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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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일까? 멀고 먼 바다일까? 아주 먼 곳에 있는 산일까? 오늘 용징에 불어오는 바람은 발트해에서 출발한 바람이고 백악관의 방습 상자에서 출발한 바람이고 양타오 과수원의 나뭇가지에서 출발한 바람이었다. 바람은 한 겹 한 겹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용징 한 가운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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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는 이런 소설을 보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마냥 무서워 했다. 상상으로 그려내는 그 이미지에 두려워하고, 책장을 넘기기를 주저했다.

지금은 그 너머의 것들이 보인다. 폭력적인 정권의 독재,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학살당하는 약자들. 그 속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가는,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개인의 삶이.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 SF.
그 어떤 장르의 옷을 입고 있더라도 작품들이 하는 이야기는 결국 한곳으로 모인다. '우리의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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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울음, 하마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작가 천쓰홍. 그가 줄곧 쓰던 용징에 대한 이야기가 더해져 『귀신들의 땅』이 되었다.

천씨 집안의 일곱 남매, 그리고 막내아들 톈홍.
다섯 딸을 낳은 끝에 태어난 두 아들. 가족, 그리고 끝나지 않는 비극.

묘하게 예전에 읽었던 홍콩 소설 『13.67』이 떠올랐다.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뒤섞인 시간 속에서 글이 진행될수록 독자는 퍼즐을 맞춰야만 하는.

겨우 몇 조각이 남을 때까지 그 큰 그림을 보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그림이나, 그 조각들이 제 모습을 찾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온다. 다시 책장을 처음으로 넘겨야만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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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에서 타이완의 '동지(同志) 문학'에 대한 설명을 보았다. 오래전부터 탄압받던 타이완의 성소수자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을 동지 문학이라고 부르고, 천쓰홍 작가 역시 그 동지 문학을 이끌어가는 이들 중 하나라는.

국내에 출간된 첫 타이완 문학, 『귀신들의 땅』. 독일 베를린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 큰 상을 받았으며, <뉴욕 타임스> 같은 곳에서도 극찬받은 작품이기에 이렇게 한국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궁금하다. 그가 쓴 다른 작품들이.
또 다른 타이완 작가가 쓴 글이, 동지 문학이.

언젠가는 한국에서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원래는 다 쓰고 나면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게 될 줄 알았는데 마지막 한 문장을 쓰고 나서도 (...)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나의 몸을 살펴보았다. 피부와 뼈와 살이 시야 속에서 천천히 흐려지더니 점차 투명해졌다." _p.497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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