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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 마셔
한은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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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을 잘 모른다. 그래서 술 에세이를 좋아한다. 술을 더 알고 배우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밤은 부드러워, 마셔』는 무려 48가지의 알코올 이야기가 담겨 있다기에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은형 작가는 ‘술이 밤의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 술을 각별하게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읽다 보면 정말 술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술 박사’라고 느껴진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술이 나올 땐 이름을 검색해 그것의 생김새와 색을 확인하고 읽었다. 그렇게 식전주와 모닝주, 무알콜 맥주, 오렌지 와인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또, 작가의 방대한 지식에 감탄했다. 각국에서 어떤 술을 즐기는지, 어떻게 제조되는지, 특히 <위대한 개츠비>나 <모비딕>, 영화 <007> 등 익숙한 고전 얘기가 나올 때면 눈을 반짝이며 읽었다. 여기서 작가는 술과 문학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걸 느꼈다. 이 책의 제목을 짓는 과정에서도 스콧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의 영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술과 문학, 그 두 개가 만나면 매력이 극대화되는 것 같다.

그걸 확실히 느꼈던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독서모임 마지막 회차였던 날, 화이트 와인을 처음 마셔보았다. 책과 와인이 만나니 그 공간에 있는 모든 걸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다. 와인의 맛 뿐만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까지!
그 때 이후로 뭐든지 찬찬히 곱씹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술을 시도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달든 쓰든 내 예상보다 맛이 없든 새로운 걸 하나 또 맛보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에필로그에서 만난 한은형 작가의 속마음은 나와 비슷했다. 술자리에서 말하기보다 듣기를 좋아한다고. 오랜만에 만나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내가 몰랐던 그 세계가 알고 싶고, 또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게 좋아서 그렇다고. 오히려 본인이 말하는 걸 좋아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한다. 말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아무 말이나 뱉지 않고 ‘고요보다 못할 말이라면 그냥 입속에 두는 것’을 택하는 그와 마주앉아 술자리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신중하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라면 몇 시간이고 듣고 싶다.

“알고 들으니 다르게 들린다. 이전에는 몰라서 신비했다면 이제는 알아서 신비하다.(p.12)”는 작가의 말처럼, 이제 작가의 술 세계를 알게 된 이상, 술을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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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31-32) 세상에 이렇게나 다양한 맥주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맥주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맥주를 모아 놓은 매장에 서서 다양한 국적과 생소한 이름의 맥주를 보고 있으면 말할 수 없이 부풀어 오른다. 마치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에 서서 어떤 책을 살지 고민하는 순간처럼 말이다.

📖 (p.47) 와인을 마실 때는 와인의 정취가 있고, 맥주를 마실 때는 맥주의 정취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맥주를 마시면 한없이 명랑 쾌활해지고, 와인을 마시면 말을 줄이게 되고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 들까? 어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와인은 그래서 그저 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생각을 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쓰게 하고, 읽게 한다.

📖 (p.139) 나는 남자든 여자든 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끌린다. 그게 술이든 뭐든 배울 게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술이라면 더 좋지 않나 싶다. 그 사람들 앞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면서 그들이 풀어놓는 술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여야겠죠?

📖 (p.240) 시시각각 변하는 대기 현상과 그에 따라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 나의 기분에 기대어 고른다. 그게 술이든, 다른 무엇이든. 타이밍이다. 술에도 타이밍이 있다고 생각한다. 술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일치하는 때라고 해도 좋다.

📖 (p.312) 바텐더는 바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루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고, 하루 중에서도 밤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마음에 대한 최고의 기술자랄까. 예약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정신 상담소일 수도 있다.

📖 (p.315) 목소리를 타고 전해지는 말을 듣고 있으면 역시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고요에는 말이나 훨씬 풍부한 것들이 깃들어 있어서, 고요보다 못할 말이라면 그냥 입속에 두는 게 좋다고도 생각해 왔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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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 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 Philos 시리즈 23
네이딘 스트로슨 지음, 홍성수.유민석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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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

온오프라인에서 시도때도 없이 내던져지는 혐오표현은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이고 어느 정도까지 처벌 대상인지 그 경계가 늘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매우 주관적이다. 미디어에서 대중적인 누군가를 따라하는 행위를 두고도 패러디다, 희화화다, 의견이 갈린다. 이 논제는 양극화와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며 법의 강제성이 과연 효력이 있을까 의문만 품게 만든다.

이에 대해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변호사 네이딘 스트로슨은 혐오표현에 반대하지만 혐오표현을 검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평등과 자유 모두를 가장 잘 보호할 해결책을 제시한다.

먼저, 저자는 ‘혐오표현금지법’의 역기능에 대해 서술한다. 혐오표현금지법은 광범위한 표현을 자의적이고 주관적으로 판단할 권한을 정부에 부여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는 반대 의견, 대중적이지 않은 발화자, 권력이 없는 집단을 침묵시키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검열’은 표현의 자유와 평등을 저해하며 일부 차별적 표현을 더욱 숨게 만들어 혐오를 감시할 기회조차 잃게 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저자는 비검열적 방식 ‘대항표현 전략‘을 제시한다. 대항표현은 동의하지 않은 메시지에 대항하는 모든 표현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혐오표현이 전달하는 사상을 직접적으로 반박하는 표현,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교육 계획, 차별적인 발언을 한 사람의 반성 표명 등으로 혐오에 대항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것이다.
즉, 저자는 혐오를 잠재울 방안으로 대항과 침묵하지 않을 권리를 택함으로써 차별적 언행의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법은 사회 구성원 모두를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속임일뿐, 결코 약자의 편에 서주지 않는다. 그런 법을 비판하고 기꺼이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대항하겠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성소수자의 섹슈얼리티가 죄악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으로 비난받고, 이들을 비판하는 자들은 종교적 혐오표현으로 비난받는다. 이렇게 끝없는 비난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혐오’는 모두가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며, 더이상의 침묵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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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86) 나는 우리가 이룬 진보에 만족하고 우리의 영예에 안주해야 한다고 제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이유인 자유, 평등, 민주주의는 물론 개인적 행복, 사회적 화합과 같은 중요한 목표를 위해 계속 싸우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강화하기 위해서, 지난 수십년의 긍정적인 조치들에 주목한다.
더 적은 표현이 아니라 더 많은 표현을 통해 우리가 이미 이룬 진전들은 우리가 이 과정을 계속하도록 격려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중요한 대의를 촉진하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즉, 침묵하지 않을 권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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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 18 미생 (리커버 에디션) 18
윤태호 지음 / 더오리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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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바둑에서 집 또는 대마 등이 살아있지 않은 상태나 돌을 의미한다. 완전하게 죽은 돌인 사석과는 다르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미생』은 주인공 장그래의 미생이다. 바둑기사로서는 실패했지만 원 인터내셔널에 입사해 난관을 극복해가는 과정, 그리고 계약기간 동안 ‘완생’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즌 1은 장그래 개인이 원 인터내셔널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야기였다면, 시즌 2는 장그래와 동료들이 새로 뭉친 온길 인터내셔널이 살아남기 위한 이야기다. 즉 회사에서 창업으로 외연을 확장시킨다.

시즌 2의 주제는 요르단과 세계를 무대로 한 ‘출장’이다. 그리고 이 18권은 해외 출장 스토리의 시작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장그래를 비롯한 온길 인터 직원들은 원 인터의 대기업 인프라 속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다. 해외 지사 등이 잘 갖춰진 대기업의 품을 떠난 온길 인터 사람들은 빠듯한 출장 예산을 쪼개고 각종 보험을 알뜰살뜰하게 챙기며 해외 시장을 뚫기 위해 맨땅에 헤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시나 여러 난관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요르단 현지 업체 중 가장 내실 있고 탄탄한 업체가 거래를 거절한 것. 한국 업체와의 거래에서 거액의 사기를 당한 적이 있었던 탓이다. 그 배후에 원 인터 시절부터 시작된 오랜 악연, 박 과장이 있음을 알게 되며 끝이 난다. 이들이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요르단 업체의 신뢰를 어떻게 얻어낼지 다음 권이 기다려진다.


이제껏 드라마나 원작을 본 적도 읽은 적도 없는데, 단행본 한 권을 읽기만 해도 장그래를 비롯한 인물들의 서사와 회사의 내부 사정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환경의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열정들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배경과 인물들이 현실적인 덕분에 공통된 두려움과 불안, 상념을 나눌 수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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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는 요일 (양장) 소설Y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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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완독한 <네가 있는 ___요일>✨
소설 설정부터 매우 흥미롭다. 일곱 명씩 보디메이트(body-mate)로 묶여 하나의 신체를 요일별로 공유하는 인간 7부제의 시대. 일주일에 하루를 제외한 6일 동안은 가상 현실 낙원에서 생활한다. 실체는 데이터 센터에 보관된 뇌 안에 들어 있고 서버를 통해 낙원에 접속해 스스로가 상상하는 대로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원수 지간이었던 지나와 울림은 같은 신체를 각각 화요일과 수요일에 사용하는 보디메이트가 되는 바람에 관계가 더 악화된다. (술을 진탕 먹은 몸을 울림에게 넘겨 주는 등 온갖 진상짓을 하는 지나..) 재력 있는 집안이라 7부제로 살아갈 필요 없는 ‘365’였던 지나는 울림 때문에 자신이 7부제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울림을 계획살인한다. 울림의 물 공포증을 이용해 스쿠버 다이빙 하기 직전에 울림을 신체로 불러낸 것. 지나는 다이버까지 꾀어내 결국 울림을 익사시킨다.

공유 신체를 잃은 채 ‘혼‘이 되어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시각을 점차 잃게 생긴 울림은 지나의 계획살인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나선다. 그 과정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강이룬을 ‘무재’라는 바뀐 이름으로 만나게 된다. 과거에 갑자기 사라져버렸던 무재의 진실과 사랑의 기억을 되찾기 위한 지나의 여정. 그 끝은 어떻게 될까.


탄탄한 세계관과 섬세한 설정들 하나하나에 몰입하면서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함께 고민했다. 아무리 풍요로운 낙원이라도 그곳에 나 혼자라면, 사랑하는 이들이 없다면 ‘낙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주일 중 오직 하루만 오프라인에서 실체로 생활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면 주저없이 택할 것 같다. 설령 쫓겨다녀야 하더라도.

이 소설을 읽기 전엔 제목의 빈칸을 채워보려 했다. 네가 있는 ‘무슨’ 요일이 좋을까 생각하며. 하지만 빈칸을 채울 필요가 없어졌다. ‘네’가 있다면 무슨 요일이든 상관 없을 거니까.
“네가 거기 있으니까. 네가 있는 요일에 나도 매일 있고 싶으니까.” 지나가 무재에게 건넸던 낭만적인 고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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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15-216) 시계의 분침이 시침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주 살짝 자리를 옮겼을 뿐이고, 창밖의 풍경 역시 하나도 달라진 게 없지만, 울림은 낯선 세계에 온 기분이었다. 목요일이라는 세상에.

📖 (p.327) 네 마음의 깊이를 다시 확인하자 덜컥 겁이 났다. 네가 내 곁을 떠나지 않을까 봐. 내 옆에 남아서 불행해질까 봐.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진실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네가 연민이라는 덫에 걸리지 않도록.

📖 (p.335) 네가 나를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 내가 너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의 고장 난 뇌가 강이룬은 잊어도 현울림은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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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짓는 마음 - 당신을 지킬 권리의 언어를 만듭니다
이보라 지음 / 유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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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SBI 필기시험에서 가해자들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는 대한민국의 법을 지적하는 책을 제안하는 글을 썼다. 이렇듯 법의 유효성에 대한 의구심이 늘 있었다. 수많은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가 끊이지 않는 현상은 법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피해자를 위한 법은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 그러나 우리는 법을 멀리 할 수 없다. 나의 가장 큰 권리를 담고 있는 언어이고, 그 권리를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때 가장 필요한 게 결국 법이기 때문에.

이 책은 국회에서 10년 남짓 입법노동자(국회의원 보좌관)로 살며 법을 하나하나 만들 때마다 법의 당사자와 공무원, 주민, 기업인, 노동자,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지지고 볶으며 보낸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나에게 국회는 부정적인 이미지(=국민 세금으로 특혜를 누리면서도 마냥 싸워 대는 집단)로 박혀있다. 그러나 저자는 시민이 국회를 버리면 권력과 가장 가까운 자들부터 국회를 활용하게 된다고 말한다. 욕만 하고 관여하지 않으면 국회가 '가진 사람'의 것이 되고, 불행하게도 '가장 절실한' 사람에게 가닿지 못한다고. 결국 우리 일상을 흔들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게 법이라는 말에 설득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총 14개의 법을 만드는 과정과 함께 법이 통과된 이후의 세계가 차례로 펼쳐진다. 법 하나 통과되면 천지개벽할 것 같았지만 결국 눈 하나 꿈쩍 않는 세상에 대한 설움과, 제대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되돌아보니 그래도 1센티미터씩은 나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저자의 낙관도 함께 담겨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다. "삶을 통해 존재를 증명할 권리"라는 제목의 이 글은 2022년 9월 14일 밤 일어난 서울 지하철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가해자 전주환이 자신을 스토킹 혐의로 고소한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 A씨를 역 내 화장실에서 살인한 사건이다. 피해자로부터 최초로 스토킹 사건을 신고 받은 경찰은 1차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가 기각되자, 피해자가 2차로 신고한 뒤에는 영장 신청을 하지 않았다. 형사 사법 실무에 따르면 경찰은 스토킹이 신고될 때 반드시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했고, 설령 기각되더라도 사정 변경(피해자에 대한 위해 우려)을 통해 영장을 재신청했어야 했다. 게다가 법원은 가해자가 지난 3년 간 피해자에게 350여 차례나 연락하고 불법 촬영물 유포 협박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주지가 일정하고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영장을 기각했다. 경찰과 법원은 스토킹을 '가벼운 범죄'로 본 것이다.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최초 발의 이후 22년 만인 2021년 10월에야 어렵게 통과됐다. 법 통과 전까진 피해자가 신고해도 피해자가 맞거나 협박과 강요를 당해야만 처벌이 가능했다. 가혹하게도 피해자가 숨지기 직전까지 가야 국가 공권력이 작동될 수 있었다. 사건 직후 서울교통공사가 내놓은 재발 방지 대책은 더 기가 차다. '여직원 당직 폐지'. 게다가 여성가족부 장관은 피해자가 자신을 보호하는 조치를 하지 않아 생긴 일인 양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철저히 가해자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이들을 보며 분노가 차올랐다.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법인데 법이 그들을 외면하면, 그럼 피해자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이 국가 내에 과연 존재하는가?

저자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신당역 사건 직후 국회 차원에서 긴급하게 사건 현장에 가고, 경찰청·법무부·여성가족부 등의 관계 기관을 불러서 왜 사건 예방을 못했는지 현안 질의를 하고, 「스토킹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스토킹처벌법은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삭제하는 안 중심으로 개정됐고, 5,400여 건 처분된 스토킹 행위가 국가 공식 실태 자료로 분석되어 예방 자료로 쓰이게 되었다. 저자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만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존재가 증명되는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말아야 하며, 그 역할을 국회가 해야 한다는 것".

법의 시작과 끝에서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보니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더 힘을 낼 수 있도록 나도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좀 더 경각심을 가지고 법을 들여다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또다시 법에 대한 회의감으로 법을 멀리 하고 싶을 때마다 이 책을 꺼내볼 생각이다.


📖 (김영란 전 대법관 추천사 中) 저자는 공감만 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가 더 나쁘다고 지적하면서 '대안 없는 공감'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라 하는가 하면, '지당하신 말씀'이 아닌 '보고 듣고 만지는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런 일을 해 나가려면 능력을 과시할 게 아니라 이해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든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저자의 지적은 단지 국회에서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다 적용되어야 할 것들이다. 나아가 이 지적에 대한 현재완료형 답이 무엇인지도 다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이슬아 작가 추천사 中) 읽는 동안 냉온욕 하는 것마냥 가슴이 차가워지고 뜨거워지기를 반복했다. 냉기가 돌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실무자의 실행 능력과 별수 없이 따뜻하고 물렁한 시민의 마음이 번갈아 읽혔다. 그런 사람이 만든 법들은 이 이름만으로도 내 마음을 흔든다. 인생의 아주 취약한 부분을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가진 자를 더 가지게 하는 이야기 말고, 그늘진 구석과 벼랑 끝에 선 자의 이야기를 위한 책이다.

📖 (p.19) 법은 자원을 배분하는 사회의 약속이자 누구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돕는 그물망 역할을 한다.

📖 (p.53-54)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게 하고,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 대리인으로서 국회의 본령이다. 법은 하나의 도구일 뿐, 피해자는 피해 사건으로 인해 단절된 일상을 다시 살게 되는 때에야 비로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법이 국가로부터 버림받아 평생 각인된 고통에 한 줌 위로의 도구가 될 수 있기를. 그것이 내가 이곳에서 일하는 이유다.

📖 (p.222) 말이 되지 않는 말을 꿰는 일은 시민이 시간을 써서 연습할 것이 아니라 국회가 해야 할 일이다. 귀를 쫑긋 세우고 시민의 표정을 살피며 맞게 이해하고 있는지 놓친 것은 없는지, 말 속의 외마디는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리터러시 훈련이 가장 필요한 곳은 국회다.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이해의 확장이 가장 필요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 (p.225) 국회는 법을 창작하는 곳이고 행정부는 창작된 법을 집행하는 곳이고 사법부는 해석하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농담 반쯤 섞어서 우리 직업은 요즘 유행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하곤 한다. 그런데 정작 창작하는 곳인 국회는 너무나 바쁜 나머지 새로운 생각과 시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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