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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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고통이 사라지자, 인간은 다시 고통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중독성과 부작용이 없는 완벽한 진통제를 보급하는 제약회사와 고통을 숭배하는 신흥 종교단체. 교단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며 제약회사를 테러한다. 테러사건 후 잠잠해진 교단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온몸이 고문 흔적으로 가득하고 체내에서 다량의 약물이 검출된 채 죽은 교단의 지도자들.

이 사건을 둘러싼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독특했다.

경 : 홀로 경, 날렵할 현, 산뜻할 현, 우아하다, 단단하다, 홀로, 고독하다
현 : 흐를 현, 넓고 깊을 현, 이슬 빛날 현
태 : 날카로울 예, 창 태, 날카롭다, 용맹하다
한 : 태의 형, 들개 한, 야생 개 간, 감옥 안
욱 : 교단의 추종자, 슬퍼할 욱
엽 : 빛날 엽

읽으면 읽을수록 한 글자의 단순한 이름에 인물의 속성을 모두 담아냈음이 드러난다. 이들은 자라온 환경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속성을 지니게 되었고 고통에 관한 가치관도 모두 상이하다.

특히 ‘태-경’ ‘경-현’ 이 두 관계가 흥미로웠다.
테러사건의 범인 태는 교단에 헌신하며 남들에게 무자비하게 고통을 가하는 한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 또한 교단에 속해있으면서도 교리 외의 영역에서 고통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으려 했다.
부모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한 경은 테러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후에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태를 보며 망가졌더라도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지만 현과 재회한 후 깨달았다.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다르다는 것을. 그래서 경은 태를 떠나고 현과 함께 삶의 목적을 찾는다.


SF소설이지만 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사이비 종교, 약물 투약, 가정 폭력, 동성 결혼에 대한 차별 등 현사회에서 마주하는 고통들과 이러한 고통을 거창하게 여기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사람들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우리 인생에는 당연히 고통이 있어야 한다는 듯이.

마지막 장을 덮은 후 “고통을 경험하고 극복해야만 초월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는 이와 반대로 고통에 삶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다고 말한다. 고통은 단지 고통일 뿐이다. 경과 현이 그랬듯이 이제 지나간 고통은 모두 과거에 남겨두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할 때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왔던 ‘고통’이라는 감정을 복합적으로 풀어내 처음엔 어려웠으나 점차 인물들의 서사에 빠져들면서 내가 생각하는 고통과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되는 소설이다.

📖 (p.128)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 (p.285)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 (p.291) 물리적으로 감각하는 모든 정보를 신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마음은 그것을 고통이라 정의했다. 그러므로 기쁨도, 환희도, 초월도, 아마 구원조차도, 인간이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 때는 모두 고통이었다.

📖 (p.302) 비일상적인 삶의 경험과 강렬한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과 즉각적인 유대감을 맺기는 불가능했다. 고통과 고통의 탐색은 오히려 경을 타인으로부터 고립시켰다.
고통의 탐색에 매몰되면 결국 과거의 고통을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그 고통으로 돌아가 결국 다시 그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던져야 할 질문들을 모두 던지고 나면 같은 질문에 더 이상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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