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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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20세기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의 은사’이자 동시에 역설적으로 ‘의식화의 원흉’이었던 리영희 선생님의 자서전이다. 당신의 살아 생전에 지배계층의 측면에서는 그보다 더 껄끄러운 존재는 없었을 것이며, 피지배계층의 사람들에게는 무지의 눈을 뜨게 해 준 글자 그대로의 위대한 ‘스승’이었다.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로서는 ‘동물의 왕국’을 들고 계시면서(726쪽), “인간의 선천적 본성은 이기주의이다. 후천적, 사회적 제도와 ‘훈련’ 및 ‘규율’(discipline)은 그것이 지속되는 한도에서 어느 정도까지 이기적 본능을 억제할 수 있지만, 그 외적 강요는 영구적일 수 없고, 따라서 외적조건만 이완되면 잠재했던 이기적 본능은 부활한다. 인간의 하반신적•동물적•물질적 조건과 상반신적•인간적•정신적 자율성은 통합적•균형적•동가치적이다. 그러나 그 충족의 우선순위는 하반신적•물질적 요소가 앞선다. 정신주의의 힘은 ‘동물적’ 즉 하반신적 충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생명체에게 기약없이 요구될 수 없는 ‘인간조건’이다.”(568~569쪽)라고 하신다.

인간의 선천적 본성에 대한 ‘인간조건’으로서의 ‘한계지움’은 일생을 바친 선생님의 사실보도와 계몽활동, 그리고 연구성과 등으로 반추해 보건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투쟁으로써는 본질적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어떤 대상에 대한 고백처럼 들린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아마도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잃어가고 있는 ‘인간욕망’들의 자리매김일 것이며, ‘탐욕’을 제어하는 부단한 이성들의 각성이 요구되는 부분일 것이리라.

덧붙여 “그러나 인간과 인류의 진정한 승리는 그것과 다른 의미의 절반의 승리를 필요로 한다.”(684쪽)라고 하시면서, 마지막까지 ‘가치있는 정신’들의 자리매김이 어리석은 우상들을 파괴하고, ‘인간조건’들을 ‘사람사는 세상’에 걸맞게 할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결국 인간의 몸은 하반신과 상반신이 따로 존재할 수는 없으며, 그 둘은 동행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성찰하고, 통제하는 자기검증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반신불수가 아닌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비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가 기본원리인 공동체)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는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687쪽)라고 하신다.

사회 구성체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결과물’로서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이라면, 사회주의는 그러한 결과물이 아니라 어쩌면 다양한 제3의 길에 대한 개별 공동체들의 구체적 고민의 ‘과정’들은 아닐까 싶다. 따라서 그러한 사회 구성체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과정’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그 결과물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와는 존재의 평면을 달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유’민주주의니, ‘사회’민주주의니 하는 것들도 정작 중요한 ‘민주주의’는 소홀히 한 채 헤게모니를 위한 새로운 우상들의 창조는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자유와 평등은 동등하고 동격의 가치를 지닌 요소이지만, 집단적 인간의 행복추구의 실천적 순서로서는 ‘자유’가 ‘평등’ 앞에 있다. 자유는 ‘인간’ 생명체의 원초적 본성이고,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사회적 조건’이다.”(523쪽)라고 하신다.

어쩌면 ‘제도로서의 자유권’은 개념 내재적으로 책임으로서의 평등을 이미 내포한 개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도 이전의 자유’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때 그때의 ‘시대정신’에 따라 ‘시대적 처방’으로서 그것을 재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평등’보다 ‘자유’를 앞세운 것이리라.

우리가 향유하는 ‘제도로서의 자유’는 처음부터 모든 형식의 동행인 것이므로 평등은 이미 자유 속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두 갈래의 철길이 침목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기차가 다닐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두 갈래의 선로와 받쳐진 침목이 합쳐져서 처음부터 ‘하나의 길’로 불리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조건’과 마찬가지로 ‘인생조건’인 것은 아닐까 싶다.

분단 조국의 현실을 앞에 두고,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 유린되고 있는 민족의 양심을 세우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으시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으신 것은, 아마도 ‘민족에 대한 사랑’이 그 바탕에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의 방법’은 비록 세련되지 못했을지 모르나, ‘사랑의 깊이’만큼은 ‘그의 분노’보다는 분명히 깊고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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