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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토박이는 제주가 싫습니다
현요아 지음 / 핑크뮬리 / 2021년 3월
평점 :
고백하자면, 나는 제주에 별 관심이 없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들처럼 제주를 생각하면 설레었고, 들떴더랬다. 전형적인 관광객의 모습으로 어디서 잘지, 뭘 먹을지, 어떤 곳을 다닐지 늘 고민했다. 몇 번째 방문이었을까. 제주에 있는 시간이 지루했다. 하나라도 더 얻어가려 부산을 떠는게 관광객의 숙명일진데, 흥이 나지 않았다. 숙소에서 나가기 싫었고, 집에 가려면 억지로 시간을 더 견뎌야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돌아온 뒤 이유를 고민했다. 답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커도 제주는 섬이고 시간을 보낼 곳은 유한했다. 섬 특유의 경관을 뽐내는 곳들은 여전했지만 익숙해지니 감흥이 떨어졌다. 특별히 맛있는 음식은 없는데, 가격만 유독 특별했다. 이집트 피라미드 같은, 이게 왜 제주에 있어야 하는건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오로지 관광객 지갑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괴이한 건축물도 나를 괴롭혔다. 여행 경비를 정산해보면, 해외여행이 되려 쌀 지경이었다. 이 모든 사항(익숙함+비용+정체성 없음)을 합산해 마음의 손익계산서를 작성해보니, 내게 제주는 손실이었다.
나는 책이 있는 공간을 좋아한다. 서점을 가면 제주와 관련된 책을 꽤나 뒤지곤 했다. 흥미롭게도 제주를 주제로 출판하는 저자들은 환상의 섬 제주만을 얘기했다. 경쟁하듯 제주를 뽐내고 자랑했다. 사람들이 늘 찾는 곳, 자주 찾는 곳, 잘 찾지 않지만 가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곳, 현지인이 사랑하는 곳 등등 온갖 곳을 찬양했다. 그곳에는 어둠이 없었다. 아픔과 상처도 없었다. 책 속 제주는 빛과 온기가 가득하고, 항상 사랑이 넘실대는 곳이었다. 파라다이스. 더 이상 서점에서 제주를 이야기하는 코너를 찾지 않았다.
몇 주전 한권의 책을 만났다. <제주 토박이는 제주가 싫습니다.>(이하 제토제...성의없나요..)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의심했다. 낚시성 제목이라 여겼다. ‘제주 토박이인 나는, 제주가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초라한 내가 온전히 품을 수 없기에 싫습니다. 특히 내가 초라해지는 환상적인 공간은 A, B, C....’ 라고 적혀있을 거라 생각했다. 목차를 훑고,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기며 그런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오해해서 미안하다.
20대 중반의 저자는, 제토제를 3개의 공간으로 나눈다. 대학 가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상처받고 아파했던 제주, 대학 시절을 보내며 상처받고 아파했던 서울,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들이 사는 지구(Earth). 맞다. 제토제는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한 책이다. 가끔 246페이지짜리 긴 유서를 읽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부끄러움을 너무 오래 앓아 창피의 한도를 다 써버렸기에 온갖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다고 저자는 말하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상처, 아픔, 고통을 날것 그대로 펼쳐보이는 모습은 놀랍다. 도를 넘는 솔직함, 그걸 선명하게 글로 묘사할 수 있는 재능은 부럽기도 하다. 그럼 제토제는 어둠의 힘으로 뒤덮힌 암울하고 슬프기만한, 혹한의 겨울같은 책일까. 그렇지 않다. 책 속에서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낱낱이 펼쳐내 스스로를 보듬어 다독이고, (저자가 적었듯) 기적처럼 같은 시기에 지구에 머무는 동료들을 위로한다. 누구나 힘들어, 아프니까 청춘 아니겠니,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 너도 견뎌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펼쳐보인 내 인생의 타래를 봤지? 넌 나만큼 아프지 않잖아, 그러니까 엄살 부리지 마, 라고 설교하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현요아라는 개인을 드러낼 뿐이다. 신기하게도 거기서 위로를 얻는다. 강요하지 않고 설교하지 않으니 더 공감할 수 있고, 심지어 용기를 얻고 희망을 보기도 한다.
제주를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이 많기에 제토제라는 제목에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온전히 읽은 뒤 시간을 들여 곱씹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어느 곳에 있든, 누구와 함께 하든 저자에게서 제주가 떨어질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걸. 제주는 저자에게 문신처럼, 흉터처럼 몸과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제목이 제토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현요아 작가님의 미래를 응원한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