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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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매일 뭔가를 잃어.

때론 방금 내쉰 숨결처럼 작은 걸 잃고,

때론 그걸 잃고는 못 살 거 같은 큰 걸 잃기도 하지.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 안 그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로 유명한 ‘미치 앨봄’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신간이라고 생각했는데 2005년에 출간되었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의 개정판이었다. 따뜻하고 예쁜 일러스트를 표지에 더하고, 마음을 토닥이는 듯한 감성적인 제목으로 탈바꿈한 것이 이 소설의 내용과 훨씬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주인공 애니는 초등학생 시절의 첫사랑이던 파울로와 어른이 되어 재회한다. 두 사람이 막 새출발하는 행복한 신혼부부로서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고부터 열 시간 후, 불행한 사고가 그들을 덮친다. 파울로가 자신을 희생한 덕에 애니는 경미한 부상만 입었지만 파울로는 큰 부상을 입었다. 새로운 폐를 이식받지 못하면 사망하게 되는 상황, 애니는 ‘내 폐 한 쪽을 파울로에게 이식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폐 이식 수술 도중 무언가가 잘못되었는지 애니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천국’에 있었다.

생전에 애니는 늘 삶의 모든 순간을 후회하고, 실수했다며 자책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지냈다. 기억나는 과거는 기억나는 대로 슬펐고, 기억나지 않는 과거는 그것대로 아팠다. 그랬던 그녀가 천국에서 차례대로 다섯 사람을 만난다. 모두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이들이다. 애니는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잃어버렸던 과거를 되찾는다. 그리고 삶은 늘 상실과 잘못을 동반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또 다른 것들을 얻거나 용서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그렇게 구원이 일어나는 거란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바른 일을 할 문을 열어주지.

우리는 모두 애니처럼 삶에서 무언가 아프게 잃었던 기억과, 크게 실수했던 경험들을 안고 살아간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후회하는 것밖에 없다고 여기며.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경험 덕분에 인생의 또 다른 문이 열리고 새로운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아프고 후회되고 스스로가 너무나 미워도 괜찮다, 다 괜찮다고, 천국이 애니에게 말하듯 우리에게 그러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듯하다.

나의 천국에서 나를 마중 나올 다섯 사람은 누구일까. 죽어서라도 꼭 만나고 싶은 몇몇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천국에서 내가 마중 나가게 될 사람들은 누구일까. 내게 남겨진 삶에 좀 더 충실해야겠다는 따뜻한 다짐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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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억 1~2 - 전2권 (특별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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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이라고 믿는 게 당신의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신작 《기억》으로 돌아왔다. 한 사람의 몸 안에 세 명의 머리가 겹겹이 들어있는 듯한 신비로운 홀로그램 표지가 눈길을 끈다. 이 표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인격이란 그 전생의 기억과, 그 전의 전생의 기억과, 무수히 많은 전생의 기억이 무의식중에 쌓여서 형성된다는 것.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해내기 위해서’라는 작중에서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정말 ‘누구인가’에 관한 베르나르의 흥미로운 상상력이 담긴 책이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르네는 친구 엘로디와 함께 ‘최면’에 관한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최면술사 오팔이 르네를 피험자로 지목하면서 르네는 최면을 통해 전생의 삶을 경험한다. 그는 전생에 1차 세계대전 참전병사였고, 최면 속에서 적군과 전투 중 죽음을 경험하며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채 밖으로 뛰쳐나오고 만다.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던 르네에게 갑자기 한 스킨헤드가 칼을 겨누며 강도짓을 하고, 방어하던 과정에서 르네는 그를 실수로 죽이게 된다. 집으로 도망쳐 온 그는 전생의 기억과 현재의 죄 속에서 패닉에 빠진다.

이 살인자가 내 영혼 어딘가에 묻혀 있었어.

그는 전시에 적군을 칼로 찔러 죽였고, 그건 영웅적인 행동이었어.

똑같이 했어도 내 행동은 범죄야.

르네는 다시 최면술사 오팔을 찾아가 고통스러운 전생의 기억을 잊기 위한 ‘다른 전생의 기억’을 보여줄 것을 그녀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수많은 놀라운 자신의 전생과 만나게 되고, 마침내 1만 년보다 더 이전에 존재한 자신의 첫 번째 전생 아틀란티스인 ‘게브’를 만나게 된다. 역사 교사로서 아틀란티스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도 잠시, 르네는 스킨헤드를 죽인 혐의가 들통나 체포당하고 만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나’라는 인격을 정립해 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만들어졌다기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도 있다. 이 소설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에서 출발하여 전생에 대한 독특한 상상력으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또한 작중 주인공인 르네의 직업이 역사 교사였기 때문에, 실제 역사적 사례를 이야기 속에 재미있게 녹여낸 부분도 눈여겨 볼 만 했다.

모든 것은 기억이다.

기억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현재에도, 앞으로도.

1권까지는 정말 숨 쉴 틈도 없이 읽었는데, 2권으로 가면서 조금 늘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기도 하다. 결말도 사실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으나 처음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을 때는 ‘끝이라고?’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뒷심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지만, 베르나르의 상상력이 그리웠을 독자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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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네모 로직 PLUS 1 네모네모 로직
제우미디어 지음 / 제우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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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스도쿠나 로직 같은 것을 굉장히 좋아해서 자주 했었다. 요즘도 특히 밤에 침대에 누워 조용히 로직을 하곤 한다. 그런데 주로 휴대폰으로 즐기다 보니 최근에 눈이 침침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 역시 아날로그식으로 종이에다 푸는 게 눈 건강에는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찰나에 접하게 된 로직책이다.

책은 총 6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로직의 기본적인 풀이법을 설명한 첫 번째 목차부터 시작하여 답을 모아둔 해답 부분으로 끝난다. 중간에는 PART A, B, C, D로 로직 퍼즐이 총 네 파트에 걸쳐 나와있다. PART A는 15X15 퍼즐로 시작해 점차 범위를 넓혀가고, PART B부터는 조금 더 본격적인 로직 퍼즐이 나온다. 로직 짬바 좀 있다고 얕보면서 풀었는데, 마지막 PART D에 가면 정말 어려운 퍼즐이 많이 나와서 즐겁게 머리를 쓸 수 있었다.





각 로직의 옆에는 난이도가 표시되어 있어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 적정선에서 풀 수 있는 퍼즐을 고를 수 있다. 최상으로 어려운 난이도 7 같은 경우에는 소거법 없이 해결이 불가능했다. 지우개 똥을 산더미만큼 쌓아가며 결국 풀긴 풀었는데, 성취감이 엄청나다.

어플로 로직을 풀다 보면, 틀렸을 경우 틀렸다고 알려주기도 하고, 잘 풀고 있으면 맞힌 숫자를 흐리게 표시해주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그런 친절한 기능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로직 좀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날로그로 부딪쳐보니 휴대폰으로 푸는 것보다 훨씬 머리를 많이 쓰게 되어서 좋았다.

제목에 01이 들어가는 걸 보면 앞으로도 계속 시리즈로 출간될 로직 책인 것 같은데, 다음 권은 난이도가 조금 있는 것들만 모여있는 책으로 살며시 바라본다. 앞부분의 15X15를 풀 때 조금 지루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직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앞에 풀이법도 상세하게 나와있어, 로직에 차근치근 익숙해지기에는 더없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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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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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인류에게 기억 장애가 생긴 듯합니다.

모든 기억이 10분 남짓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당신의 기억도 사라집니다. 원인은 아직 모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행동하십시오.

〈앨리스 죽이기〉로 유명한 코바야시 야스미 작가의 신작, 〈분리된 기억의 세계〉이다. 장기 기억을 잃어버린 인류의 생존극을 그린 소설이다. 크게 2부로 나뉘어져있으며, 1부는 공상과학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그러나 2부에 들어서며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질문들을 독자에게 던지고, 영혼에 대한 딜레마를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인간의 뇌는 두 종류의 기억을 저장할 수 있다. 10분 정도 지속되는 단기 기억과, 평생에 걸쳐 저장되는 장기 기억이다. 인간은 경험한 모든 일을 먼저 단기 기억으로 저장한 후 중요한 정보들만을 장기 기억으로 이전하는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떤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일어나 인류는 갑작스럽게 더 이상 ‘장기 기억’을 저장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인간이 단 10분 전의 일까지만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은 공황에 빠지고 SNS에는 ‘내가 기억 상실이 된 것 같다’는 글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전쟁과 전염병을 이겨내 온 끈질긴 인류는 이번에도 위기를 극복해낸다. 장기 기억을 대신해 줄 외부 메모리를 개발하여 그것을 신체에 삽입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그 날의 대공황을 딛고, 기억을 메모리에 의존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혼란 속에 숨겨져있던 딜레마가 차차 모습을 드러낸다. 기억이 나 자신과 분리된 세계, 즉 나의 몸과 마음이 한 곳에 있지 않는 세계에서 여러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본질은 이 메모리라는 소리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메모리가 바뀌니까 인격까지 교환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저는 자신을 도쿠가와 토시야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건 착각이야. 네 몸은 이시다 켄토의 것이고 영혼 또한 이시다 켄토의 것이야.:

”영혼?“

”그래. 영혼. 네 불멸의 본체지.“

내 몸은 아야의 그것이 되어있었다.

무릎에 꽂혀있는 내 메모리가 보였다.

조금 전, 아야가 나를 보고 ”아빠“라고 말한 게 아야의 마지막 기억일 것이다.

장기 기억이 저장되는 메모리만 바꿔 끼우면, 기억을 보존한 채 이른바 신체를 갈아탈 수 있다. 인간의 삶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였으나, 사실은 메모리 자체가 자신의 인격이라고 봐야 할 수도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기억과 영혼은 정말로 별개인 것일까? 기억이 곧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인가? 나의 기억은 정말로 믿을 만한가?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은 ‘진짜’인가?

“마음은 자신과 현실의 관계에서 생깁니다.

현실이 없는 마음은 존재하지 않아요.”

“정말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 사람은 자기 마음의 한 부분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어.

분리된 마음은 이른바 하나의 개체에 지나지 않아.”

흥미로운 설정에서 시작되어 독특한 상상력과 잘 만들어진 이야기들로 무장한 재미있는 소설이다. 읽고 나면 문득 나의 기억은 진짜인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이 현실인지 의구심이 들어 살짝 섬뜩해진다. 마치 옛날 고사에 나오는 호접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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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한중록 (패브릭 양장) - 179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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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슬프도다.

모년 모월 모일을 내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천지가 맞붙고 일월이 캄캄하게 막히는 변을 만나,

내 어찌 한시라도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겠는가.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었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방치하였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이 사건, 임오화변에 대해서는 뒷이야기가 분분하다. 그도 그럴 듯이 조선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하고, 왕위에 오른 정조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당시의 기록(승정원일기)을 파기했기 때문에 사료가 단편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격한 아버지였던 영조와 그런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아들 사도세자의 갈등에서 비롯된 참극이었을까? 정말로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향해 반역을 일으키려 했을까? 노론과 소론은 그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역사적 기록은 빈틈이 있기에 그 사이를 채우기 위한 많은 상상력들이 동원되곤 한다. 그래서 다른 세자들보다 사도세자에 대한 2차 창작물은 월등히 많은 편이다. 5년 전 개봉한 영화 ‘사도’ 역시 6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흥행했었으니,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 비극의 전말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은 분명하다.


‘한중록’은 그런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작성한 회고록이다. 처음으로 이를 쓰기 시작한 것은 정조 19년, 본인의 회갑을 맞아 조카의 부탁으로 붓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1편은 본인의 출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순수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죽게 된 ‘임오화변’에 대한 언급을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이 사건은 커다란 아픔이었기 때문에 차마 쓸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사도세자의 손자인 순조가 이 아픔의 역사를 궁금해하며 사료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그녀는 손자가 다른 이들의 잘못된 말을 듣고 사건을 오인하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직접 겪은 자신이 알려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순조 1년부터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 이어지는 뒷이야기다. 여기에는 사도세자가 태어나서 영조와 겪은 갈등, 점점 미쳐가는 사도세자의 모습과 임오화변의 참혹함까지 모두 생생하게 나타나있다. 또한 세간에서 이리저리 쑥덕거리는 신세가 된, 몰락한 자신의 집안에 대해서도 억울해하며 항변하듯 자세하게 해명한다.



“어느 것이 사치요, 어느 것이 사치가 아닙니까?”

“명주는 사치이고, 무명은 사치가 아니다.”

“어느 것으로 옷을 해 드리면 좋으시겠습니까?”

“이것이 좋겠다.”

무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이 일만 보아도 경모궁(사도세자)께서 탁월하심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가 세 살 때의 일화이다. 이처럼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던 데다가, 영조가 마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었으니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곧 독으로 변했다. 아들을 향한 영조의 기대치가 너무나 커졌던 것이다. 원래 꼼꼼하고 빠릿빠릿한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던 영조와, 속으로 생각이 많아 침착하던 사도세자는 성격부터 맞지 않았다.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 사도세자에게 질문을 던져놓고, 답이 늦거나 틀리면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옷고름이 잘못되었거나 관이라도 삐뚤어져있으면 무섭게 다그쳤다. 사도세자가 일을 자신의 생각대로 처리하면 ‘어찌 나에게 묻지도 않느냐’고 꾸짖고, 영조에게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물으면 ‘그만한 일을 혼자서도 해내지 못한단 말이냐’며 꾸짖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듣기만 해도 가슴 아픈 일화들이 많다. 영조는 죄인을 심문하는 등의 흉한 일을 한 다음이면 꼭 사도세자를 불러다가 ‘밥 먹었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면 즉시 자신의 귀를 물로 씻어버렸다고 한다. 또한 나라에 가뭄이라도 들거나 행차일에 비라도 내릴라치면 ‘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며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흉을 보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당해온 셈이다. 이러니 사람이 미치지 않고 배기겠는가. 결국 그는 조울증과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아버지 영조의 그림자라도 비치면 벌벌 떨며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영조를 죽이겠다며 칼을 빼들기도 하고, 분노를 참지 못하는 날에는 곁에 있는 내시나 궁녀들을 해치기도 하였다. 한중록에는 점점 이성을 잃어가며 미쳐가는 사도세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있다.



“마음속에서 화가 올라오면 견디지 못하며,

사람을 죽이거나 닭 같은 짐승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풀립니다.”

“어찌하여 그리하느냐?”

“마음이 상하여 그리합니다.”

“어찌하여 상하느냐?”

“부왕(영조)께서 사랑하지 않으시기에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리합니다.”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던 구절이다.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고 애정을 갈구하던 사도세자는 결국 아버지의 손에 뒤주에 갇혀 죽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도세자가 미치광이가 되어가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도세자를 해하여야 한다고 영조에게 간언한 것은 그의 친모였다. 아들을 죽여달라 하는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도 하기 어렵다.


비록 본인 집안의 명예를 복권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다고는 하나, 한중록은 귀중한 사료라고 한다. 임오화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이며(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궁중의 법도와 절차에 관해서도 소상히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역사적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소설처럼 쉽게 읽힌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혜경궁 홍씨가 자신과 세손(정조)을 살리기 위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외면했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 역시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사건을 겪은 피해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그야말로 그녀의 한이 담긴 기록, 한중록(恨中錄)인 셈이다. 초판본(남편이 ‘사료에도 초판본이 있냐’며 재미있어하긴 했지만)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양장본이기 때문에 소장하기에도 참 좋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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