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 성공과 몰락의 변곡점에서 승리하는 단 하나의 원칙
앤드류 그로브 지음, 유정식 옮김 / 부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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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한참 흐른 뒤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명확해진다. ‘아, 그때 그 주식을 사야 했구나, 그때가 그 가격으로 아파트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구나, 시간을 조금만 아껴 일본어를 배워뒀더라면 지금 큰 쓸모가 있었겠구나’ 같은 것들. 이건 답안지를 펼쳐놓고 시험문제 푸는 것과 비슷하다. 답을 확인하고 문제를 풀면, 마치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우유부단 모드로 돌아가기 십상일 것이다. ‘지금 이 주식을? 이 아파트를? 이 가격에? 너무 비싼데? 상투 잡는거 아냐?’, ‘좀 쉬자, 외국어 배우는 건 여유가 더 생겼을 때 하자.’ 머뭇머뭇, 쭈뼛쭈뼛. 시간은 칼같이 흐르고 어느덧 변화는 끝난다. 훗날 다시 돌이켜본다. ‘아 그때 그 주식을 사야 했구나, 그때가 그 가격으로 아파트.....’ 미련한 반복이다. 위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재산과, 개인 경력에서 돌이키기 힘든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생이 이런 식이다. 나도 별수 없이 마찬가지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방부제도 삭는다. 기업 경영도 마찬가지다. 잘 나갈 때 파놓은 우물 하나로 평생 씻고 마실 수는 없다. 마르거나, 사용할 수 없는 물로 바뀔 가능성은 상존한다. 깨어있어야 하고, 주변의 다양한 변화 신호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든 지금의 우물을 버리고 새 우물을 찾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건드리는 책이다. Intel의 회장이자 저자인 앤디 그로브는 기업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 만큼 시장이 급변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 Intel을 경영하면서 깨달은 통찰이다. 지금도 거대기업이지만(2021년 현재 시장가치 256조원) 저자가 수장으로 있던 1980~1990년대의 Intel은 세계 컴퓨터 산업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거대기업이었고, 많은 기업이 따라잡고(따라하고) 싶어한 롤모델이었다. 하지만 그건 외부의 시선일 뿐 그로브의 머릿속에는 경고등이 켜졌다.

 

저자가 회장으로 재임할 당시 Intel은 ‘반도체 회사’였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선두에 서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씩 바뀌어갔다. 반도체 판매로 얻는 이익은 점점 줄어가는데(되려 손실이 늘어나는데) 일본을 필두로 한 후발주자들은 무섭게 시장을 장악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업계 1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Intel을 Intel답게 만든 일등 공신이 반도체 사업이었기에 주력 사업을 변경한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이 경우, 평범한 대부분의 기업은 현상 유지가 최선이라 판단하고 이를 위해 기업 역량을 총동원한다. 지금까지 누려온 성공의 달콤함을 잊지 못하고, 불확실한 곳으로 걸어갔을 때의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Intel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반도체 사업에서 영광을 유지해보려 사력을 다하며, 변화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한 번 바뀐 시장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고 손실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불어났다. 결단의 순간이 왔고, 앤디 그로브의 결정은 평범하지 않았다. Intel은 레드오션 시장으로 변한 반도체 사업에서 발을 빼 떠오르고 있던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으로 기업의 핸들을 과감히 꺾었다. 그 결정으로 Intel은 90년대 세계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장악한 포식자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의 핵심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기업이 늘 깨어있고, 언제든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 시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다. Intel처럼 적시에 잘 변화해 다시 승자가 되기도 하지만 시장 상황과 기업 체질을 오판해 억지로 변화하려다 망하는 기업도 여럿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가 완전히 끝나 새로운 룰이 시장을 지배할 때가 되어야 변했어야 할 시점을 (후회 속에서) 정확히 알 수 있지만, 저자의 표현처럼 ‘죽음의 계곡’ 안에 들어가 있을 때는 조짐을 알아채기 힘든 것도 문제다. 증기기관과 전기의 발명으로 시장 생태계가 완전히 바뀌고 업종별 총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산업혁명도 그랬고, 지구촌 경제를 초토화시켰던 세계 대공황도 그랬다. 지나고나서야 ‘아 그때가 산업혁명 시기였구나, 사는게 너무 힘들었는데 그때가 대공황 시기였구나’ 알게 되는 것이다. 미래에서 바라보는 박제된 과거다.

 

앤디 그로브는 변화해야 할 시점을 ‘전략적 변곡점’이라 명한다. 그리고 전략적 변곡점은 갑자기 터지기보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오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채기 위해서는 ‘신호’를 제대로 감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잡음’이 아니라, ‘신호’여야 한다. 이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저자가 말한다. ‘봄이 오면 눈은 가장자리부터 녹는다. 공기에 노출되는 부분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가장자리로부터 전해오는 소식을 해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호와 잡음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럼 그 ‘신호’는 누구로부터, 언제,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저자는 3가지 변화를 유심히 보라고 이야기한다. 그곳에 ‘신호’가 있다며. 저자 그 3가지를 ‘핵심 경쟁자가 바뀌고 있는가’, ‘핵심 보완자가 바뀌고 있는가’, ‘주위 사람들이 갈피를 못 잡는 듯 보이는가’로 설명한다. 경쟁사가 바뀌고, 우리를 보완해주던 기업이 바뀌고, 변화에 우왕자왕하며 혼란에 빠진 주변인들이 늘어난다면 ‘신호’가 내 눈앞에서 깜박거리는구나, 눈치채야 한다.

 

그럼 이 신호를 가장 빨리, 정확하게 감지하는 이는 누구일까. 경영진은 그 주인공이 아니다. 트로이의 멸망을 내다본 예언자 카산드라처럼, 산업의 변화를 제일 먼저 감지하는 사람은 기업 일선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중간관리자들이다. 그럼 경영진은?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리더는 가장 나중에 아는 사람이다.’

 

저자는 말한다. ‘최일선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보통 절박한 변화를 일찍 알아차린다. 영업사원들은 경영진보다 고객 수요의 변화를 먼저 파악한다. 재무 분석가들은 언제 사업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날지 누구보다 빨리 인지한다. 경영진이 초기 성공으로 형성된 생각만 믿고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던 반면, 생산 계획자들과 재무 분석가들은 철저히 객관적 입장에서 자원을 배분했고 수치를 분석했다. 고위 경영자들은 경기 순환 위기와 지속적인 적자 상황을 겪고 난 다음에야 과거와 결별하는데 필요한 용기를 겨우 낼 수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불확실한 미래지만 살아남아 승리하기 위해 기업을 뿌리부터 바꿔나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앤디 그로브가 언급했듯, 회사의 모든 부분이 과거의 누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다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좋든, 싫든 바꿔야 한다. 시장은 냉정해서 기업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적확한 타이밍에 체질을 바꿔가며 잘 적응하는 것만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

 

앤디 그로브는 Intel을 떠났고 2016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2021년 현재 Intel의 기업가치는 삼성전자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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