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읽은 건 마누라 때문이었다. <로드>뿐 아니다. 마누라는 가끔씩 읽을 만한 소설들을 던져주곤 한다. 물론 나는 잘 안 읽는다. 대충 몇 페이지 넘기다가 만다. 소설 읽을 만큼 한가한 시간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좀 한가해질 때도 소설은 별로다. 차라리 킬링 타임용 영화를 보는 게 낫다. 요새 vod 티비 달아서 디비디 빌리러 갈 필요도 없다. 물론 그렇고 그런 영화들 보다보면 좀 지겹고, 어쩌다 끝까지 본 영화도 뒷맛이 안 좋을 때가 많다. <색계>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정도 되는 영화라면 모를까.
그런 내가 <로드>를 끝까지 읽었다. 나는 매카시라는 작가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인지도 몰랐다. 마누라가 준 책은 겉껍데기가 홀랑 벗겨진 책이라, 요란뻑적지근한 추천사들이 늘어서 있는 책이라는 것도,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책인지도 몰랐다. 베스트셀러인 줄 알았으면 절대로 안 읽었을 것이다. 내 원칙 하나! 베스트셀러 안 읽는다. 읽더라도 목록에서 빠지고 난 다음에 읽는다. 내 원칙 둘! 자기계발서 절대 안 읽는다. 무슨 책을 봐도 내용 다 똑같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내 원칙 셋! 절대 책 안 산다. 필요한 책 있으면 빌려 읽는다. 요새 지역 도서관들에 웬만한 책 다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원칙 중 두 가지를 깼다. 원칙1과 원칙3.
원칙1은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원칙3은 내가 깼다. 왜냐고? 읽고 난 다음 내 친구에게 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말하다 보니 내 원칙이 참 별 볼일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깰 가치가 있다. 요새 엄청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친구도, 이 책 <로드>도. 사실 내 원칙 중에서도 진짜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원칙2이다. 원칙1은 원칙2와 중복될 때에만 지킬만한 값어치가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물론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 중에 허접한 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광고나 책 소개만 보고 인터넷으로 샀다가 반품하고 싶었던 책이 한 두 권이 아니었다. 그러나 베스트셀러라고 다 그런 책은 아니다. <칼의 노래> 같은 책도 그랬고, 이번에 읽은 <로드>도 그렇다.
그런데 <로드>가 뭐가 좋았느냐 하면, 딱히 이거다 하고 들 만한 것은 없다. 마누라가 슬쩍 흘리고 간 책을 잘못 집었다가 끝까지 안 읽을 수가 없었다는 것, 이건 참 일진이 안 좋은 경우지만, 그런 긴장을 읽는 내내 유지시켜주었다는 것 정도가 장점이라 해야 할까. 할 일이 태산인데, 다섯 시간을 이렇게 보내야 했다니, 정말 한심한 일이다. 그런데도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이 좋아서 나름 보람이 있었다.
읽는 내내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이 궁금했다. 지구가 망조가 들어 여자는 자살하고, 어린 아들 하나 챙기면서 아버지가 바다를 향해 기신기신 가는 이야기다. 가슴이 답답했다. 보통 때라면 나는 그냥 덮어버린다. 나는 공포 영화나 슬픈 멜러 같은 거 절대 안 본다. 왜 시간 써가며 그런 고문을 당해야 하는가. 코메디나 그냥 두드려 부수는 영화가 좋다. 보고 잊어버리는 영화들인데. 보고난 다음에 허망해지는 것만 감당하면 된다.
무섭거나 슬픈 거, 난 별로 안 좋아 한다. 무섭고 슬픈 건 더욱 안 본다. 그런데도 이 소설은 중간에서 덮을 수가 없었다. 왜냐고? 잘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두 사람의 최후가 궁금했던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세상에 도달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지구가 망했다면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냥 통조림 깡통 많은 데에서 그거 뜯어먹으면서 사는 데까지 살아보지 뭘 하러 기를 쓰고 가는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라도 그럴 것 같기는 했다. 세상은 망가졌더라도 뭔가 희망을 향해 움직여야 할 것이니까. 그래야 사는 게 의미 있는 것이 될 테니까. 없다면 만들기라도 해야 하는 것, 그런 게 희망의 본성이 아닐까, 그런 게 있어야 살아도 사는 거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저 막 사는 게 다가 아니라면 사는 듯이 살아야 사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소설을 덮고 나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러다 문득 이혼당하고 빈털터리가 된 친구 생각이 났다. 술 한잔 사주는 것보다 이 책 한권 선물하는 게 낫지 싶었다. 마누라 책을 그냥 줘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이런 정도의 책이면 읽거나 말거나 그냥 꽂아만 놔도 폼날 것 같았다.
아니다,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었다. 이런 험악한 세상 속에서도 발버둥치며 사는 사람들 이야기, 그것도 매우 절제되어 있고, 담고 있는 메시지에 비해 묘사가 간결한 이야기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내 원칙3을 깼다. 나를 위해 산 책이 아니라 깬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건 물론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나를 고마워하지는 않더라도, 내 친구도 나처럼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