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세자들 - 왕이 되지 못한
홍미숙 지음 / 글로세움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가 행복했던 왕세자가 아니고 불행했던 왕세자였기에
후손들이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행복했던 왕세자와는 이야기를 나눌 게 별로 없다.
잠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


 인간이란 필연적으로 비극에 마음을 쏟게 되어있나보다. 특히 자신의 잘못은 일절 없이 그저 주변의 소용돌이에 무참하게 희생되며 일어난 비극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미 일어난 비극은 돌이킬 수가 없기에 인물은 영영 비극적인 삶 속에 갇힌다. 그가 품었던 꿈과 신념과 기억까지 모두. 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상상해 볼 뿐이다.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미지의 미래에 대한 호기심, 비극의 참혹함이 클 수록 커지는 인물에 대한 연민이 우리의 마음을 비극으로 잡아끄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끝내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대다수의 왕세자들은 왕이 죽거나 물러난 다음이라면 당연한 수순으로 그 다음 왕이 된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에는 그러지 못한 왕세자들이 12명이나 된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거나, 요절했거나, 아버지가 부덕하여 함께 끌려나는 등 기구한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작가는 그 사연들을 한 곳에 모으며, 생전에 외로웠을 그들의 무덤을 하나하나 직접 찾았다. 그리고 왕세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그와 관련된 능침이나 사당 등의 유적 사진들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어떤 무덤들은 그래도 운이 좋아 온전하고 웅장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어떤 왕세자는 시신조차 찾지 못해 무덤마저 없다. 이 모든 이야기가 실제 누군가의 삶이었다는 사실이, 사진으로 알 수 있는 역사적 유적 앞에서 더욱 절실히 와닿고 마음이 황망해진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양녕대군, 사도세자와 같은 폐세자들의 이야기는 물론 순회세자처럼 조금은 생경하게 느껴지는 이름들도 있다. 작가는 실록과 같은 기록을 사실적으로 서술하면서도 약간의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이야기를 더욱 구슬프게 풀어나간다. 그래서 지겹고 어려운 역사서가 아니라 비극소설 단편집을 읽듯 몰입해서 읽을 수가 있다.

 책의 맨 뒤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조선왕조계보와, 조선의 무덤들이 현재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와 같은 정보도 수록되어있다. 어딘지 안타깝고 쓸쓸해진 마음으로 책장을 덮고 나면 그들의 무덤을 나도 직접 찾아가보고 싶어진다. 활자로 엿본 이야기만으로는 아쉬울 정도로 그 삶들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일까. 이 책을 읽은 것만으로 작가가 사랑한다고 이야기한 비운의 왕세자들을 나도 조금쯤은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닿음 Touch (스페셜 에디션)
양세은(Zipcy)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살과 살이 맞닿는다.

단순히 물리적인 '접촉, 스침'에 불과할지라도,

그 찰나의 순간 우리는 심장이 단전까지 떨어지기도,

구름 위로 두둥실 떠다니기도, 피가 역류하기도, 미온수를 유영하기도 한다.

이렇듯 만감이 교차되는 신비로운 찰나를 그림에 담아내려 한다.

--------------------------------------------------------------------------------------------------------------------

인스타그램에서 이미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집시 작가의 일러스트집 '닿음'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연인과 맞닿는 순간과 그 때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그림들이 가득 실려있다. 연애하던 시절 남편과 이 작가님의 그림을 함께 보며 서로 수줍어했던 적도 있었는데, 어느덧 몇 년이 지나 예쁜 그림들로 더욱 풍성해진 책을 함께 보니 감회가 새롭다. 게다가 휴대폰 화면 너머로 비치는 그림이 아니라, 보들보들한 종이의 질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라 읽는 마음이 더욱 간질거리고 두근거렸다.

페이지를 넘기면 한 장 가득 커다란 그림이 한 장, 그리고 그 옆에 그림을 설명하는 몇 줄의 글이 함께 있다. 그림은 주로 그의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 로 나뉘어 한 장씩 반복되는 형식인데, 두 연인이 같은 상황에서 각각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그려낸 듯했다. 일러스트집의 맨 뒤에는 작가님의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작업 과정이 실려있어서, 같은 그림이 스케치만 있을 때, 색을 덧댔을 때, 혹은 빛이 있거나 없을 때, 그림의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닿음'이라는 상황 자체가 한정적이다보니 그림들의 느낌이 비슷해질까 봐 많이 우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마다 정말 다양한 상황과 감정이 담겨있다. 손, 볼, 머리, 귀, 허리 어깨…. 또 그 수많은 닿음에 담긴 행복, 설렘, 안도, 혹은 불안함과 약간의 야릇함까지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다. 그림 속 연인들의 몸짓이나 표정이 정말 사실적이라 사랑하는 사람과 닿았던 기억, 느꼈던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나 더 설레게 된다. 무엇보다 그림의 색감이 너무나 따뜻해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녹아들 것만 같다.

사랑을 다룬 일러스트집은 수없이 많지만,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특유의 아슬아슬하고 달뜬 분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냥 순수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으면서도 또 과감한 스킨십으로 묘한 긴장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만난 지 시간이 조금 지나 관계가 무르익은 커플이 함께 몸을 맞대고 읽으면 좋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에 갇힌 소년 에프 영 어덜트 컬렉션
로이스 로리 지음, 최지현 옮김 / F(에프)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누구에게나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그런 순간이.

----------------------------------------------------------------------------------------------------------

캐티는 여덟 살 소녀이다. 의사인 아버지 덕택에 유복한 집에서 지내며, 훗날 의사가 될 꿈을 키우고 있다. 어느 날부터 캐티의 집에 가정부 페기가 함께 살게 되는데, 늘 다정하고 친절한 페기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제이콥이라는 이름을 지닌, 캐티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은 소년이다. 그리고 그 소년에게 일어난 어떤 결정적 일이 캐티의 삶을 흔들어놓게 된다.

제이콥은 지적 장애를 가진 소년이다. 자폐 증상도 지니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는 있지만 대화로 의사소통을 하지는 못하고, 의성어를 흉내 내거나 감정을 몸짓으로 표현하곤 한다. 지금도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은 가혹한 시선을 받는데, 하물며 100년 전이니 제이콥은 어떤 대우를 받았겠는가. 하지 않은 일로 누명을 쓰고, 대놓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캐티는 제이콥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사려 깊고 자상한 의사 아버지의 덕이다.

----------------------------------------------------------------------------------------------------------

“제시가 미친 사람들이 있는 곳이래요.

정신지체아나 미치광이나 정신이상자요.”

아빠가 웃으며 설명했다.

“그게 전부 아픈 사람을 가리키는 다른 말들이야.

그 사람들은 마음이 아픈 거지.”

----------------------------------------------------------------------------------------------------------

캐티는 제이콥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조금 특별한 친구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동물들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농장에서 늘 양이나 말,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을 돌보고 있으며, 이따금씩 6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캐티네 집에 있는 말을 보러 온다. 캐티는 제이콥이 마굿간에 찾아오면 다가가 혼자서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하고, 말을 함께 돌보기도 한다. 제이콥은 캐티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새끼 고양이를 주는 것으로 자신의 우정을 전한다.

----------------------------------------------------------------------------------------------------------

“아빠, 왜 제이콥 스톨츠는 늘 털모자를 쓰고 있죠?”

“내 생각에 제이콥 자신을 숨기고 싶은 느낌일 것 같아. 어떤 면에서 말이다.”

“보호하는 거요.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기분이요.

제 생각엔 그게 제이콥에게 필요한 느낌인 것 같아요.”

“네가 맞는 것 같다, 캐티.

제이콥의 머릿속에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어.

그 모자는 그 세계가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줄 거야.”

----------------------------------------------------------------------------------------------------------

이렇듯 캐티는 제이콥을 알아가고, 이해하며, 점차 친구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일상은 지속되지 않는다. 제이콥에게 일어난 어떤 끔찍한 사건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제이콥은, 태어날 때부터 갇혀있었던 침묵보다도 더 깊고 무기력한 침묵에 갇혀 지내게 된다. 캐티가 그를 지킬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사회의 시선이 전혀 그를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 아마 캐티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리라.

이 소설은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 여덟 살 아이의 시선에 비친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하며, 그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작은 마을의 모든 일은 정겹기 그지없다. 힐링되는 기분으로 잔잔하게 읽어내려가다가 갑자기 치달은 마지막 결말의 파국은 그래서 더더욱 충격적이다. 캐티의 삶이 어떻게 흔들렸는지 짐작할 만큼 강렬하다.

10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우리 곁에서 무수히 일어날 만한 비극이다. 지적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많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서, 현대의 제이콥들은 부디 편견 없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학교를 다니며 즐겁게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주 다이어리 - 시인을 만나는 설렘, 윤동주, 프랑시스 잠. 장 콕도. 폴 발레리. 보들레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바라기 노리코. 그리고 정지용. 김영랑. 이상. 백석.
윤동주 100년 포럼 엮음 / starlogo(스타로고)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7년 첫 발매된 '동주 다이어리'가 리메이크되어 다시 나왔다. 윤동주의 시들과 더불어, 그가 생전에 사랑했던 시들이 곳곳에 함께 수록되어 매일을 성찰하고 닦을 수 있도록 만든 낭만적인 다이어리이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매된 당시에도 이미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이번에 새로 나올 버전에 대해서도 기대가 컸는데, 역시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퀄리티였다. 다이어리를 처음 받았을 때 맨 처음 했던 생각은, '쓰기 아깝다'는 것이었다. 쓰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절로 떠오르게 하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담담한 남색 디자인이 정말 예쁘다.







 다이어리의 첫 부분에는 윤동주의 생애와 살아생전의 흔적들이 먼저 수록되어있다. 그리고 이어서 작성할 수 있는 다이어리 부분이 이어지는데, 페이지마다 윗부분에 윤동주의 시 구절이 짤막하게 인용되어있다. 페이지 사이사이에는 윤동주가 아닌 다른 시인들의 시도 함께 수록되어있는데,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인들의 시라고 한다. 휘리릭 펼쳐 몇 구절 읽어보자 이 아름다운 말들이 내가 앞으로 채워나갈 다이어리의 일부가 된다니 더욱 마음이 벅찼다. 늘 한점 부끄러움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던 시인 윤동주, 그의 의지가 엿보이는 시가 나의 일상 한자락에 자리한다는 것만으로도 좀 더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성찰을 하게 될 듯하다.


 처음에 이 다이어리의 요모조모를 살펴봤을 때, 분명 5년 다이어리라고 들었건만 왜 1년치밖에 없는지 의아했다. 보통 몇 개년 다이어리라 한다면 2019년 1월부터 12월까지의 페이지가 끝난 후, 다시 다음 장부터 2020년 1월부터 12월까지의 페이지가 이어지는 식이다. 5년치 다이어리이니 그런 페이지가 5번 반복되어야 할 이 다이어리는 1월부터 12월까지 단 한 번 쭈욱 이어지고는 끝난다. 이상하다 싶어 찬찬이 살펴보다가 알게 되었다. 연도만 다르고 날짜만 같은 5일의 기록을, 한 페이지에 한 번에 적을 수 있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어 '1월 1일' 페이지에는 다섯 칸의 공간이 있다. 첫 번째 칸에는 2019년 1월 1일, 두 번째 칸에는 2020년 1월 1일, 이런 식으로 5년간의 같은 하루가 한 페이지에 들어가게 되어있는 구성이다. 오늘을 기록함과 동시에, 같은 시기의 작년의 나와 재작년의 나, 또 그 전의 나의 기록을 돌아보며 과거와 대화하고 지금을 돌아볼 수 있게 구성해놓은 이 다이어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구성이 동주 다이어리가 구현하고자 하는 윤동주 시인의 신념을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다고 느꼈다.


다만 그렇다보니 작은 단점이 생기는데,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각보다 적어 많은 이야기를 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투머치토커인 편이라 따로 공책 하나를 마련하여, 담을 이야기가 많은 날은 이 곳에 자세한 이야기를 쓰려 한다. 그리고 동주 다이어리에는 하루의 간략한 요약과 공책의 해당일 페이지를 적어두는 것으로 이 부분을 보완하고자 한다. 사실 동주 다이어리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단점도 아니긴 하다.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공간일 것이며, 그렇게 긴 일기를 쓸 날이 또 얼마나 많겠나 싶기도 하다. 지금 시중에 있는 웬만한 다이어리들에 실려있는 스케줄러 페이지가 따로 없는 점도 오히려 마음에 든다. 그래서 '일기장' 그 자체의 본연의 기능에 그만큼 충실하다는 것이니까.



올곧고 깨끗하게 살기 위해 평생을 고뇌한 시인, 불의에 맞서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뇌한 청년 윤동주를 기념하여 만든 5년 다이어리이다. 그 마음이 담긴 날마다의 시 조각을 묵상하듯 읽고 하루의 등불로 또 하루의 위안으로 삼는다면 좋겠다.



이 다이어리를 우리에게 건네주며 '도종환' 시인이 들려준 말이다. 그의 말대로 이 다이어리는 앞으로 5년간 나의 삶에 등불이 되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윤동주의 시는 10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이렇게 우리를 비춰주고 있다. 남은 것은, 그 시를 받아든 우리가 그 마음을 얼마나 잘 이어가느냐에 달려있을 뿐. 그가 남긴 말들을 매일 꼭꼭 씹어 가슴 속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내년부터는 조금 더 부지런히 다이어리를 들여다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들의 피난소
가키야 미우 지음, 김난주 옮김 / 왼쪽주머니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태양이 어제와 다름없이 떠오른다는 것은 봄과 여름도 작년과 똑같이 돌아온다는 뜻일까.
세상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일까.
이곳의 참상이 어떠하든.


-------------------------------------------------------------------------------------------------------------



 가키야 미우의 신작, ‘여자들의 피난소’는 대지진을 소재로 한 재난 소설이다. 일본 어딘가의 가상의 장소와 재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장면 하나하나가 일본 전체를 흔들었던 ‘동일본 대지진’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에게도 충격적이었던 그 자연재해는 수많은 일본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낫지 않을 생채기를 남겼을 것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재산과 인명 피해에서 오는 고통으로서도, 그리고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듯, 참상 속에서야 드러난 인간의 추악한 본성으로서도.


 책장을 넘기자 첫 페이지부터 재난이 시작된다. 흔들리는 땅, 무너지는 건물들, 눈앞에서 시커멓게 다가오는 거대한 해일…. 사람들은 무너진 잔해를 붙잡고 버티며, 물살을 견디며,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지만,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어 시신 안치소에는 몇백 구의 시체가 쌓이게 된다. 그리고 그 끔찍한 재해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세 명의 주인공인 후쿠코, 나기사, 도오노는 각각 정부가 마련한 피난소에 당도하여 만나게 된다.


 후쿠코는 이미 장성한 두 아들을 도쿄로 보내고, 도박 중독에 무능력한 남편을 먹여 살리며 살아가는 중년 여성이다. 나기사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이혼한 탓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아들 마사야를 데리고 있는 장년 여성이다. 도오노는 갓난아기의 엄마로, 시아버지와 시아주버니(남편의 형)를 모시고 있으며, 얼굴이 너무 예뻐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젊은 여성이다. ‘여자들의 피난소’라는 제목답게, 나기사의 아들 마사야를 제외하면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모인, 수백 명이 함께 자고 생활하는, 집처럼 편안해야 할 피난소의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


“저, 여러분, 잘 들으세요.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앞으로는 서로 협력해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두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따라서 서로 연대하고 친목을 도모합시다. 강한 연대감으로 이 상황을 이겨 나가도록 합시다.”
대체 무슨 말이야. 칸막이 소리는 어디로 가고,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칸막이 따위가 필요 없습니다.”


-------------------------------------------------------------------------------------------------------------




 피난소의 대표로 추대된 이는 피난소에 칸막이를 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 말은,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고 난 후까지, 하루종일, 낯선 사람들과 탁 트인 공간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목욕 시설도 없어 알코올 솜으로 몸을 닦아야 하는데 그마저도 할 수가 없다. 도오노는 늘 불편하게 담요로 몸을 가린 채 아기에게 수유를 해야 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8시가 되면 TV를 강제로 끄는 바람에 뉴스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화장실도 공용으로 사용하는 탓에 도오노가 남자들에게 납치될 뻔하는 일도 일어난다. 긴급 피임약이 필요한 사람은 찾아오라고 말하며, ‘남자들이란 원래 그런 동물이니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여자들이 좀 참아달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누구도 제대로 반대하지 못한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나기사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


이 피난소에 온 뒤로 지친 머리 한구석에서 줄곧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이상하다.
너무나 가혹하게 생활하는 탓에 권리 의식을 야금야금 잃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를 주장하는 감성이 약해진 것은 아닐까.


-------------------------------------------------------------------------------------------------------------




 그 때 나기사는 깨닫는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변화의 기점이 된 것은 슬픔이 분노로 변하는 순간이었으며, 그 분노가 에너지원이 되어 온몸에 기력이 넘치게 하였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이 상황을 타개해 보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긴다. 그 이후 피난소에는 칸막이가 배부되고, 여러 가지 건의사항이 받아들여지는 등 그나마 피난소의 환경이 나아지게 된다.


 이대로 모두 행복하게 재난을 극복해낸다면 좋을 텐데, 뒤이어 이어지는 일들은 더 처참하다. 소설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분노는 커지고 답답함은 쌓인다. 모든 것이 하나같이 엉망진창이라, 아니, 진짜로 이런 말을 한다고?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 생각이 부글부글 인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며 해설을 읽을 때, 실제 동일본 대지진 때의 다양한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았다. 재난 의연금과 위로금이 별거 중인 남편에게 지급되는 바람에 지원을 받지 못한 가정폭력 피해자들, 가족적 분위기를 강조한 피난소 대표 탓에 수유할 공간조차 제공받지 못한 아기 엄마들, 아직까지도 본인의 계좌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여성들까지.


 일본의 여성 인권이 굉장히 낮은 편이라는 것은 여기저기서 접하여 잘 알고 있었다. 생방송 도중 성추행을 당하고도 도리어 프로그램에서 하차당한 아나운서나, 여성은 멍청해야 매력적이라며 카메라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말하는 일본인들이 떠올랐다. 작가는 그러한 일본 사회에 이 소설로서 대항하려 하는 것 같았다. 재해로 벌거벗겨진 채 무방비해진 공동체가 배경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


“지진이 안 났으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텐데.”
“하지만 피난소에서 생활할 때, 후쿠코 씨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어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인데, 싫어하는 남편과 죽을 때까지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요.”
“그래, 그랬지.”
“인생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건, 지진 해일 피해가 없었어도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




 이 소설 속의 여성들은 각자가 처해 있는 입장에서 각자의 역할(아내, 엄마, 며느리)을 순종적으로 인내하길 강요받다가, 대지진을 기점으로 인생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다. 극한 상황에서 목숨을 위협받고 나니 하루라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 속 도오노의 말처럼,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것은 자연재해와 같은 엄청난 사건이 있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당연히 일어난다.


 나기사가 그랬듯 분노는 인간에게 에너지를 주며, 그 힘으로 무언가를 바꾸게 한다. 작가는 자연재해가 일어나지 않은, 지금 평범한 시대를 살고 있는, 평생을 그렇게 살 것처럼 불행을 견뎌내고 있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언젠가 인생이 끝날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분노하라고, 분노하여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갸우뚱하게 하는 대사들이나 불편한 장면들이 있었지만, 소설 마지막에 나오는 작가의 말과 해설을 읽고 일본의 실태를 대응해 보니 수긍이 되었다. 소설 속의 아주 평범한 그녀들이 용기를 내고 분노하여 결국 자신들의 삶을 일궈낸 것처럼, 그녀들과 비슷하게 아주 평범한 누군가들에게 이 소설이 변화를 위한 작은 신호탄이 되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