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허먼 멜빌 지음, 박경서 옮김 / 새움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나의 직장 동료가 나에게 물었다.

"주말에 지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 말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대.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다 있다고 말하더라. 자기는 죽을만큼 열심히 일을 해서 지금 비싼 집도 하나 장만했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나는 그 말씀을 듣고 곰곰 생각해 보았다. 정말 열심히 일을 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건 그냥 도둑 심보인 사람인 것이 확실하지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비단 그들에게만 있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제 생각에는 우선 일을 열심히 하느냐와 하지 않느냐로 나눠서 후자의 경우는 고려하지 않기로 하고 대답을 해볼게요.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 부자인 경우와 가난한 경우가 있을텐데요. 부자는 제쳐 놓고 다시 후자만 생각했을 때 그들이 가난한 이유가 단지 그들 자신에게만 있는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동료는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떤 이유가 더 있을 수 있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일한 만큼 벌 수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이념 아닌가?"

"자본주의라고 해서 모두 일한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니죠. 사회적인 구조가 부자에게 맞춰져 있다면 가난한 사람은 평생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는 없을 거예요. 일한만큼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게 아니라 자신을 고용한 그 사람의 배를 불리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는 내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내가 만약 자신의 그 지인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면 나에게 엄청난 실망을 했을거라고 했다. 혹시나 "맞아요! 가난한 사람은 다 가난한 이유가 있어요! 게으름뱅이처럼 일을 안 하고 먹고 놀기만 바란 사람들이겠죠." 라고 말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허먼 멜빌이 세상에 내놓은 「필경사 바틀비」를 비롯한 이 세 단편소설은 정확하게 그 부분을 짚어낸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얼마나 독이 될 수 있는지.

나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필경사"라는 직업을 검색해보았다. 왠지 느낌 상으로 글을 베껴 적는 직업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인쇄술이 이미 발달할대로 발달한 요즘 세상에 이 직업이 살아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등 소위 '윗분'들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적거나 수여장 등을 만들어내는 직업(공무원)이 있음을 확인하고 흠칫 놀랐다. 심지어 필경사분의 은퇴시기에 맞춰 새로운 직원을 충원하려고 채용공고가 나와 있었던 것이다! 일년에 수천장의 임명장, 수여장 등을 적어내는 그들을 직업이 새삼 신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작업. AI 시대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이키는 이 직업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 (학창시절 '서기'를 도맡아 하긴 했지만 서예 관련 학력이나 경력이 없어서 단기간에 그 직업에 도전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

지금에야 오히려 이색적인 직업일 수 있는 '필경사'는 19세기로 올라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총이나 칼 등의 무기를 쥔 사람들이 부유했던 세상은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총과 칼 등을 펜으로 바꿔놓았다. 글, 특히 법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권력은 무기를 들었던 사람들의 그것과 맞먹게 되었고 자본주의 속에서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해 '필경사'라는 직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법률적인 문서들을 그대로 옮겨적는 일을 하는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그 속에 담을 수 없다. 나는 그들이 그 문서들을 베껴 적으면서 아마 보고 싶지 않은 (보통 노동자 계급에 불리한) 내용들도 분명히 있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얼굴 한번 본 적없는 노동자 '전태일'도 다시금 떠올려 본다.

「필경사 바틀비」는 이해하기 쉬운 소설이 아니다. 나는 소설 속 바틀비가 늘상 말하는 "하지 않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라고 끊임없이 말을 할 때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소위 "구르라면 굴러"야 할텐데 이런 말로 일관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소설의 앞부분으로 다시 책장을 넘겼고 내가 간과한 몇 가지 사실이 눈에 보였다. 이 소설의 화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망을 받는 변호사이다. 지금도 변호사는 아주 좋은 직업이지만 그 당시는 오죽했으랴. 더 높은 권력과 함께 엄청난 부를 쌓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시시콜콜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독자의 상상에 맡길 뿐. 그래서 나는 그렇게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던 바틀비가 그런 말을 하게 된 데에는 그가 필사했던 글들 중 자신이 당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무언가가 있었으리라 결론을 내린다.

노동자 계급의 어두운 면을 한없이 보여주는 두 번째 단편소설 「꼬끼오! 혹은 고결한 베네벤타노의 노래」에 등장하는 수탉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꺾이지 않는 무언가가 샘솟는다. 결국 모두 죽고 말지만 그들의 영광은 그들이 묻힌 곳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다.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필경사 "바틀비"의 모습을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롯이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 우리는 그 이면도 부지런히 살필 의무가 있다.

「총각들의 천국과 처녀들의 지옥」은 남녀 차별적인 시대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만찬을 즐기며 담배를 흡입하는 오늘을 잊은 듯한 총각들과 종이를 만드는 공장에서 몸에 아주 해로운 물질들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 무뎌진 처녀들의 멍한 모습은 대조적이다. 총각들의 안락함과 편안함은 모두 이 처녀들의 고된 노동으로 인한 것이다.

이 세 편의 소설은 미국의 19세기 자본주의의 비극성을 처철하게 다룬다. 하층계급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과 여성들. 허먼 멜빌은 미국에서 이 소설들을 썼지만 우리나라의 사정이라고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일제 강점기와 민족 상잔의 비극을 겪고 난 후 나라을 부흥시키기 위해 밤을 잊고 일해야 했던 노동자들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타지에서 갖은 고생을 감내해야 했던 여성들의 권리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 이 소설을 읽다보니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추천했던 '에르난 디아스'의 장편소설 「트러스트」가 떠오릅니다.

동일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함께 읽으면 훨씬 이해가 빠르겠지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안락하게 살 수 있음은 모두 당신들 덕분입니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쫑쫑은 이 책을 읽고 개인적인 견해로 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