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없는 삶 -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바스티안 베르브너 지음, 이승희 옮김 / 판미동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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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고, (내가 진학하던 당시) 부산에서 2번째로 수준(?) 높은 대학을 나왔다. 직장생활은 정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하고 있고, 꽤 넓은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래서,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거나, 실업계 학교를 다녔거나, 알려지지 않은 지역 대학을 나왔거나,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작은 회사를 다니고 집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무지하다. 이 나라에서 통용되는 규격화된 잣대를 들이대자면, 그 무지는 나보다 (교육, 경제수준, 직업 등에서) 못하고 뒤쳐진다 판단한 이들에게 드러내는 날카로운 이빨 같은 것이다. 그 무지는 내게 다양한 편견의 씨앗을 심었고 종종 혐오감을 갖게 했다.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 나에게 편견을 가진 이들은 없을까. 셀 수 없을 것이다.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태어나 자라고, 특목고를 다녔고, IN서울 대학을 나와 유명한 대기업이나 굴지의 공기업을 직장으로 삼고 수도권에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나를 동일한 잣대로 재고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인간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곳의 낯선 존재에게는 누구나 편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편견은 종종 마음속에 독버섯처럼 혐오를 길러낸다.

 

《혐오 없는 삶》은 낯선 이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인간이 낯선 것에 대한 공포, 편견, 불안으로 야기된 혐오를 몰아내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묻는 책이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대단히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끊임없는 반복에 배치되어 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장소를 오가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며, 늘 듣는 이야기와 정보만 받아들인다. 현대 사회는 사람들이 낯선 것을 쉽게 마주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익숙함의 우물에서만 살다 보니 우물 밖 이야기에 대해서는 좀체 관심이 없다. 편견을 줄이기 위해서는 잦은 접촉과 대화가 필수적이지만, 접촉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신, 만들어진 위험》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미국과 이슬람 국가들에서 무신론자들에게 겨눠지는 아주 괴상한 비난 중 하나는 무신론자들이 사탄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무신론자는 선한 신을 믿지 않는 것만큼이나 악한 신도 믿지 않는다. 무신론자는 초자연적인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오직 종교인들만이 사탄을 믿는다.' 믿고자 하는 대로 믿고, 비난하고 욕하고자 하는 대로 무작정 해버리는 것, 편견과 혐오는 이런 것이다.

 

그럼 편견만 혐오를 낳을까. 책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지만 차별도 혐오를 낳는다. 인종을 차별하고, 성별을 차별하고, 계급을 차별할 때 혐오의 수치는 올라간다. 트레시 맥밀런 코텀은 《THICK》에서 이렇게 말했다. ‘흑인 소녀들과 흑인 여성들은 문제 그 자체다. 그것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고, 균형을 맞춰야 할 경제문제고, 극복해야 할 감정적 짐이다.’ 차별은 사람을 동등한 위치에 놓아두지 않는다. 나와 다르다는 것은, 그 다름을 나의 시야에서 치워버려야 할 사회적 수거 문제거나, 해결해야 할 숙제로 인식하게 한다.

 

그럼 편견을 줄이고, 오해보다는 이해를, 혐오보다는 사랑을 우선시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낯선 이와의 접촉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책 속에 다양한 사례가 나온다.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은퇴자와 이민자, 흑인과 KKK단 소속의 백인, 네오나치와 팔레스타인인, 흑인 군인과 백인 군인 등, 물과 기름이라는 비유에 최적화된 예가 수두룩하다. 《혐오 없는 삶》에서는 이들이 접촉과 대화를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꾸준한 접촉과 내밀한 대화를 통해 편견이라는 알에 금을 내고 깨 나가는 모습은 보는 것은 멋진 경험이다. 개인 간 사례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접촉을 사회로, 국가로 확장했을 때의 경우도 여럿 언급된다. 접촉의 규모가 커져도 답은 결국 하나다. 자주 대면하고, 자주 이야기하고, 우정을 쌓아라. 그러면 마음이 바뀌고 편견이 깨지고 한 사람의 고결한 인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것.

 

혐오를 쌓고 타인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이는 누구일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더 힘있고, 더 가졌고, 더 배운 사람들이 주로 그렇다. 인간은 나보다 강한 이에 대해서는 질투하고 부러워할지언정, 편견을 가지고 혐오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혐오할 수 있는 무지하고, 거칠고, 모진 마음조차 권력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먼저 다가가 마음을 열어야 하는 이들도 힘을 가진 자들이어야 한다. 혐오의 대상이 먼저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자가 꿈꾸는 ‘혐오 없는 삶’이 가능할까. 나는 회의적이다. 편견과 혐오는 현생 인류가 나타났을 때부터 뇌에 기본적으로 탑재된 생존 유지 기능이기 때문이다.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할 줄 알고 내 편만 모아 세력을 확장하는 능력, 만들어놓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없이 적을 만들고 편견을 부추기고 혐오를 조장하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원시시대부터 인간이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개발한 필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럼, ‘혐오 없는 삶’은 불가능한가? 나는 모른다. 개인적으로 회의적일 뿐. 하지만 타인들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더 나은 삶, 인류의 화합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들에게 저자의 후기 일부를 하나의 대안으로 남겨 본다. “(중략) 나는 한 문장을 떠올렸다. 이 문장은 미국 정치학자 릴리아나 메이슨이 미국을 묘사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이 독일을 비롯한 다른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확신한다. We act like we disagree more than we actually do.(우리는 실제보다 더 많이 반대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제 우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경향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 또는 아니오, 선과 악, 우리 아니면 그들이라는 이분법 왕국을 떠나 그 사이를 헤엄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들에게 우리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를 반복해서 말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만나야 한다. 서로를 알아 가야 한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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