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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ㅣ 변호사 고진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평점 :
전 정말 솔직히 매우 놀랐습니다. 사실 도진기 작가의 <붉은 집 살인사건>과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읽고 나서도(안타깝게도 유다의 별을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매우 놀랐기 때문에 이번에는 별로 놀라지 않으려 했는데 정말 작가의 역량이 내가
상상한 범위를 뛰어 넘고 있어 크게 놀란 것이 사실입니다.
제목에도 썼듯이 이제 한국에는 도진기 작가가 있습니다. 굳이 '한국 추리소설에는' 이라는 말을 일부러 쓰지 않았습니다. 굳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묶을 필요도 없이 이 작품은 정말 걸작이고, 작가의 필력이 이제 완숙의 경지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결코 추리소설의 불모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뛰어난 작품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출간되고, 점차
독자층이 넓어진다면 추리소설이 국내의 주류 장르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류 드라마가 아니라 한류 추리소설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읽은 기존 두 작품과 이 작품의 차이가 있다면 확연히 성장한 스토리 라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과거 두 작품의
스토리 라인 역시 결코 뒤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토리 자체가 현재 발생한 살인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도구처럼 느껴졌다면 이 작품은 도리어 잘
짜여진 영화같은 스토리가 작품 전면에 부각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작품이 추리와 드라마가 8대 2 정도 였다면 이번 작품은 추리와 드라마가 4대
6 정도로 분포된 느낌입니다.
'그럼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책은
추리소설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 만들어진 트릭을 가지고 있는 본격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순수한 본격 미스테리 작가들은 트릭에 열광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사회적 배경이나 구성원 간의 갈등을 촉발한 논리적인
설명보다는 어떤 살인사건의 무대를 설정해 놓고 살인자의 살인트릭을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멋진 트릭을 만들어내는데에 치중했습니다.
당연히 범인의 트릭을 뛰어난 두뇌(보통 외모는 형편없지만...)와 추리로 깨버리는 명탐정도 덩달아 인기 캐릭터가 되었죠.
하지만 시대는 갈수록 변하고 있습니다. 사실 추리소설도 그 동안 많이 변화했습니다. 사건자체보다는 왜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논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이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다양한 장르와 콜라보레이션을 이룬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본격 미스테리는 약간의 성형만 했을 뿐 도처에 살아 있습니다. 바로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 한국 추리소설에서
본격 미스테리를 가장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사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작품 역시 아주 뛰어난 트릭이 존재합니다. 이번엔 물리적인 트릭은 당연히 아닙니다만 아마도 읽는 독자 역시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트릭 구사력에 크게 감탄할 거라 자신합니다. 이 정도 트릭은 추리소설의 메카로 자리잡은 일본의 여느 작품들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빛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뛰어난 캐릭터상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개성이 없으면 그 소설은 설 익은
밥과 같을 것입니다. 누가 누군지도 기억도 안나고 그러면 몰입이 될 수가 없겠죠. 하지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마치
영화를 본 것 처럼 또렷이 제 머릿 속에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젠 국민탐정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성장한 어둠의 변호사 '고진'과 국민조수 '이유현'이 멋지게 제자리를 잡아 줌으로
해서 이 시리즈가 장수할 것임을 예고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다 읽고(적은 양이 아닌데 하루에 다 읽어 버렸습니다) 앞으로 국내 추리소설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국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애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토종 명작을 정말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열정과 낭만, 순수와 이념이 지배하던 시대 80~90년대에 발생한 소꿉장난 같은 달리기 시합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자 여러분! 책장을 넘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