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주의 영화 - 공선옥 소설집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켜켜이 내린 눈 위에 또 눈이 내리고 온기 없는 햇볕 아래 눈은 날카롭게 굳기만 할 뿐 녹지는 못한 채로 먼지가 덮이고......
그런 채로 세월은 흐르고......
그랬는데, 절대로 녹을 일이 없을 것 같던 눈이, 옴짝달싹할 수 없게 천지사방을 에워쌌던 그 딱딱하고 날카로운 눈이 스르르 무너지고
무너진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50-51pg)
사양이 비끼는 휴게소 유리문에 오후 다섯시의 흰 달이 언뜻 비쳤다가 윤이 문을 열자 사라졌다. 곧 해가 질 것이다. (72pg)
공선옥 작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직도 단편소설 '일가'이다.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렸더랬다. 가족간의 관계, 이제는 얇디 얇고 얄팍한 관계가 되어버린 가족의 경계와 그 모습.
수업시간에는 성장소설로서 다루고 1인칭 주인공시점을 말하느라 바빴지만,
정작 그 소설을 통해 내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싶었던 건 문장마다 전해지는 섬세한 감정선이었다. 사춘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그 누군들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만큼이나 여전하게, 소설 '은주의 영화'도 그런 설렘을 가지고 읽었다.
여전히 날카롭고 예리하게 삶을 담아내고 있어서 그저 신기했다.
총 8편의 작품이 실려있고, 5.18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작품부터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룬 작품까지,
다양한 상황 속 여러 아픔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저마다의 매력이 있지만
정작 내 마음에는 '오후 다섯시의 흰 달'이 가장 깊게 박혔다.
오후 다섯시의 흰 달.
윤은 25년전, 어린이집 차가 펑크가 나면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진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동시에 잃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요양원에 계시고, 딸이 독립한 뒤로 윤은 줄곧 혼자이다.
신록에 눈부셔하는 자신이 죄스럽지만, 그럼에도 윤은 살아간다.
그러던 중 사촌누이 경자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옆집 살던 이의 아이를 한 달만 잠시 맡아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윤은 아이를 맡게된다는 생각으로, 잊고있던 가족에 대한 마음과 희망을 떠올린다.
아이를 맡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레시피를 찾아보고 동화책과 그림책을 주문하고,
더 나아가 양자로 들이겠다는 꿈에 부풀어있는 윤이지만
경자는 곧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데려가기로 했다며, 윤이 데려갈 필요가 없게되었다는 무정한 전화를 남긴다.
윤은 버스가 출발하기 오분 전, 다섯시 정각, 아이를 납치할 생각을 하다가 담배를 사러 휴게소 안 편의점으로 들어가고 소설은 끝이 난다.
모든 생기를 잃고 살아가던 이가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한 아이에게 겹치며, 그 아이에게 모든 걸 걸고 기대하는 순간은,
또 그 모든 기대가 좌절되고 눈앞에서 부서지는 순간은 어떤지.
다른 작품들 역시도 삶이고 이야기였지만 이 단편이 가장 의미있었던 건, 윤이 감내해야만 했던, 또 앞으로 삼켜낼 시간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감정을, 특히 아픔을 선명한 색채로 그려내고 절절히 공감하게 하는 게 공선옥작가의 힘이 아닐까.
한 번, 두 번, 곱씹을 수록 더 생각나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