽)라면서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능력없는 사람들이 운동에 가담한다고 한다. 나아가 “인생을 허비하고 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유보다 평등과 우애를 더 갈망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자유는 “평등과 획일성을 세우기 위한 자유일 뿐”(57쪽)이라고 폄훼하고 있다.

‘자유’의 역사 속에서 ‘자유로부터의 소외’를 위한 투쟁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를 쟁취한 다음에는 그 ‘자유로부터의 자유’를 찾고 있는 대중들의 불안한 심리를 발견하고 있다. 살아있는 대중은 늘 불안하다. 그 중 ‘좌절한 사람들’은 자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며, ’도피의 대상인 자유‘는 더 이상의 자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자유’의 개념이란 획일성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리적인 평등’ 정도는 아우를 수 있는 ‘부조리하지 않은 자유’이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대중이 갈망하는 자유는 자율적인 삶이라는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부터의 자유”(206쪽)이므로 “대중운동이 사무치도록 좌절한 이를 치유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곤경이나 학대로부터 구제해줘서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67쪽)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소수일지라도 ‘순수한 의지적 측면’을 지나치게 소홀히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은 여기서 논외로 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개인주의가 널리 퍼진 우리 시대에 연극적 주문(呪文)과 불꽃놀이 없이 자기희생이 널리 퍼질 수 있을지 의문(103쪽)이라며, 서로 나누고 협력하는 행위에 담긴 자기희생은 희망없이는 불가능하다(108쪽)고 한다. ‘희망’이란 ‘운동의 기술’로서 보다는 그 자체로서 ‘인간에 대한 믿음’의 바탕이 되는 것이리라. 또한 현재와 미래, 과거를 바라보는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회의주의자, 급진주의자, 수구주의자들의 태도비교는 상당히 흥미롭다.(52)

“대중운동이 시작되고 전파되려면 신에 대한 믿음은 없어도 가능하지만, 악마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137쪽)고 한다. 그러나 형식을 불문하고 대중운동은 그 자체로써 대부분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므로, 그 삶이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희망’를 창조해나가는 ‘자전거타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악마’이든, ‘신’이든 간에 계속하여 페달을 밟지 않으면 그 순간 바로 넘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뻔뻔한 어휘와 행동 뒤에는, 그리고 자기만 옳다는 큰소리 뒤에는 죄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142쪽)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그런 뻔뻔함 뒤에도 그러한 일말의 죄의식이라도 남아 있다면, “자신과 화해한 자만이 세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126쪽)고 한 말처럼, 그나마 화해의 희망이라는 불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대중운동에 있어서 ‘지식인 선구자’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열광하는 대중, 신념에 주린 대중들이 그러한 주장들에 확신을 부여하여 새로운 믿음의 근원으로 삼는다.”(204쪽)고 한다. 즉 일종의 새로운 우상을 창조하여 스스로 신을 만드는 종교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운동을 개척하는 것은 지식인, 실현하는 것은 광신자, 굳건히 다지는 것은 행동가다.”(214쪽)라고 한다. “행동가는 대중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분쟁과 광신자들의 무모함으로부터 지켜낸다.”(216쪽)고 한다. 그래서 ‘좌절한 영혼’을 은밀하게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명예롭게 대함으로써 명예로운, 지도자들의 예를 들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행동가는 신념가가 아니라 법률가이며, 행동가는 새 체제의 안정과 지속성을 꾀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절충적으로 동원하므로(218쪽), “행동가의 손에서 다듬어지는 체제는 일종의 조각보”(219쪽)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자본주의니, 공산주의, 사회주의라는 체제의 논쟁도 ‘자유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안식과는 무관하게, 어찌보면 잘 짜맞춰진 ‘조각보들의 색깔논쟁’에 치우친 감이 있다. ‘조각보의 색깔’이 뭐 그리 대수인가?

“격정적인 시기가 지난 운동은 성공한 자들에게는 권력의 수단이요, 좌절한 이들에게는 아편이 된다.”(221쪽)고 한다. 대중운동이 아무리 ‘정체된 사회를 각성시키고 혁신하는 요인’(237쪽)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무기한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사회의 소통구조를 만드는 것이 운동의 왜곡을 방지하고, 그들을 치유하여 동행하게 하는 예방적 조치들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비록 극히 소수의 예외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좌절되지 않은, 양호한 명예로운 사람들’의 대중운동 참여 심리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지금도 진행되고 있을 모든 형식의 대중운동(삶)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특히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일부 사람들(절박한 삶)의 일면적 심리인 ‘좌절’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참고가 된다고 본다.

“한 국가의 잠재적 역량은 갈망들의 저수지와 같다.”(236쪽)는 점과, ‘광신주의’라는 ‘영혼의 질병’이 부활이라는 ‘기적의 도구’로도 작용하는 것을 발견(241쪽)하면서, 그것이 명백하든, 명백하지 않든 간에 자신의 어떤 분노와 좌절, 그리고 ‘갈망’들이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잠재적 동인이 되고 있음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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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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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20세기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의 은사’이자 동시에 역설적으로 ‘의식화의 원흉’이었던 리영희 선생님의 자서전이다. 당신의 살아 생전에 지배계층의 측면에서는 그보다 더 껄끄러운 존재는 없었을 것이며, 피지배계층의 사람들에게는 무지의 눈을 뜨게 해 준 글자 그대로의 위대한 ‘스승’이었다.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로서는 ‘동물의 왕국’을 들고 계시면서(726쪽), “인간의 선천적 본성은 이기주의이다. 후천적, 사회적 제도와 ‘훈련’ 및 ‘규율’(discipline)은 그것이 지속되는 한도에서 어느 정도까지 이기적 본능을 억제할 수 있지만, 그 외적 강요는 영구적일 수 없고, 따라서 외적조건만 이완되면 잠재했던 이기적 본능은 부활한다. 인간의 하반신적•동물적•물질적 조건과 상반신적•인간적•정신적 자율성은 통합적•균형적•동가치적이다. 그러나 그 충족의 우선순위는 하반신적•물질적 요소가 앞선다. 정신주의의 힘은 ‘동물적’ 즉 하반신적 충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생명체에게 기약없이 요구될 수 없는 ‘인간조건’이다.”(568~569쪽)라고 하신다.

인간의 선천적 본성에 대한 ‘인간조건’으로서의 ‘한계지움’은 일생을 바친 선생님의 사실보도와 계몽활동, 그리고 연구성과 등으로 반추해 보건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투쟁으로써는 본질적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어떤 대상에 대한 고백처럼 들린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아마도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잃어가고 있는 ‘인간욕망’들의 자리매김일 것이며, ‘탐욕’을 제어하는 부단한 이성들의 각성이 요구되는 부분일 것이리라.

덧붙여 “그러나 인간과 인류의 진정한 승리는 그것과 다른 의미의 절반의 승리를 필요로 한다.”(684쪽)라고 하시면서, 마지막까지 ‘가치있는 정신’들의 자리매김이 어리석은 우상들을 파괴하고, ‘인간조건’들을 ‘사람사는 세상’에 걸맞게 할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결국 인간의 몸은 하반신과 상반신이 따로 존재할 수는 없으며, 그 둘은 동행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성찰하고, 통제하는 자기검증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반신불수가 아닌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비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가 기본원리인 공동체)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는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687쪽)라고 하신다.

사회 구성체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결과물’로서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이라면, 사회주의는 그러한 결과물이 아니라 어쩌면 다양한 제3의 길에 대한 개별 공동체들의 구체적 고민의 ‘과정’들은 아닐까 싶다. 따라서 그러한 사회 구성체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과정’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그 결과물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와는 존재의 평면을 달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유’민주주의니, ‘사회’민주주의니 하는 것들도 정작 중요한 ‘민주주의’는 소홀히 한 채 헤게모니를 위한 새로운 우상들의 창조는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자유와 평등은 동등하고 동격의 가치를 지닌 요소이지만, 집단적 인간의 행복추구의 실천적 순서로서는 ‘자유’가 ‘평등’ 앞에 있다. 자유는 ‘인간’ 생명체의 원초적 본성이고,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사회적 조건’이다.”(523쪽)라고 하신다.

어쩌면 ‘제도로서의 자유권’은 개념 내재적으로 책임으로서의 평등을 이미 내포한 개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도 이전의 자유’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때 그때의 ‘시대정신’에 따라 ‘시대적 처방’으로서 그것을 재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평등’보다 ‘자유’를 앞세운 것이리라.

우리가 향유하는 ‘제도로서의 자유’는 처음부터 모든 형식의 동행인 것이므로 평등은 이미 자유 속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두 갈래의 철길이 침목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기차가 다닐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두 갈래의 선로와 받쳐진 침목이 합쳐져서 처음부터 ‘하나의 길’로 불리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조건’과 마찬가지로 ‘인생조건’인 것은 아닐까 싶다.

분단 조국의 현실을 앞에 두고,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 유린되고 있는 민족의 양심을 세우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으시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으신 것은, 아마도 ‘민족에 대한 사랑’이 그 바탕에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의 방법’은 비록 세련되지 못했을지 모르나, ‘사랑의 깊이’만큼은 ‘그의 분노’보다는 분명히 깊고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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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깨달음 - 하버드에서의 출가 그 후 10년
혜민 (慧敏)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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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7쪽)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의 무게 중심은 ‘하버드’가 아니라 젊은 날의 ‘깨달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제를 단 출판사의 고뇌를 이해하기란 우리의 학력지상주의 사회현실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결론이다. 비록 하버드대 입학성공기나 아이비리그로 가기 위한 비법(?)들은 없지만, 그보다 더 향기롭고 가치있는 저자의 수행일기가 에세이 형식으로 조용한 울림으로 파고든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 석사를 수학하던 중 출가를 해 승려가 된 저자는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공부 중 유학생활의 경험을 포함한 출가 후 10년 동안의 일상과 미 동북부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햄프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소회들을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로 전하고 있다. 하버드를 통한 최고의 가르침은 친구 존의 보이지 않는 선행을 통한 것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19세기 독일의 저명한 종교학자 막스 뮐러의 “하나만 알고 있다는 것은 그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206쪽)하면서 폭넓은 사고와 경험을 통한 통찰능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더불어 “영어를 마스터 하는 것은 마치 도(道)를 닦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일본의 스즈키 순류의 말을 인용(20쪽)하면서 하나를 제대로 아는 길도 결코 순탄치 않음을 자신의 ‘경복궁 영어’ 경험을 통해 소개하면서 문화의 이해(19쪽)에 우선적인 방점을 두고 있다.

독종만이 살아 남는 전투적 사회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면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꿈보다는 지금 당장 실현가능한 주변의 행복에 더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 볼 것을 권하고 있다.(41쪽) 지금 이 순간 주변을 살피면서 조건없이 나누어 줄 때 행복이 바로 나와 같이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 까닭일까. 저자가 자신의 무의식으로 직감적으로 알아 본 전생의 은인같은 어느 스님과의 만남이라는 인연(32쪽)은...

저자는 겉으로 화려한 장미꽃 같은 사람과 내적으로 굳건한 소나무 같은 사람을 구분하면서(44쪽), 3일을 넘기기 힘든 장미의 화려함보다는 사시사철 변하지 않고 넉넉한 그늘을 제공하는 소나무와 같은 사람이 좋다(47쪽)고 한다. 어찌보면 3일을 꽃피우기 위한 장미의 인욕의 시간과 사시사철 푸르기 위한 소나무의 지계가 어떤 차이를 가지는 것일까 의문이지만, 나 역시 겉으로 화려한 장미보다는 일관된 소나무에 가깝고 싶다는 분별이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럽긴 하다.

법화경 비유품의 ‘불타는 아이들’을 거론하며(57쪽) 어른들의 치기어린 어리석음도 경계의 대상이라 하였으며, 이삿짐을 싸는 친구의 ‘트럭 속 10년 인생’과 함께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 시작이 좋은 인연보다는 끝이 좋은 인연이 참으로 좋은 인연이라 하면서 불교의 무시무종(無始無終)을 언급하며 늘 새로운 인연을 위한 아름다운 마무리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66쪽)

중국 유학시절 도난당한 자전거의 원인은 탐심을 자극한 자신에게 있다(72쪽)고 하면서 부실한 열쇠를 탓하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지적한다. 미국 교육의 경쟁력은 공정한 장학금 집행 등 배분적 정의에 비교적 충실하려는 제도와 토론중심과 사고력배양에 초점을 둔 내실있는 교육정책의 결과라고 하면서 다양성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풍토를 부러워하고 있다.(110쪽~115쪽)

사랑이란 중생 본래의 성질인 본인 위주의 이기적 마음이 어떤 대상을 통해서 최소화되었을 때 겪게 되는 마음의 상태(125쪽)라고 정의하면서,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존경하는 마음을 더불어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134쪽)고 한다. 어쨌든 사랑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날 문득 손님과 같이 찾아오는 생의 가장 귀중한 선물(127쪽)이라고 아울러 전하고 있다. 사랑도 상대방을 위해 베푸는 마음이 앞서야 하는 지혜를 강조한 뜻이리라.

초등학교시절 어느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139쪽)을 키워주시고, 믿음과 희망을 가게 한 칭찬 한마디의 힘(141쪽)을 갖게 해주었음을 언급하면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소한 원인으로도 크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전하고 있다. 아울러 심리적으로 매우 민감한 버튼을 누를 때(push the button) 격렬한 반응의 원인은 집착이며, 그 집착의 근원은 공포라고 한다.(221쪽)

세상의 모든 물체는 일정한 진동수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공명의 원칙’을 강조하면서(231쪽),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채우고 완성하는데 보탬이 될 수도 있으며(237쪽), 미리 어떤 선입관을 갖고 일을 행할 때는 ‘아난다의 오류’(241쪽)와 같은 간격이 있을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남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공덕이 나의 공덕이 되며, 남이 지은 공덕을 같이 기뻐할 수 있는 보현보살의 수희공덕의 원(242쪽)을 더불어 강조한다.

화엄경에 의하면 ‘회향’이란 “중생들에게 모든 공덕을 돌려 중생들에게 일어날 온갖 나쁜 일의 문을 모두 닫아 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을 활짝 열어 보인다.”는 뜻(251쪽)이라고 하면서,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결국은 본인부터 돕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은 자신을 살피는 일이며 결국 보살행이란 누구보다 자신을 구제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거듭 강조하는 의미일 것이리라.

깨달음은 빠를수록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한 생각 깨쳤는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 빠르고 늦는 것은 크게 상관없는 일일 것이리라. 개인적으로는 비록 더 이상 신체적 젊음을 이야기하기에는 늦은 입장이지만, 저자의 소중한 젊은 날의 깨달음의 기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구도의 고뇌와 환희를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늘 길 위에서 정신적 젊음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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