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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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야는 자기가 봤던 그것을 믿었다.

열몇살의 자기와 스물몇살의 자기는 공존한다고,

열다섯살의 이제야와 열여덟살의 이제야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살아서, 스물다섯살의 이제야, 스물일곱살의 이제야를 보고있다고 믿었다.

열일곱살의 이제야가 보고 있을 어른 이제야를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

서른다섯, 서른아홉, 마흔일곱, 쉰아홉살의 자기를.

세상 어딘가에서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어리고 젊고 늙은 이제야를. (233pg)


최진영 작가의 '이제야 언니에게'.

별자리가 그려진 밤하늘의 표지를 보고, 나는 당연히 '언니'에게, '이제서야', 비로소 할 수 있는 말, 어떤 고백일거라고 믿었다.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 아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고백이기도 하다.

기나긴 시간을, 세월을 넘어, 이제서야 보이는 미래, 저 너머에게 손을 내미는 고백은 분명 정답이었다.

'이제야'가 그 주인공이고 당사자이며 스스로의 미래에게 건네는 악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제야는 성폭행 피해자이다.

제야에게 과거의 시간은 결코 지나간 시간이 될 수 없고, 묻을 수 없는 기억이며, 도려내고 싶지만 도려낼 수 없는 순간이다.

부끄럽지 않았고, 부끄러워해야만 하는 것은 가해자임을 명확하게 알고 있음에도,

정말 내가 문제인가, 내가 잘못인가, 나의 존재만이 오점인가,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 검열.

모든 게 연기같고 2008년 7월 14일 그날의 기억만 진짜인 것 같은 현실,

위로받고 이해받아 떠오르더라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과거와의 만남까지도.


최진영 작가가 예리하게 그려낸 현실 속에서는 문장들이 살아 숨쉬고,

그 속에서 제야는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게 이토록 중요하다.

살아 숨쉬어 미래를 만나, 쉰아홉살의 자기를 끌어안고, 또다른 이제야를 만나 안아줄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

 

 

- 어째서 부끄럽지 않고 고통스러운지. 당신들이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그 모든 것들, 설명을 요구하는 그 모든 의심들, 설명해봤자 핑계나 변명으로 듣는 걸 알아.

어째서 내가 변명을 하나. 변명은 가해자가 하는 것 아닌가. 당신들에게 나는 가해자인가.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건 내 감정이 아니다.

내겐 아무 잘못이 없다. 아무 잘못이 없다. (51pg)

 

- 당숙이 그러기로 마음먹는다면, 오늘이 아니라도 앞으로 마주칠 숱한 날 중 어느 날, 제야는 당했을 것이다. 

 (중략) 당숙은 제야를 강간한 게 아니라 여자를 강간한 것이다.

여자 중에서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여자.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여자.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여자.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자.

남들한테 얘기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여자. 그래서 또다시 강간할 수 있는 여자.... 미성년자인 친척 여자.

제야는 그 조건을 충족시켰다. 제니도 마찬가지였다. (109pg) 


- 그 날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날 그 일이 없었어도 그는 분명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207pg)


- '젊은' '여자' '혼자' 중에 사람들을 가장 세게 건드리는 단어는 뭘까. (219pg) 

 

- 여행하는 동안 깨달았어. 나조차 그들의 시선으로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판단할 때가 많다는 걸. 무슨 뜻인지 알겠니?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이 쌓일 수록 나는 나를 의심하게 되었어. 내가 그럴 만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몰아세웠어.

내가 겪은 사건만큼 나란 존재 자체가 너무 끔찍했지.

끔찍한 나는 그런 일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잖아, 그 일 이전에는 나는 나를 끔찍해하지 않았어.

원인과 결과가 자꾸 역전되는 거야. (223pg)


​- 제야는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걸었다. 때로는 달렸다.

미로의 길을 다 걸어야 할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출구에 닿을 것이고, 이제 제야에게는 출구가 중요하지 않았다.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걷는 동안 들여다보는 자기 마음이 중요했다.

언젠가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으로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들이 무릎을 세우고 일어설 수 있도록, 왼쪽 벽에 손을 댈 수 있도록, 그들의 오른손을 잡고 싶었다.

그리고 평생, 타인의 마음을 바라보는 눈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제야는 정말 그러고 싶었다. (232-233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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