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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이스 1 ㅣ 아이네이스 1
베르길리우스 지음, 김남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평점 :
<아이네이스>가 이렇게 문학적인 작품이었는지 미처 몰랐다. 진심으로 감탄하며 읽었다. 고전은 이래서 고전의 반열에 드는구나 생각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의 존재만으로도 고대 로마의 문학이 희랍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네이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에 비해 저평가되어있고 비교적 덜 알려져 있기는 하나, 삶에 대한 통찰과 직관, 은유와 묘사, 표현하는 정서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호메로스에 비견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아이네이스>는 ‘아이네아스의 노래’라는 뜻으로, 로마 건국의 역사를 노래하는 대서사시이다. 아이네아스가 멸망하는 트로이아에서 도망쳐 나와 역경과 고난을 거치며 라티움 땅에 정착해 로마를 건국하기까지의 역사 그리고 신화를 담고 있다. <일리아스>는 희랍의 시점에서 트로이아 전쟁과 그 영웅 아킬레우스에 관하여 노래하는데, <아이네이스>는 시점을 트로이아로 옮겨 와 <일리아스>에서 미처 다루지 않는 전쟁의 결말과 트로이아의 멸망에서부터 출발한다. 총 12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말로 번역된 <아이네아스 1>은 그 중 1권에서부터 4권까지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2권과 4권이다. 트로이아가 희랍군의 계략에 속아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는 2권의 시작 장면에서부터 독자는 그 결말을 예감한다. 시인은 헥토르를 소환해 그 비극적 최후에 대해 암시한다. “… 흐트러진 수염, 핏덩이와 단단히 엉킨 머리털, / 상처투성이 온몸, 조국의 성벽을 끌려다니며 / 상처 입은 그대로가 아닌가!”(2권 279행-281행)
그리고 뒤이어 묘사되는, 한때 번영했던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의 몰락은 애상감을 자아낸다. “검은 밤이 빈 어둠으로 날고 있었다. / 누가 그 밤의 참상을, 누가 그 밤의 죽음을 말로 / 형언하거나 고통의 값만큼 울어줄 수 있을까? / 수많은 세월 군림하던 옛 도시는 사라졌다. / 골목마다 수많은 목숨들이 힘없이 여기저기 / 죽어 누워 있었다. 집집마다, 신들을 모시던 / 문턱마다.”(2권 360행-365행). ‘검은 밤이 빈 어둠으로 난다’는 표현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한편, 저항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황임에도 어떤 이들은 끝내 영예로운 죽음을 택한다. 이들의 저항은 숭고하면서도 덧없고, 덧없으면서도 지극히 숭고하다. ‘옛 어른들의 자랑거리였던 황금 서까래’마저 떼어 내 던지고, ‘노인(프리아모스)은 한동안 놓았던 무장을 세월에 떨리는 어깨 위에 하릴없이 걸쳐 입고 무기력한 칼을’ 두른다. 그가 침략자의 손에 잔혹하게 죽음을 맞이하여 ‘무명의 시신’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시인은 담담히 노래한다. 오로지 이러한 종류의 작품에서만 가능한 숭고미와 비장미를 보여주며 짙은 여운을 남긴다.
4권은 디도의 불행한 사랑 이야기이다. 디도는 아이네아스를 사랑하게 되지만, 새 나라를 건국할 운명을 짊어진 아이네아스는 신들의 명을 받들어 디도와 그녀의 나라를 떠나야 한다. 4권의 첫 시행부터가 압권이다. “여왕은 벌써부터 간절한 근심에 시름하며 / 속으로 상처를 키워 남모를 열기에 시들었다”(4권 1행-2행). ‘열기에 시든다’니, 이런 표현이 정말이지 기원전 19년경의 작품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묘사는 또 어떠한가. “사제들의 애통한 무지여! 기도는 애욕에 무얼, / 신들은 무얼 도운 건가? 광염은 골수에 사무쳐 / 그새 가슴속 감추어진 상처는 깊어져 갔다. / 불행한 디도는 불타올랐다. 온 도시를 헤매어 / 광염에 시달렸다. 마치 화살을 맞은 사슴처럼. / … 사슴은 도망쳐 딕테 산속을 / 헤매 다닌다. 죽음의 갈대를 옆구리에 매달고.”(2권 65행-74행). 시인은 자기파괴적인 사랑의 열병과 비탄을 강렬하면서도 더없이 쓸쓸하게 묘사한다. ‘만가를 부르며 때로 곡하며 목 놓아 한없이 울어 대는’ 지붕 위의 올빼미(2권 464-465행) 같은 문학적 장치들도 몹시 세련되다.
가급적 열린책들 판본으로 읽기를 권한다. 라틴어의 ‘여섯 걸음 운율(헥사메타)’를 살려 운문으로 번역한 덕에,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시적인 묘사가 번역에서도 가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물의 이름 또한 운율에 맞추기 위해 세 글자 내외로 왜곡되므로, 익숙하지 않은 경우 헷갈릴 수 있다. 아이네아스 또한 ‘에네앗’으로 서술된다. 신들에게는 심지어 여러 개의 이름이 부여되기도 한다. 베누스(Venus) 여신은 ‘퀴테레’라 불리기도 하고, 그의 희랍 이름은 ‘아프로디테’이다. 인명 등에 대해서는 책 말미에 있는 ‘찾아보기’를 적극 참조하면 좋다. 각주가 세심하게 달려 있어 상황과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출판사 지원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