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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깊은 바다
파비오 제노베시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도메니코 신부님이 몸은 죽어도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살아간다고 말해주셨을 당시에는
그 영혼이라는 게 상상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모든 사람의 영혼이 뭔지 깨달았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아름다운 이야기일수록 입과 귀로 많이 전달되며 오래도록 남는다.
우리의 몸은 관 속에 머물지만 이야기는 전 세계를 여행하고 길이길이 남는다.
성장소설의 아름다운 이유는 아이의 눈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속세에 찌든 어른의 눈으로는 결코 깨닫지 못했을 비밀과 진실들을 읽어가다 보면, 어린 시절의 나 자신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유명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란 책을 정말 사랑하는데, ‘물이 깊은 바다’를 읽는 내내 그 책이 떠올랐다. 그만큼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탈리아에 있는 파비오 제노베시의 영혼과 같은 이 이야기가 먼 타국의 나에게까지 여행 온 것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 역시 나처럼 많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주인공인 여섯 살 어린 아이 파비오에게는 열 명이나 되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것도 하나같이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 괴짜인 데다가 노총각이다. 사랑하는 손자가 쓸모없는 것들만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느라 자신들과 지낼 시간이 부족하자, 교실에 쳐들어가 ‘닭장 만드는 법’을 열변했을 정도로 지극한 손자 팔불출들이기도 하다.
파비오는 자신의 가정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하다, 어느 날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가 쑥덕대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바로 파비오 집안 남자들에게만 내려진 저주에 대한 것으로, ‘마흔 살이 되기 전까지 결혼을 못하면 미치광이가 된다’는 것이다! 파비오는 할아버지들이 모두 걸려버린 이 무시무시한 저주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한다. ‘물이 깊은 바다’와 같이 무자비하고 알 수 없는 ‘인생’이란 것 속에서 무사히 헤엄치기 위해.
이 책에서 ‘바다’는 ‘인생’에 비유된다. 이탈리아어 ‘IL MARE DOVE NON SI TOCCA’가 무슨 뜻일까 찾아보니, ‘만질 수 없는 바다’라는 뜻이었다. 너무 깊어서 발이 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파비오는 여섯 살 때 아빠와 선상 낚시를 하다가 두렵고 불안한 이 깊은 바닷속에 빠지게 되는데, 아빠는 그를 구해주기는커녕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죽는 줄만 알았던 순간,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파비오는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게 된다. 그제야 아빠는 파비오를 배 위로 끌어 올려준다. 그날 파비오가 배운 건 수영하는 법, 그리고 발끝을 더듬거리며 저 아래 어딘가에 있을 땅을 찾기보다는 ‘인생이란 바다 위에 떠올라 살아가는 법’이었다.
‘파비오, 어차피 네 물고기는 아무도 잡아가지 않을 테니까.’
아무도 당신의 물고기를 잡아가지 않는다.
이상하게 헤엄치고 마구잡이로 헤엄쳐도 결국은 당신에게로 온다.
파비오는 늘 할아버지들을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 틈에 살아가면서, 남들과는 조금 달라 주류 문화에서 소외되는 스스로를 자각하며, ‘미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또래 문화에 뒤처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누구나 경험해 본 이야기들이다. 작가는 파비오의 아버지, ‘조르조’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너의 물고기는 어딘가에 있으며, 아무도 잡아가지 않는다고.
난 내가 뒤처졌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앞서가고 있던 것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앞서간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
파비오뿐만 아니라 훌쩍 나이를 많이 먹어버린 어른들 역시, 지금 지나가는 저 기차를 놓치면 삶에서 뒤처지는 것처럼 다급하게 뛰어다닌다. 이미 놓친 기차에 뒤늦게라도 올라타려고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까지 저지른다. 이 소설은,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미치광이처럼 보여도 그것이 옳다면, 옳다고 생각한다면, 남들 눈에 미치광이로 보이도록 사는 것도 괜찮다는 말을 전해준다. 뒤처져도 괜찮으며, 어차피 정방향이 어딘지도 모를 인생에서 오히려 내가 앞서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냐며.
아름다운 구절이 참 많아서 일일이 소개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정도로 울림을 주는 소설이었다. 작가 파비오 제노비시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는데, 부디 이 책이 좋은 결과를 거두어 그의 다른 이야기들도 한국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