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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한중록 (패브릭 양장) - 179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슬프고 슬프도다.
모년 모월 모일을 내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천지가 맞붙고 일월이 캄캄하게 막히는 변을 만나,
내 어찌 한시라도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겠는가.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방치하였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이 사건, 임오화변에 대해서는 뒷이야기가 분분하다. 그도 그럴 듯이 조선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하고, 왕위에 오른 정조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당시의 기록(승정원일기)을 파기했기 때문에 사료가 단편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격한 아버지였던 영조와 그런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아들 사도세자의 갈등에서 비롯된 참극이었을까? 정말로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향해 반역을 일으키려 했을까? 노론과 소론은 그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역사적 기록은 빈틈이 있기에 그 사이를 채우기 위한 많은 상상력들이 동원되곤 한다. 그래서 다른 세자들보다 사도세자에 대한 2차 창작물은 월등히 많은 편이다. 5년 전 개봉한 영화 ‘사도’ 역시 6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흥행했었으니,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 비극의 전말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은 분명하다.
‘한중록’은 그런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작성한 회고록이다. 처음으로 이를 쓰기 시작한 것은 정조 19년, 본인의 회갑을 맞아 조카의 부탁으로 붓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1편은 본인의 출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순수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죽게 된 ‘임오화변’에 대한 언급을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이 사건은 커다란 아픔이었기 때문에 차마 쓸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사도세자의 손자인 순조가 이 아픔의 역사를 궁금해하며 사료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그녀는 손자가 다른 이들의 잘못된 말을 듣고 사건을 오인하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직접 겪은 자신이 알려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순조 1년부터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 이어지는 뒷이야기다. 여기에는 사도세자가 태어나서 영조와 겪은 갈등, 점점 미쳐가는 사도세자의 모습과 임오화변의 참혹함까지 모두 생생하게 나타나있다. 또한 세간에서 이리저리 쑥덕거리는 신세가 된, 몰락한 자신의 집안에 대해서도 억울해하며 항변하듯 자세하게 해명한다.
“어느 것이 사치요, 어느 것이 사치가 아닙니까?”
“명주는 사치이고, 무명은 사치가 아니다.”
“어느 것으로 옷을 해 드리면 좋으시겠습니까?”
“이것이 좋겠다.”
무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이 일만 보아도 경모궁(사도세자)께서 탁월하심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가 세 살 때의 일화이다. 이처럼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던 데다가, 영조가 마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었으니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곧 독으로 변했다. 아들을 향한 영조의 기대치가 너무나 커졌던 것이다. 원래 꼼꼼하고 빠릿빠릿한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던 영조와, 속으로 생각이 많아 침착하던 사도세자는 성격부터 맞지 않았다.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 사도세자에게 질문을 던져놓고, 답이 늦거나 틀리면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옷고름이 잘못되었거나 관이라도 삐뚤어져있으면 무섭게 다그쳤다. 사도세자가 일을 자신의 생각대로 처리하면 ‘어찌 나에게 묻지도 않느냐’고 꾸짖고, 영조에게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물으면 ‘그만한 일을 혼자서도 해내지 못한단 말이냐’며 꾸짖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듣기만 해도 가슴 아픈 일화들이 많다. 영조는 죄인을 심문하는 등의 흉한 일을 한 다음이면 꼭 사도세자를 불러다가 ‘밥 먹었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면 즉시 자신의 귀를 물로 씻어버렸다고 한다. 또한 나라에 가뭄이라도 들거나 행차일에 비라도 내릴라치면 ‘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며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흉을 보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당해온 셈이다. 이러니 사람이 미치지 않고 배기겠는가. 결국 그는 조울증과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아버지 영조의 그림자라도 비치면 벌벌 떨며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영조를 죽이겠다며 칼을 빼들기도 하고, 분노를 참지 못하는 날에는 곁에 있는 내시나 궁녀들을 해치기도 하였다. 한중록에는 점점 이성을 잃어가며 미쳐가는 사도세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있다.
“마음속에서 화가 올라오면 견디지 못하며,
사람을 죽이거나 닭 같은 짐승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풀립니다.”
“어찌하여 그리하느냐?”
“마음이 상하여 그리합니다.”
“어찌하여 상하느냐?”
“부왕(영조)께서 사랑하지 않으시기에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리합니다.”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던 구절이다.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고 애정을 갈구하던 사도세자는 결국 아버지의 손에 뒤주에 갇혀 죽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도세자가 미치광이가 되어가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도세자를 해하여야 한다고 영조에게 간언한 것은 그의 친모였다. 아들을 죽여달라 하는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도 하기 어렵다.
비록 본인 집안의 명예를 복권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다고는 하나, 한중록은 귀중한 사료라고 한다. 임오화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이며(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궁중의 법도와 절차에 관해서도 소상히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역사적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소설처럼 쉽게 읽힌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혜경궁 홍씨가 자신과 세손(정조)을 살리기 위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외면했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 역시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사건을 겪은 피해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그야말로 그녀의 한이 담긴 기록, 한중록(恨中錄)인 셈이다. 초판본(남편이 ‘사료에도 초판본이 있냐’며 재미있어하긴 했지만)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양장본이기 때문에 소장하기에도 참 좋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