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의 여름
이윤희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찬란하게 빛나는,

이윤희 작가의 열세 살의 여름을 읽고

 

 

집 앞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졌다. 그걸 내가 밟고 넘어지면 가을이다.

55일 어린이날은 반팔, 반바지 입는 날, 그때부터 여름 시작.

내가 여름과 가을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186pg)

  

  열세 살, 아직 어리고 순수하여 세상이 다채로운 빛깔로 반짝일 때. 이미 나에겐 십 년도 더 전이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열세 살은 어땠을까?

 

  이 책의 주인공 해원이는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다. 해원이는 여름방학을 맞아 아빠가 출장 가 있는 바다로 놀러갔다가 같은 반 남자아이 산호를 만난다. 이 일을 계기로 해원이는 산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리를 바꾸면서 내심 산호와 앉게 되기를 기대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를 항상 괴롭히는 장난기 많은 우진이와 짝꿍이 된다. 우진이를 좋아하는 려희는 해원이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해원이는 이 사이에서 속상해한다.

 

  단짝친구와 교환일기를 쓰거나, 좋아하는 아이와 짝꿍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거나, 나를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괜시리 나에게 장난을 걸고   짓궂게 대하거나 귀신이 나온다는 빈집에 찾아가는 일, 모두 13살이기에 가능한 사소하고도 빛나는 순간들이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정말 밝고 찬란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기에 더 사랑스럽다.

 

  만화의 그림체는 어찌 보면 투박하고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더 일상적이고 공감이 된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감정은 없고 만화이기에 가능한 일 또한 없다. 그저 나의, 또 모두의 과거라서 더 매력적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열세 살의 그 날로 돌아가, 해원이와 같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책을 덮고 과거의 나라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아마 그 때의 나라면 지금 이 일상 속의 작고 소소한 순간들을 더 크게 느끼고, 더 다채로운 색으로, 더 찬란한 시각으로 보았으리라. 집 앞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밟고 넘어지는 순간으로 가을을 기억한다는 해원이처럼, 나 역시도 내 일상 속 순간순간을 더 의미 있게 생각하는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에 빠질 때 나누는 말들 사계절 1318 문고 119
탁경은 지음 / 사계절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시절, 가장 아름다웠던 나의 청춘에게

사랑에 빠질 때 나누는 말들을 읽고

 

반가워, 동주야. 나를 새롭게 소개할게. 어제까지의 나를 잊고 지금의 나를 새로 바라봐줄래?

나는 엄마 칭찬과 성적에 목숨 거는 아이였어. 그래서 치열하게 공부했지. 운 좋게 성적도 괜찮았고. 그런데 지금은 성적만큼 소중한 게 많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 것 같아. 나는 애들이 연애하고 사귀는 거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었어. 지금은 친구들이 연애한다고 고백해오면 두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아. 나는 남자들을 잘 믿지 못했어.

그런데 동주야. 지금 나는 너를 보고 있어. 지금 너의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나를 다시 발견하고 있어. 그리고 동주, 너를 믿어. (119pg)

 

 

  누구에게나 반짝이던 학창시절은 있다. 아주 작은 기억의 편린일지라도, 분명 찬란하게 빛나던 과거의 한순간.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작품은 17, 고등학교 1학년 민서현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고등학생 하면 으레 떠오르는 밝고 사랑스러운, 혹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연애에 목숨을 거는 청춘드라마의 여고생들과는 달리, 서현이는 벌써부터 수시 원서를 위한 생활기록부 활동을 챙길 정도로 똑부러지고 확실한 성격의 당찬 아이이다. 학교 소논문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학교 제일의 왕자님, 잘생기고 상냥하고 공부도 잘하는 강동주에게 고백을 받기도 하지만 서현이는 오히려 당황스러울 뿐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냥 평범한 로맨스 소설의 줄거리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독특하고, 중요한 부분은 바로 여기서부터이다. ‘사람을 범죄로 만드는 것은 유전자일까, 성장 환경일까?’라는 주제로 이루어지는 소논문의 자료조사를 위해 서현이는 소년교도소의 수감자 현수에게 편지를 보낸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쉽게 보낸 편지였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현이는 사람을 마음으로 만나고 진심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동주와의 관계도, 현수와의 관계도, 또 부모님과의 관계도, 모두.


  꿈과 미래, 성적 등,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청소년기에 서로 지지해주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란 얼마나 소중한지. 앞으로도 서현이가 풀어나가야 할 실타래들은 많겠지만, 그 무엇도 서현이는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어제보다 오늘 더, 서현이는 성장해있을 테니까.

  책을 덮으며 아름다운 청춘의 한 페이지 속에 있는 서현이가 조금은 부러워졌지만, 그래도 나도 멈춰서서 서현이를, 혹은 나의 과거의 편린을 그리워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설레고 반짝이던 나의 과거를 내가 기억하는 만큼, 나의 현재도 빛나고 있을 테니까.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지금의 나도 아름다운 페이지로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폐허를 돌아보는 여정,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를 읽고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259pg)


​ 제발트의 소설은 아주 쉽사리 잘 읽히는 편은 아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가듯, 다양한 이야기들이 곁다리처럼 얽히고 얽혀, 커다란 서사를 이루어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내용을 담았을까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배경지식이 가득한데, 그걸 또 난잡하게 적어놓았다기보다는 섬세하게 적어놓았다고 표현하고 싶다.


 1992년 8월, 소설의 화자는 고대 왕국이 있던 영국의 동남부지방을 여행하고, 그 과정에서 이미 발생했거나 장차 도래할 대재앙의 증인들을 만난다. 제국주의가 남겨놓은 유대인, 노예화된 민족, 문명의 흐름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 파괴된 숲, 몰락한 도시.... 왠지 모를 공허함에 떠난 여행에서 화자는 생과 사, 종교, 전쟁과 희생까지... 다양한 영역으로 생각을 확장시키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인류가 파괴한 폐허부터 인간이 저지른 과오까지 돌아보는 여정은 조금 외롭고, 쓸쓸하고, 묵직하다. 읽다보면 나의 기분도 자연히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책장을 넘기며 계속 생각했다. 바람직한 삶이란 무엇인지.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렇기에, 이 화자와 함께 떠나는 소설 속 여정은 마치 내 삶의 여정같기도 했다.


 이것은 분명 소설이고, 에세이나 여행기가 아니기에 어디까지나 허구적인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중간중간 나타나는 그림들, 섬세한 묘사, 역사적 사실들은 마치 이게 진실이라고 내게 말하는 듯하다. 읽고 나서도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던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들어오지 마시오 사계절 1318 문고 118
최나미 지음 / 사계절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열리는 순간, 나를 만나는 시간

「아무도 들어오지 마시오」를 읽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동안 고여있던 내 시간이 갑작스럽게 균형을 잡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나는 그렇게 잠시 어지럼증을 견뎌야 했다.​​ (178pg)

 

 사람은 타인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알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모두 다른 타인과 마음으로 만난다는 건 사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석균이는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이 아주 서투른 아이이다. 자기 자신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에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조금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면모가 있어도,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주는, 나를 사랑해주는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홉 달 전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모든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스트레스로 인한 섭식장애, 일로 바쁘신 아버지, 우리집에 세들어 살게 된 알 수 없는 할머니, 여기다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까지- 석균이의 신경은 날카로워지기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어려워하는 석균이를 진정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생판 모르는 할머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영역을 어지럽히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싫은 사람일 뿐이었지만, 반대로 나의 환경도 상황도 전혀 모르는, 갑자기 우리 집에 쳐들어온 알 수 없는 할머니기에, 석균이도 솔직하게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석균이가 모든 걸 알게 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장면은 할머니의 말마따나 대견하고, 부럽기까지 했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묵은 말을 풀어헤치고, 말의 가시를 뽑아 새로이 관계 맺어나가는 용기는 얼마나 가련하고 애틋한지. 이들은 아마 과거를 헤집다, 이윽고 언젠간 길을 바로잡고 미래로 한 걸음씩 내딛을 것이다.

  연욱이와의 얽히고 설킨 실타래도, 아버지와 해야할 이야기도, 석균이에겐​ 아직 풀어나가야할 과제가 많다. 그래도 이젠 두렵지 않을 것이다. 석균이는 이제 스스로 이야기해나갈 수 있을테니까.

 ​인간관계에 정답은 없다지만 과거에도 지금에도, 언제가 되더라도 균형을 잡는 것은 어렵다. 언제가 되면 쉬워질까? 나도 석균이처럼 내 실타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지막 히치하이커 - 제4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수상 작품집 사계절 1318 문고 117
문이소 외 지음 / 사계절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봇, 인공지능, 빅데이터, 4차 산업혁명. 하도 많이 들어 익숙해진 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참으로 낯설기만 한 단어들이다. 현실감이라고는 없이, 남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 진다. 로봇과 공존하는 세상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 두려움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왔다. 과연, 미래 사회의 우리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까?

 

분명 시대가 변했음에도, 로봇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나는 여전히 삐걱거리고 초점이 없는 눈의 로봇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로봇들은 다르다. 참으로 인간적이며 로봇답지 않은 로봇들이다. 로봇이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차에 치이거나, 떡볶이를 만들어 먹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어쩌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로봇이라고 못할 까닭도 없는 노릇이다. 마치 어린아이의 걸음마를 목격하듯이, 처음으로 로봇이 어색하게 떡볶이를 먹는 순간은 어머니와 같은 미소를 띠고 지켜보게 된다.

 

분명 로봇은 데이터가 입력된 그대로만 행동해야할 텐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로봇들은 분명 학습하고 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그저 기계적인 반응만 보이던 로봇이 점차 경험이 늘어나고 인간을 가까이하면서, 더없이 인간적인 감정에 공감하고, 또 인간이 그러하듯이 경험을 토대로 감정을 학습하고 성장하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경이롭다. 그들이 감정을 느끼고 한 걸음 내딛어 성장하는 순간, 그 순간만은 인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로봇에게서 인간적인 부분을 보게 된 순간, 그 순간만은 로봇은 단순히 냉정한 고철덩어리일 수가 없게 된다.

 

시대가 변하고 미래과학기술은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발전하기에 우리는 분명 언젠가 로봇과 일상을 공유하는 미래를, 머지않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과연 그때의 우리는 어떨까? 로봇과 함께하는 미래는 기대되는 만큼이나 어쩌면 조금 긴장되기도 하지만, 이 소설 속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인간적인 로봇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미래가 무섭지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