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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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 - 악인

 

한 줄 감상 평 : 외로움이 악을 부르는가, 아니면 악하기 때문에 외로울 수밖에 없는것인가.

 

 

 

  악인은 대체 누구인가라는 책의 인트로 멘트가 읽기 전에도, 읽은 후에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분명 살인자는 존재했고, 그 살인자의 이야기를 방금 전까지 읽었으면서도 누가 악인인지를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살인자가 나와도 너무나 비슷한 외로움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을 갈구하는 한 개인이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머리 속에 한가지 의문점이 관통하게 된다. 외로움이 내 이성을 갉아먹고 또다른 악을 만들어내는가, 아니면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매일매일 이성 속 현실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 심오한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힘들어졌다.

 

  만약 전자가 그 답이라면 유이치는 범인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외로움이 악을 만들어냈다면 범인은 그를 외롭게 만들었던 환경이다. 사랑을, 정착을 갈구하던 그에게 자신의 본능적인 욕망은 현실 그 어디에서도 발현할 수 없다는 좌절만을 안겨준 유년시절, 숱한 의미없는 만남들이 그를 악하게 만든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속 유이치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심지어 살인사건 피해자도 결국에는 피의자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회 그 자체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요시다 슈이치가 퍼레이드에서도 폭로하려 했던 사회의 익명성과 개인의 소외가 그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외로움이 만들어진다고 가정할 때, 범인은 달라질까? 사랑을 이해하는 본능이 근본적으로 정착될 수 없고, 진정한 교제보다는 겉치레의 교감만이 존재한다고 본다면, 그리고 그것이 '악'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 가정도 맞는 가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다시 회의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일단 우리 모두가 악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외로움이 어디서 오느냐를 막론하고 우리는 매일매일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존재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든 될 수 있고, 악인이 악인을 판단하는 상황이 온다. 즉 그 판단에는 정의도, 당위성도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외로워서 악해지는 것이라면 악을 만든 사회를 나무라고 개선하면 된다. 하지만 인간 자체의 악을 인정한다면 홉스가 말하듯 만인과 만인의 투쟁속에서 패자가 악인 푯말을 지닐뿐이고, 그의 외로움은 실은 다른이들과 다르지 않음에도 죄가 되어 버린다. 요시다 슈이치는 그 어느쪽의 입장도 옹호하지 않지만 선과 악의 심연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독자가 차갑게 그 사실을 사유하게끔 만든다.

 

  악과 죄에관해 논하는 어려운 소설이었지만, 마지막 범인의 편지와 그를 사랑했던 여자의 말 속에서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여자를 일찍 만났기를, 사회로부터의 외로움이 그를 악인으로 만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갈구했던 그와 그의 죄였던 외로움이 사실은 그녀 내부에 있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고 너나 나나 악인이었고, 그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여자사이의 관점차이. 과연 누가 악인일까. 그렇다면 결국 사랑은 악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것일까?

 

 

* 내가 뽑은 명 문구 *

 

-226p) 물론 쓰루다도 돈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돈보다 더 필요한 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못 찾으면 살아갈 힘이 솟아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475p) 세상에서 하는 말이 맞는 거죠? 그 사람은 악인이었던 거죠? 그런 악인을, 저 혼자 들떠서 좋아했던 것뿐이죠. 네? 그런 거죠?

 

 

 

 

* 함께보면 좋을 책 *

 

요시다슈이치 - 퍼레이드 (사회의 익명성과 인간소외에 관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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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정석 - 무에서 유를 만드는 10가지 빡신 기획 습관 기획의 정석 시리즈
박신영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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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정석


박신영

 



한 줄 감상 평 : 기획의 정석

 

 

 

 

 

  평소에 숱하게 마케팅 기획 서적으로 여기저기서 추천하던 기회의 정석. 때마침 알라딘에서 그녀의 다른책 "보고의 정석"과 세트로 사면 파격 할인을 하던 탓에 기회다 싶어 구입했다. 그리고 그녀의 너무나도 매력적인, 그리고 논리적이고 매끄러운 기획서 작성법을 알게되었다. 

 

  사실 알고보면 당연히 지켰어야할 기획서의 흐름을 그동안 참 많이 놓치고 살았구나 라는것을 깨닫게된다. 그동안 제출했던 수 많은 공모전의 노력들이 실패로 끝났을 때 마음속으로는 "음.. 뭔가 부족했군"이라며 수긍만하던 내모습을 지켜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기획인가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가 지적했던 내 기획서는 WHAT만 강조했던 기획서였으며, "프레임"을 위한 "프레임"만 나열한 실속없는, 두루뭉술한 기획이었다.

 

  이 책을 읽고나니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획의 논리와 흐름, 아이디어의 구체화가 어떤 단계를 지나 구성되어야만 하는가가 좀 명확해 진 것 같다. 그렇기에 난 이 책을 책 이름 그대로 "기획의 정석"이라 부르고 싶다. 수학을 풀이할 때 수학의 정석을 먼저 펼쳐보았던 것처럼, 보다 많은 기획자들이 이 책, 기획의 정석과 친근해지길 바란다. 

 

  더불어 사이사이에 껴있던, 특히나 에필로그에 써있던 그녀의 말들이 어쩐지 그동안 찌질한 기획만 해왔던 나에게 위로를 던지는것 같아 눈물났다. 그래 난 잘못된 게 아니었다. 무한 YES로 시작하겠다. 그녀의 말처럼 수많은 실패들에 좌절하는것이 아닌 왜 잘못되었는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시작하는 실천가가 되겠다!

 

 

 

* 감명 깊은 문구들 *

 

  “회사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여자를 잘못 만났어.”,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기다렸는데.”,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견뎌냈는데.” 라는 삶의 끝자락에서 하는 이런 고백들은 얼마나 슬픈가내가 언제 행복한지를 알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이건 나에게 맞는 거니까라고 할 수 있는 즉 very me를 아는 사람이 승자이다엄마가 되라는 나 말고애인이 바라는 나 말고회사가 요구하는 나 말고, very me를 위해 의미 있게 살자

  유튜브의 창업자인 스티브 첸이 모두 다 갖춰서 시작하는 것은 이미 시작이 아니다라고 한 말은 오늘도 나를 멈추지 않게 한다이와 관련하여 큰 교훈을 주신 폴앤마크의 이대일 팀장님의 이야기를 잠시 해보겠다팀장님은 해외여행 도중에 우연히 보게 된 카드 글귀에 큰 위로를 받아한국에 돌아가면 카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그런데 팀장님은 디자인의 자 옆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포토샵은커녕 그림판도 몰랐다그래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엑셀은 써본 적이 있으니엑셀로 카드 글귀를 적어 인쇄소에 가져갔다그리고 인쇄하여 포장하고바코드를 만들어 카드를 팔러 갔다그리고 이렇게 참신한 디자인은 처음이다라는 평가를 받고, 00문고에서 판매를 시작했다삽질정신의 저자로서 나는 이것을 삽질정신보다 위대한 엑셀정신이라고 명명했다. “나는 포토샵도 못하고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라서 하고 싶지만 할 수 없겠네이런 궁시렁대는 변명들이 구차하게 들리는 순간이다.

  나는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지혜는 물과 같다는 말을 좋아한다겸손하게 늘 배우는 자세이기만 한다면그리고 아웃풋의 시작이었을 엑셀정신의 행동을 가지기만 한다면겁나고 후달리는 인생에서 지혜가 물처럼 흘러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정답이 없는 영역에서 일하면서 늘 마음이 가난한 기획자들에게 스티브 첸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라고 애기해주고 싶다.

"회사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여자를 잘못 만났어.",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기다렸는데.",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견뎌냈는데." 라는 삶의 끝자락에서 하는 이런 고백들은 얼마나 슬픈가? 내가 언제 행복한지를 알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이건 나에게 맞는 거니까라고 할 수 있는 즉 very me를 아는 사람이 승자이다. 엄마가 되라는 나 말고, 애인이 바라는 나 말고, 회사가 요구하는 나 말고, very me를 위해 의미 있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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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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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요시다 슈이치

 

한 줄 감상 평 : 도전, 기대, 그리고 실망

 

 

 

 

    무조건 신간이 나왔다하면 집게되는 요시다 슈이치의 책. 게다가 그가 이 작품을 두고 스스로 말한 자신의 '문학인생의 전환점'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는 어떤 도전을 했을까? 그 기대에 흥분하며 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은 후 그의 도전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대중소설로의 접근, 추리소설 속에 블록버스터한 공간적 배경을 가미했다는 것. 마치 한 편의 거대한 007 영화같은 소설을 지어보고자 했을 것이다. 그의 도전은 박수쳐주고 싶다. 문학이란 작가가 체험하고 싶은 하나의 공간을 반영한다고 보았을 때, 그가 치밀하게 상상하고 계획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후회없이 서술되었음에는 역시 요시다 슈이치의 저력이 느껴지는 바였다. 하지만 그의 이전소설을 읽었던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구성이나 이야기 전개의 치밀함이 아니다. 원했던 것은 그의 소설 특유의 '메시지'이다.

    분명 이 소설은 특유의 주제의식이 살아있는 소설이다. 제목만 보더라도 그 주제가 무엇인지는 파악 가능하다. 움직이지 않는 태양과는 달리, 그 태양을 이용하려하는 세력들의 블록버스터같은 액션과 첩보활동이 소설의 줄거리이며, 그 속에는 때로는 고독하게, 때로는 진한 유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그 중심에 있다. 다른 첩보물과의 차이가 있다면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된 다는 점이며, 이는 주제의식을 빛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 속에서는 '메시지'가 없다. 소설에 메시지가 없다는것은 무엇일까?  메시지는 단순히 주제의식의 반영이 아니다. 메시지란 우리가 미쳐보지 못했던 삶의 맹점을 직시하게 해주는 시선이며, 다양한 가치관들 속에서 특정 가치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게 해주는 계기이다. 어렵게 풀어 놓았지만 결국 주제의식과 더불어 한 발 더 나아가 독자가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한 켠의 공간이 메시지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악인에서 악인의 정의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던 것, 퍼레이드에서 사회의 익명성을 직시하도록 해주었던 것, 원숭이와 게의 전쟁에서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던 것, 요노스케 이야기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의 진정한 가치가 평범함과 사소함 속에서 탄생하고 있지 않냐는 것들이 모두 그가 이전 작품에서 제시했던 메시지들이다. 이번에 책을 집어 읽을 때에도 무언가 이런 메시지가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런 기대 때문인지, 독서는 잘 되지 못했다. 그에 대한 실망이라기 보다는 책에서의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했다.

    그래도 요시다 슈이치는 여전히 뛰어난 작가라는 발언을 거두지는 못하겠다. 그의 전 소설에 공통적으로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묘사이다. 그의 묘사는 공간적인 배경과 인물에대한 치밀하고 섬세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동아시아에서부터 미국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배경을 마치 읽는 내내 그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해주는 그의 서술은 이미 '사진'이나 다름없다. 여행을 좋아한다는 요시다 슈이치의 경험이 분명히 이러한 배경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홍콩 언저리의 선술집, 중국의 사막, 일본의 아기자기한 카페, 미국의 카페테리아 이 모두 치밀한 답사가 선행되었음이 몸소 느껴진다. 인물에 대한 서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의 소설은 특이하게도 한 인물의 시선에서만이 아닌, 다른 인물의 시점에 모두 각각 들어가서 서술한다. 상황별로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소설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는 다양한 인물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하고, 다른 인물과의 관계를 각각의 등장인물이 서로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게 해준다. 그러한 기술에서 느껴지는 묘미는 소설을 한 층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이러한 심리 서술은 그의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다.

 

    결과적으로는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한 짝사랑과 같지만, 또 시간이 흐르고 그의 작품이 하나 둘씩 다시 시중에 나온다면 그 책과 다시 한 번 짝사랑이 아닌 진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번 소설은 요시다 슈이치와의 문학적 교감에 실패했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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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역사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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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감상 평 : 역사에서는 비약이나 생략이 통하지 않는다.

 

 

역사에서는 비약이나 생략이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지름길을 찾을 수 있을 따름이다.

 

    하나의 숙제와도 같은 이 책을 마무리하며 보았던 작가의 맺음말에는 위의 문구가 써져 있었다. 역사에서는 비약이나 생략이 통하지 않는다는 문구. 작가는 책에서 인위적으로 무의식적, 의식적 역사의 흐름을 건너뛰려하는 행위가 파시즘, 변형사회주의, 급조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었음을 예로 들며 이를 통찰하고 있다. 시민사회가 고착화되지 못한 채 제국주의로 뛰어든 독일과 이탈리아는 필연적으로 시민사회의 제어기능을 갖추지 못했고 그때문에 광적인 파시즘으로 뛰어들었다. 왕정을 무너뜨린 이후 자본주의의 성장도, 시민의 존재도 부재 했던 러시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레닌이라는 또다른 1인독재를 맞이하고 변형된 사회주의를 경험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가 심어진듯 보였던 동양문명권은 실은 시민과 민주의 개념을 제대로 이식하지 못했고 근본에서 유리되었다(책에서는 이를 '관료제'와 '신분제'에 얽매인 동양과 '계약제'를 근간으로한 서양의 특성차이라고 진단한다). 이 세 사례의 공통점은 역사가 인위적으로 특정단계를 뛰어넘으려 할 경우에 어떠한 후유증이 생기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작가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점이다.

 

    작가의 말을 받아들이면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문명, 아니 동양문명권은 서양세계에 비해 실패했다고 진단할 수 있다.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이며 자위할 수는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문명을 선도 (경제적/정치적)하고 있는 이들이 서양 문명이라고 볼 때 어쩔수 없는 진단이다. 이 중요한 차이의 직접적인 계기에는 시민사회의 성장을 충분히 경험했느냐가 영향을 끼쳤다.시민사회의 성장이 우물안 동양과 진출의 서양문명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발전을 경험한 서양은 자기계발에 열을올렸으나 동양문명은 자기계발에 게을렀다. 왕 자신으로의 통일을 지향한 동양은 자기계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상업을 기반으로한 아래계층 중심의 문명분산은 각 지역의 자기계발에 열을 올리게 했다.

 

    시민사회의 성장을 보려면 기본적으로 더 오래 전을 거슬러올라가 문명의 시작에서부터 진단해 보아야한다. 이는 지리학적인 설명이 큰 설득력을 가진다. 중원이라는 통일의 지향점이 있었던 동양은 역사를 거듭해도 통일이 제 일의 덕목이 되었으며, 문명의 중심점이 계속 서쪽으로 이동한 서양문명에는 애초부터 통일의 기준이 있을리 만무햇다.

 

    통일이 주는 효율성의 이미지는 분명 어느정도까지는 한쪽에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몽골이나 투르크의 아시아문명이 서양을 정복했던 역사를 보면 이는 잘 증명된다. 하지만 이는 어느정도까지만 먹히는 시도였다. 곧 분산의 문명권(서양)이 역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조잡하게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서양문명이 중화로 결집된 동양문명권을 이기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래계층의 성장과 유관하다.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동양문명권에 비해 그저 계약관계 속 '주인'이었던 한층 느슨한 서양문명의 왕들덕에 시민계급이 성장했고, 이들의 성장은 곧 사회 전반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장하자 진출의 욕망이 강해졌다. 더불어 서서히 동양처럼 영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영토국가, 근대적 국민국가의 탄생 - 종교전쟁의 결과) 이제는 서양문명권 내의 국가들이 서로 각개약진 경쟁하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예전의 서양문명권 내부의 분쟁이 도시대 도시의 규모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정도에 이르렀다. 국민국가의 탄생과 진출의 욕망은 곧 제국주의로 발전했고, 세계는 단숨에 제국주의 아래에 잠식되었다. 다시말해 서양문명이 동양문명을 압도하게 된 시기이다. 중국은 이내 항복했고, 일본은 부랴부랴 서양문명화 되었다. 서양문명의 압승이다.

 

    이같은 역사를 되짚어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역사의 지름길을 찾기 위해서이다. 어느 한 단계라도 정주행하지 않는다면 역풍을 맞게된다. 다시말해 우리는 후진적인 동양 문명의 일부 굴레를 벗어야한다. 걔중에서도 가장 버려야 할 것은 '소중화'이다. 중국에서 시작한 중화를 정통계승해 우리나라에 와서 변질된 소중화. 우리가 정통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과도한 쇼비니즘의 경향을 띠고있다. 이러한 소중화를 지금의 통일문제에 비교시켜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인위적인 통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후진적인 발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통일은 자연스러운 분산속에 자유로운 교류가 동반되면 자연스레 이루어질 과정이다. 지금의 서양문명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완성되었고, 독일의 통일도 교류는 권리라는 의식 속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중앙, 통일, 안정, 중심을 지향하는 동양문명권에서 분산이란 곧 쥐약과 같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통일에 대한 강박관념이 더 나쁘다. 국경에 상관없는 자연스러운 교류를 오히려 북돋아야한다.

 

    역사는 기회의 소산이 아니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특별한 계기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정주행 과정의 축적이 바로 역사이다. 특별한 기회를 애써 찾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 해봤자 역사는 반응하지 않는다. 부작용을 낳을뿐이다. 이 책은 이 간단한 메시지를 말하기 위해 세계사를 아우르는 설명을 했을것이다. 동양문명에게 경고를 하고싶었던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면, 우리는 이제 비약이나 생략의 기회를 노리기보다는 역사의 과정을 착실히 수행해 나가야만한다. 다만 이 과정을 학습한 이상, 우리는 지름길을 찾을수는 있을것이다. 굵직굵직한 터치 포인트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면 된다. 아직 비 완성적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우리가 지름길을 찾아 도달하면, 그 불완전성에 새로운 답을 제시하고 역사의 새로운 주인으로도 부상할 수 있을것이다.

 

 

 

    방대한 역사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생각이든다. 끊임없이 비교대조하며 문명권의 발생과 전성기, 쇠퇴기를 거쳐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흐름을 알게되어 흥미로웠다. 물론 읽는데에도 책 이름처럼 하나의 역사가 되어 한달 내내 읽었다는 점은 유감스럽지만 역사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힐수 있다는 점에는 되물어볼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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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노스케 이야기 오늘의 일본문학 7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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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래저래 책 읽을 기회가 많아서 내 분위기와는 안맞게 책을 마구마구 읽어대고 있다.

그 중에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가면서 공감하고 울고 웃으며 본 소설이 바로 요시다 슈이치의 요노스케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다루는 배경은 2000년대를 살아가는 나의 풍경과는 조금 다른 1980~1990년대 이야기이지만,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관계라던가 일상생활은 지금의 내 나이인 20대와 전혀 유리감이 없는, 그냥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였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은 처음 읽어봤는데, 참 평범하고 쉽고 재미있게 쓰는데에서 끝나지 않고

중간중간 삶의 따뜻함과 굵직한 메시지들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참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동경의 이모저모를 서술하는 것, 눈 앞에 풍경들을 사진을 바라보듯 서술하는 점 등은 이 작가에게 푹~ 빠져들게 했다.



 

 

요노스케를 통해 바라본 나의 20대



누구나 그렇듯 우리는 평범하다.

 

    명절이나 경조사에서 친척 어르신들을 만났다 하면 매일 듣는말, "그래 대학생활은 어떠니?", 혹은 "이제 다컸네~ 요즘 어떻게 지내 그래?". 이러한 물음들에 나는 매번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내 스스로도 내가 뭘 하고 사는지, 내 대학생활이 어떤지를 단 한번도 곰곰히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매번 두루뭉실하게 뭉게서 대답할 수 밖에 없고, 별거 없는 내 일상을 다시한번 돌아보며 나같이 따분한 인생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거라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하지만 요노스케를 만난 후 난 나의 자책이 필요 이상의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든 일상 속에서 매일 특별함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자 겉으로 보여지는 일상은 바쁘고 화려하게 보일지 몰라도, 결국 나는, 그리고 내 주변의 모든 20대들은 우리 나이대에 접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그저 평범하게 대응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일까, 요노스케와 그 주변의 20대들의 삶은 크게 공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듯 하였고, 학교를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시 자취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거나 간혹 친구를 만나는 요노스케의 1년은 내 생활을 그대로 판 박아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 극단적 결말에 익숙해져있던 내게는 고등학교때의 첫사랑과의 무미건조한 하루데이트 이야기, 너무도 시시하게 헤어져버린 애인 이야기, 그리고 사고친 친구들의 이야기 등이 시시하게도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가 드라마나 소설에서 접하게 되는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얼마나 내 일상과 분리되어있는 이야기들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지만, 특별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 나중에 어디서 어떻게 풀릴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평범함이 내게 주는 교훈은 꽤나 많았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리는 결정들이 나중의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수 있는가. 혹은 평범함 속에서도 과연 나는 요노스케같은 소소하지만 간단한 인생철학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 하는 이 소설의 구성은 요노스케의 20대의 삶이 후대의 그의 주변인들에게, 혹은 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을 어쩌면 '나비효과'라고도 설명할 수 있겠다. 소소한 사건들이 실제로 등장인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발렌타인 소동으로 우연히 만나게된 사진가의 영향을 받아 사진에 관심을 갖고 전문 사진가가 된 요노스케, 요노스케와 함께 떠났던 고향여행에서 베트남 피난민들의 아이를 봤던 계기로 나중에 국제봉사가로 일하게 되는 요노스케의 여자친구, 대학 입학식에서 자신의 의도가 아님에도 맺어주게 된 두 친구가 나중에는 결혼까지 하게되는 사연 등은 우리가 맺고사는 인연들과 매일의 일상들이 얼마나 촘촘히 다른 인생들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반증한다. 이 책의 옮긴이가 말한대로 "일상의 사소한 게기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라는 것이 새삼스레 실감난다. 그래서 작가는 한 등장인물을 통해 "인생이란 정말이지 어디서 어떻게 풀릴지 알 수가 없다"라고 말한것 같다. 나는 그래서 지금의 평범함에 새삼 숙연해지고 지금의 내 평범한 일상이 세상에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끼칠수 있을까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렇게 만물이 연결되어있다는 이 소설의 근본적인 가르침 속에서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내 평범한 일상을 운영해야 할까라는 의구심도 들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자면 어떠한 인생철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아직까지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을것 같다. 지금의 내 모습이 후대의 내모습에, 그리고 내 주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를 생각하기에는 아직 경험도 없고 어린 그저 20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주변의 삶들을 변화시킬까 라는 문제보다 요노스케와 같이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은 무턱대고 한다"라는 인생철학이 내게는 훨씬 와닿는다. 이것을 혹자들은 답을 향해 살지 않는 방황하는 20대라고 부를수도 있지만, 진지한 고민으로 답을 찾는데에만 몰두 하지 않는 평범한 삶이 진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하며 살아가는 인생철학이 결국에는 모든 삶의 목표들의 종착역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수많은 인연들과 영향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무턱대고 하는 것



    아니나 다를까 요노스케의 최후는 자신의 인생철학을 충실히 실천한 결과였다. 선로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들었던 요노스케의 삶은 "수많은 인연들과 영향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무턱대고 하는 것"이라는 소설의 교훈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요노스케의 홀연한 죽음 속에서 그가 쇼코를 위해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장면이 생각났다. 마치 나는 내 삶을 살 것이라고 주변의 것들에게 선언이라도 하는듯 풍경을 사진 속에 주워담는 그의 모습은 그가 그의 최후를 알면서도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요노스케 어머니의 편지에 있던 이 문구가 지금와서도 와닿는다. 

"울다 보면 그 애 얼굴이 떠오릅니다. 늘 활짝 웃던 그 얼굴이... 친엄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좀 이상할지 모르지만, 그 애를 만난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어디나 있을 법한 정말 평범한 아이였지만 말이예요.... 

아직도 사고를 자주 떠올립니다. 어쩌자고 그 애는 돕지도 못할 상황이었을 텐데 선로로 뛰어들었을까. 그렇지만 요즘에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 애는 틀림없이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거다. '틀렸어, 구할 수 없어'가 아니라, 그 순간 '괜찮아, 구할 수 있어'라고 믿었을 거다. 그리고 이 아줌마는 그렇게 믿었던 요노스케가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 내가 뽑은 명문구 *



- 소중하게 키운다는 것은, 소중한 것을 '주는'게 아니라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그 상황을 '극복' 해 나갈 힘을 가르쳐주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누군가를 상처 준 일이 없는게 아니라, 상처를 줄 만큼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간 일이 없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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