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페어 - 사법체계에 숨겨진 불평등을 범죄심리학과 신경과학으로 해부하다
애덤 벤포라도 지음, 강혜정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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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증거와 철저한 논리에 따라 죄와 벌이 결정된다는 우리의 믿음과 기대를 완벽히 뒤엎는 책!


죄를 저지르면 누구나 그에 맞는 합당한 벌을 받는다. 그만큼 사회는 안전해지고 결백한 사람들은 보호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이를 위해 검사와 판사, 변호사와 같은 법조인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그 과정은 공정하고 정의롭다. 심지어 이제 우리는 거짓말탐지기, DNA 수사와 같은 과학적 기술의 힘까지 얻었으므로 무엇이 의심스럽겠는가.

나 역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사법체계를 신봉해 마지않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보다 우리 사회는 사상누각처럼 지탱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제목부터 ‘언페어(UNFAIR)’인 이 책의 작가는 법과대학 교수로서, 다양한 연구 결과와 사례를 통해 형사 사법제도가 가지고 있는 불공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성냥불을 켜고 있는 방 너머에는 풀려난 범죄자, 무시당한 피해자, 말 없이 신음하는 죄수, 담벼락 앞에 서서 몸수색을 당하는 무고한 남자들이 있다. 그동안 검사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불공평으로 점철된 복도들이 있다.

이 책은 첫 시작부터 아주 강렬하다. 저자는 먼저 900년 전에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신성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피의자를 물에 집어던져 넣었을 때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무죄, 수면 뮈로 떠오르면 유죄라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중세시대의 ‘미개한’ 재판 이야기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진실하고 공정할 수 없었을, 누구나 눈으로 보고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절차였겠지만 지금으로 보자면 모순투성이에 비합리적인 그런 재판.

하지만 저자는 뒤이어 이런 질문을 던져 우리를 고민과 충격 속에 집어던져 넣는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900년 이후의 누군가는 현재 우리의 사법제도를 어떻게 볼까?’


다시 말해, 우리가 신성 재판의 이야기를 비웃는 것처럼, 우리의 지금 사법체계를 보고 먼 미래의 후손들은 비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의로우며 확실하기 그지없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이 사법체계를 말이다.

이어서 저자는 차근차근 현재의 사법제도가 가지고 있는 불공정성과 모순을 설파해나간다. 수사 편에서는 피해자, 형사, 피의자, 그리고 판결 편에서는 검사, 배심원, 목격자, 판사가 겪거나 행하는 불공정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처벌 편에서는 대중과 죄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마지막으로 개혁 편에서는 이러한 불공정함을 해결하기 위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아주 세부적이고 미시적인 부분부터 파고들어서 비합리성을 지적하고, 각각의 단계를 거쳐 점차 거대한 사법제도 전체가 가지는 불공정성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낸다. 이토록 어렵고 복잡한 주제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매끄럽고 논리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막힘없이 읽힌다는 것만으로도 저자가 굉장히 글을 잘 쓰는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잔인하지 않은데도 ‘잔인하고 잘못된’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 운영할 수 있다.

의심하지 않고는 사실 잘못하고 있다거나 변화가 시급히 필요하다고 그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다.

정교한 체계가 잡혀 있으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고, 거기에서 금지하지 않는 것은 면밀한 검토를 거의 혹은 전혀 받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간극은 계속 넓어지기만 할 뿐이다.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범죄가 진정 남는 장사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사례들은 다소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 자백한 사람들, 얼굴을 똑똑히 보았음에도 자신을 성폭행한 범인으로 결백한 누군가를 지목한 피해자,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는 물건을 숨긴 검사…. 그나마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사례에서는 추후에 진실이 밝혀져 무고한 사람들이 자유를 찾을 수라도 있었다. 하지만 사법체계의 불합리성이 이토록 명확하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 받고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미국 사법체계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사실 몇몇 부분을 빼면 우리나라와 다를 것이 없다. 그 말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UNFAIR’한 일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저자가 마지막 개혁 파트에서 주장한 여러 방안들은 다소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이러한 논의들이 얼마든지 활발하게 이루어져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의 사법체계가 조금이라도 더 바르고 나은 길로 나아가기를, 그래서 조금이나마 공정한 재판과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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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포티큘러 북
댄 카이넨.캐시 월러드 지음, 장정문 옮김 / 소우주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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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반 애기들은 요즘 공룡에 빠져서 동요도 공룡 노래만 듣고 인형 놀이도 공룡만 가지고 한다. 그런 친구들과 교실에서 함께 읽을 만한 흥미로운 책을 하나 얻었는데, 바로 포티큘러 북 '공룡' 버전이다. 포티큘러가 무슨 뜻인고 싶어 찾아보니 정확히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 홀로그램을 이용하여 사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법을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포티큘러 북이란 말 그대로 움직이는 책이다. 공룡이 살아 움직이는 책!

 책을 받고 신기해서 나도 한참동안 뒤적거리며 책을 펼쳤다가 덮었다가 해 보았다. 평평한 곳에 놓고 책장을 천천히 넘기라는데, 이리저리 여러 번 넘겨 본 결과 꼭 평평한 곳에 두고 책을 펴지 않아도 잘 보인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면 그림도 천천히 움직이고, 빠르게 넘기면 동작도 빨라진다. 페이지마다 꼭 미니 TV가 한 대씩 들어있는 느낌이다.



 이 책은 단지 특이하고 신기한 그림책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익숙한 여러 공룡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일까지 도맡았다. 공룡의 명칭이나 크기에서부터, 발견된 화석 이야기나 특성과 생활 패턴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다만 글씨가 조금 작은 편이고 어휘도 어려워서 저학년 아이들은 어른이 함께 쉬운 말로 풀어주며 읽어주어야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5학년 이상이라면 스스로 충분히 흥미를 느끼며 읽을 법하다.

 배송받은 다음 날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읽었다가 교실에서 거의 난리가 났다. 서로 넘겨보려고들 해서 책이 일찍 수명을 다하면 어쩌나 고민이다. 어떤 친구 말로는, 쥬라기 공원 영화를 책으로 볼 수 있게 만든 것 같단다. 그만큼 공룡이 실감나게 보여서 좋았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또 영상으로 공룡을 보여줄 때보다 훨씬 공룡의 특징을 잘 찾아냈다. 나는 휘리릭 넘기며 움직이는 그림을 신기해할 줄만 알았는데, 아이들은 그 짧은 움직이는 그림도 분절해서 본다. 그림을 멈춰놓고 이 공룡은 깃털이 어떻고 발톱이 어떻다며 자세하게 관찰하는 모습들을 보니 이 책이 아이들의 사고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포티큘러 북 시리즈는 남극과 북극, 야생, 바다, 공룡 이렇게 네 권으로 출시되었다. 가격이 권당 22,000원으로 조금 세긴 하지만 이 정도 가치라면 사 볼 법하다. 공룡 포티큘러 북이 아이들의 놀라운 성원에 힘입어 조만간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니, 이 다음 번엔 다른 시리즈의 책도 사다가 함께 읽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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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 - 꿈꿀수록 쓰라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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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시는 여름방학이 끝난 지난 주말에도 집에 오지 않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사춘기를 맞아 요즘 좀 반항적인 아들, 다다시. 친구들과 외박하는 날도 잦아지고 얼굴에 멍까지 들어오더니 급기야 칼까지 사서 숨겨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바르게 키운 착한 아이이니 조금 지켜보자고 대수롭잖게 여기던 부모에게 닥친 현실은 다다시의 실종이었다. 그것도 살인사건에 연루된 실종사건. 다다시는 살인사건의 가해자로서 도피 중일 수도 있고, 살인사건의 피해자로서 어딘가에 죽어있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어도 끔찍하기만 할 이 사건의 결말을 두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염원이 엇갈린다. 평생 끔찍한 죄인으로 돌팔매질 당하더라도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길 바라는 어머니의 염원, 살인자일 바에야 차라리 떳떳하게 죽어서 돌아오길 바라는 아버지의 염원으로. 다다시는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작은 실마리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사건의 진상을 발견해나가는 일반적인 미스터리와는 달리, 이 소설은 그 어느것도 뚜렷이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실마리들도 명확하지 않다. 수사기밀이라며 입을 닫은 경찰, 인터넷에 떠도는 낭설들,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 기자들의 추측…. 도저히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 속에서 절박한 마음에 어떤 소식이든 주워들으며 부부는 자신이 염원하는 대로 믿으려 발버둥친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단서들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주는 장치가 아니다. 아들의 생존을 믿었다가, 아들의 결백을 믿었다가, 절망했다가, 희망을 보았다가, 갈팡질팡하며 요동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슬픔은 사실이 확정된 즈음에 최고조에 달하고 이내 증식을 멈춘다. 슬픔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불안감이다. 가슴속에 똬리를 틀고 마음을 천 갈래 만 갈래 흐트러뜨리는 것은 슬픔의 사실이 베일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 생기는 불안감이다.

 나는 대개 미스터리 소설을 읽을 때면 셜록 홈즈가 된 것마냥 관망하는 마음으로 팔짱을 끼고 추리를 해가며 읽곤 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나는 홈즈가 될 수 없었다. 다다시의 아버지에 마음에 이입했다가도 어머니의 마음에 공감하며 스스로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내가 부모였다면 아들이 어느 쪽이길 바랐을까? 가해자와 피해자 중 어느 쪽도 섣불리 바라지 못하고 갈등하게 된 것은 아마 이 책의 심리 묘사가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의 독백을 읽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마음을, 어머니의 마음을 구석구석까지 치밀하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를 이토록 몰입하게 만든 데에는 작가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음을, 책 끝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는 '실제 인생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새로운 감정과 만나는 것도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라고 생각해서, 부부의 복잡한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많이 고뇌했다고 한다. 역시 심리 미스터리의 대가구나, 하고 생각했다.

 서평을 읽는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될까 봐 결말은 언급할 수 없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결말 후에 완전히 바뀌어버린 부부의 마음도. 그것을 통해 작가가 드러내려고 한 메시지 또한 그랬다. 책 소개를 처음 접하고 책을 읽기 전까지는 과연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단순히 궁금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이었다가, 읽기 시작하면서는 진심으로 다다시가 가해자이기를, 피해자이기를 함께 바랐다. 그리고 끝내 결말이 난 뒤에도 쉽게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해 왔던 '염원'들을 돌이켜보고 곱씹어보면서 마음이 씁쓸해진다.

 한 번 잡자마자 그 자리에서 3시간동안 곧바로 미친듯이 읽어내려간 책이다. 심리 묘사가 뛰어난 책을 좋아한다면 추천.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추천. 그냥 재미있는 책을 좋아한다면 추천.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좋을 것 같다. 다다시가 어느 쪽이길 바랐는지, 왜 그랬는지, 어머니와 아버지 중 어느 쪽에 더 이입할 수 있었는지. 누구에게나 추천해주고픈 인상 깊은 미스터리를 만나 기분이 좋은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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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맨부커 상을 탔다는 것도, ‘부엌 사색이라는 특이한 부제가 붙은 것도 물론 눈길을 끌었지만 이 책에서 가장 나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제목이었다.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결혼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요리를 시작한 엉망진창 부엌 입문가에게 이보다 더 직설적이고 시원하게 요리책을 비판해 준 사람은 없었다. 다들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조리대에 요리책을 펼쳐놓고 능숙하게 볶고 튀기고 써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다들 나처럼 요리책을 펼쳐들고 간장통을 든 채 냄비 앞에서 망부석이 되는 건 아닐까? 심지어 맨부커 상을 탄 작가마저도? 그렇다면 그 작가는 도대체 요리책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고 있을까! 그런 호기심과 설렘을 가득 안은 채 이 책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어쩌면 요리책 같은 수술 지침서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관을 통해 마취약을 소량 대충 집어넣는다. 환자의 살을 한 토막 잘라낸다. 피가 흐르는 것을 본다. 친구들과 맥주를 마신다. 구멍을 꿰맨다…….

  아무튼 요리책 저자들이 우리에게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무언의 복종? 그렇다면 그건 도대체 어떤 관계를 암시하지? 어쨌든 우리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징벌을 받는 신병은 아니잖은가.

      

현학자를 자처하는 이 작가는 레시피를 앞에 두고 몹시 투덜거린다. 목차만 훑어보아도 요리책에 대한 이 현학자의 불만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다. 책 내용에서는 아주 본격적으로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현학자는 한 덩어리는 얼마큼인지, ‘중간 크기의 양파는 얼마만한 것인지, ‘과다한 비계는 잘라내라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가 과다한 것인지 고민하며 쉽사리 레시피를 적용하지 못한다. 나로 말하자면 한 덩어리든 중간 크기든 과다한 무언가이든 애매한 무언가가 레시피에 쓰여있다면 (미간을 한 번 찌푸리긴 하겠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고 아주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내 마음대로 풍덩풍덩 넣어다가 요리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대개 그 결과는 이 현학자와 같다. 맛은 기막히게 좋지만 모양은 엉망이거나, 당최 무슨 맛인지 모를 요리가 되었거나, 요리 과정에서 처참히 실패해 음식을 내놓을 수도 없게 되었거나(눈물.) 현학자는 이러한 실패들을 은근슬쩍(대놓고?) ‘레시피 탓으로 넘기고 있다. 그 모습이 뻔뻔하게 느껴지면서도 읽어갈 수록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내가 요리를 못하는 게 아니었어, 내 잘못으로 그렇게 망한 게 아니었어! 하는 위로를 얻었기 때문인 걸까?

      

이 책은 레시피에 대해 우리 대신 분풀이를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요리를 하면서 겪었던 각종 실패담과 요리와 관련된 웃을 만한 에피소드들을 들러주기도 한다. 혹해서 구매한 주방기구들이 딱 한 번 쓰고 창고행이 되어 처박혀있는 장면이나,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 상황에서 몰래 바깥 음식을 사와 집 그릇에 옮겨 담는 완전범죄(!)의 순간까지. 정말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웃음이 나온다. 또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만한 공감되는 말들도 한가득이다. 책의 재미를 반감시킬까 걱정되지만 정말 공감했던 구절 몇 개만 추려봤다.

     

 누가 쓸데없이 부엌에 들어와 내가 요리한 음식을 손가락에 찍어 맛본다면, 그것을 접시에 담아 놀래켜주려는 마음으로 잔뜩 부풀어있던 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아질 것이다.

 나는 몇 주 동안 이 요리책을 집었다 놓았다 반복했지만, 실제로 그중 하나라도 요리해보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요리는커녕 내가 과연 그 까다로운 기준을 따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다가 볼일 다 본다. 

 사진과 달라.” 현학자가 저녁 요리를 식탁에 가져다놓으며 말했다. 치커리를 곁들인 돼지갈비살 두 접시였다. 누가 들어도 자기연민으로 삐걱거리는 어조였다.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하다고 해서 뚜껑을 열면 안 된다는 조항 탓에 보지를 못하니 자신의 요리 솜씨를 의심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추측을 하기 마련이다.

     

한 번이라도 요리책을 보며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을 정말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자칭 현학자답게 요리는 물론 그 외 각종 폭넓은 지식을 냉소적인 듯 유머러스하게 들려주는데다가, (아쉽지만) 2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분량으로 순식간에 읽어내려가게 된다.

     

작가에게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도 안 되겠지만 한국 요리책을 사서 시도해주었으면 좋겠다. 치커리와 비트를 포함하는 외국 레시피라 사실 약간 덜 와닿거나 어떤 요리인지 몰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 멸치 육수로 순두부찌개나 뼈해장국 같은 걸 요리하면서 불평하는 줄리언 반스의 후속작이 나오길 간절히 바라본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가의 주방으로 한국 전통요리 요리책이라도 한 권 보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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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인더스
밸 에미크, 윤정숙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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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잊지 못하는 소녀와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려는 남자가 만났다.' 이 소설을 소개하는 짧은 문구다. 사실 책 표지를 보고, 책의 요약 설명을 보고 로맨스 소설일 거라 생각했다. 로맨스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음악으로 상실을 극복하는 내용일 거라는 짐작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음악이 주가 되는 소설치고 감동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그리고 책을 읽으면 읽어갈수록 내가 예상했던 내용이 전혀 아니었음을 느꼈고, 책을 덮을 때에는 약간 화가 났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설을 대표하지 못한 표지 그림과 진부한 책 설명에.

이 소설은 일단 절대 로맨스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성장소설에 가깝다. 읽고 있으면 따뜻한 난로를 쬐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훈훈하게 데워지는 그런 소설이다. 특히 기억과 죽음, 상실에 대해 평소에 생각이 많던 나는, 주인공들이 그와 관련된 문제로 슬퍼하고 고민하며 이겨나가는 모습을 통해 치유를 얻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개빈 윈터스와 시드니는 서로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시드니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개빈은 시드니가 사라진 자신의 삶 자체에 무력감을 느낄 정도로 큰 상실감을 겪으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를 지켜보던 개빈의 대학 친구 페이지는 그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함께 지내자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갈 곳 없이 흔들리던 개빈은 그 곳에서 페이지의 딸인 열 살 소녀 조앤을 만난다.

조앤은 인상깊었던 모든 것을 기억하는 HSAM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잊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는 모두를 기억하고, 모두와 함께 했었던 일들을 기억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녀와 함께 했던 일들을 잊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조앤을 완전히 잊어버린 할머니처럼. 조앤에게는 세상이 리마인더(reminder)로 가득하다. 어떤 물건을 보면 누군가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게 되는데, 그녀는 그런 물건들을 리마인더라고 부른다. 그녀는 리마인더가 될 좋은 '음악'을 만들 꿈을 꾸기 시작한다. 누구나 그 음악을 듣게 되면, 자신을 떠올리게 하여 절대 아무도 자신을 잊지 못하게 만들려고.

조앤은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개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개빈은 조앤이 자신의 연인 시드니에 대한 기억을 아주 생생하게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개빈은 조앤이 음악을 만드는 것을 돕기로 하고, 조앤은 개빈에게 자신이 기억하는 시드니의 모습을 모두 이야기해주기로 한다. 개빈은 조앤에게 시드니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그와 함께 했던 추억 속에 빠져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며, 또 시드니가 죽기 전 남겨놓은 의문을 풀어가며, 점차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다잡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시드니를 떠올려도 고통스럽지 않고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시드니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기로 결심한다. 조앤 역시 모두가 꼭 자신을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 '기억하는 것'을 통해 소중한 사람들을 자신만의 상자에 꼭꼭 담아서 안전하게 지키겠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우선 누군가를 상실했다는 데에서 오는 감정을 굉장히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와닿게 표현하고 있다. 읽기만 해도 가장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고, 개빈의 행동에 깊이 공감하며 스토리를 따라가게 된다.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걸 더 잘하는 일반인답게 조앤의 감정에는 완전히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그녀의 역할이 개빈의 감정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정말 큰 역할을 했다고 느꼈다. 죽은 연인의 생전 모습을 하나라도 더 듣고 싶은 마음, 듣고 난 직후의 허무함과 슬픔, 차라리 모든 것을 잊고 싶어 연인에 대한 모든 것(시드니의 리마인더들)을 불태워버려놓고는 자기도 모르게 연인에 관한 추억을 스스로의 입으로 꺼내버리는 그리움까지.

 

"왜 시드니 아저씨의 물건들을 태우고 싶었어요?"

"기억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러면 우리 집에는 왜 오신 거예요? 나랑은 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던 개빈은 조앤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의 죽음을 점차 받아들여간다. 개빈이 시드니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기 위해 조앤의 집을 떠났을 때, 조앤은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며 생각한다. 한때 시드니가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예전 문자메시지를 살펴보는 것도 두려워했던 개빈에게.

 

'이제 그는 과거로 돌아가도 괜찮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과거에는 두 번씩 봐도 괜찮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빈은 여전히 시드니가 죽던 날의 악몽을 꾼다. 그는 아마도 영원히 시드니의 죽음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할머니의 죽음에 아직까지 마음 아파하는 조앤처럼. 하지만 모든 죽음과 상실이 그만큼 슬프기 때문에, 일어나기 전에도, 일어난 후에도 오히려 일종의 가치를 지니는 게 아닐까. 조앤이 그랬듯 다른 이와 자신의 고통을 나눌 기회를 얻은 것처럼. 개빈이 그랬듯 고통을 극복하며 잃은 사람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사랑만큼 자기 자신의 마음도 자라나는 것처럼.

길게 풀어내면 읽지 못한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을 줄이지만, 결말마저 마음에 쏙 드는 책이었다. 뒷이야기가 있다면 반드시 읽고 싶다. 아니, 뒷이야기가 될 장면들을 상상만 해도 흐뭇하고 행복하다. 그만큼 소설 속의 개빈과 조앤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했나보다. 영화화 계약도 했다고 하니 영화가 나왔을 때 원작소설과 비교하며 두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을 다시금 만날 날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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