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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 그 높고 깊고 아득한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평점 :
인생이 시간을 따라 걷는 하나의 순례라면 당신은 지금 어느 녘에 있습니까. 그동안 걸어온 길이 많이 힘들지는 않으셨는지요. 지금 서 계신 곳은 평안하신지,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게 느껴지지는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말벗이라도 필요하지는 않으신지요.
티베트 언어로 '몸'은 자루를 나타내는 말로 임시 거처를 뜻다고 한다. 임시 거처는 다른 말로 잠깐 들르는 곳의 의미일텐데 무엇이 들렀다 그렇게 급하게 떠나버리는걸까. 우리의 삶에 마지막이 있다면 우리의 삶 이후 우리는 과연 어느 곳에 머무르게 될까. 부디 내 삶의 끝 어디론가 가야한다면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이고 싶다.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작은 화분에 심은 나팔꽃이 점점 자라 벽과 창문을 타고 천장으로 넘어갈 때즈음 나는 그 존재를 잊어버린 것 같다. 나에게는 그때 이미 또 다른 재미거리가 있었으니까. 살아있는 것은 말없이 그렇게 눈길 한번을 기다리는데 변해버린 마음은 그를 돌볼 여력이 없다.
나팔꽃의 원산지가 히말라야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움'을 지닌 나팔꽃은 어려움 없이 넘어가는 히말라야. 왜 인간에게 그곳은 그렇게도 모진 곳일까. 나는 '촐라체'를 등반했다가 많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은 산악인을 어느 강연에서 만난 적이 있다. 처음에 나는 왜 산을 가지? 무엇을 위해서 그 높은 산을 갔을까. 잃어버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분은 산이 불러서 갔다고 하셨다. 또 그리웠고 뭔가 찾고 싶어서 그곳에 갔다고도 하셨다. 강연이 끝날 때즈음엔 나도 모를 뜨거운 눈물이 흘렀고 그 분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걸까.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또 다시 어디로 가는걸까. 아니 가야만 하는걸까. 거창하게 인문학적인 질문이라 이름 붙이고 싶지는 않다. 오늘 밤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은교>>의 박범신 작가가 이번에 세상에 내어놓으신 산문집 「순례」의 모티브는 '길'이다. 태초에 있었던 '말씀'을 태초에 있었던 '길'로 풀이한 이 책은 박 작가가 히말라야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 그리고 눈 앞에 놓여 있는 남은 인생의 순례길을 걸으며 작가의 인생 얘기를 들려주는, 말 그대로 작가의 인생 전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서전과도 같은 책이다.
작가는 순례길을 하나 하나 걸어가며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을 살핀다. 오고 가는 대화를 하듯이 한 번씩 불러주는 상대방의 이름은 K형. 내 이름의 이니셜과도 겹치는 이 알파벳 하나에 왠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진다. 위로를 받기 위해 히말라야에 오고 또 실패하기 위해 히말라야에 온다는 작가의 이야기는 '산'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려준다. 고요한 히말라야에서 어머니의 포근한 품 속을 느끼지만 때로는 버릇없는 자식으로는 키우고 싶지 않아 근엄한 표정으로 엄중하게 자식의 죄를 벌로 다스리는 어미의 모습이 되기도 하는 히말라야.
산은 세상 누구에게도 공평하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가는 것이라는데 그래서 윤동주 시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세상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겠다 다짐했나 보다. 어떤 기분일까, 히말라야 순례를 하는 기분은...
우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댐이 들어서기 전 날 나는 식구들과 함께 물에 잠기기 전 마을을 구경하러 갔다. 사람들은 물론 세간살이를 다 들어낸 마을은 그야말로 귀신이 나올 것같은 모습으로 어두침침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저녁이었고 전기가 모두 끊긴 상태였으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는 없었다. 나는 무서운 마음에 가족들에게 얼른 집에 가자고 떼를 썼다. 아마 긴 시간 오가며 마을의 온기를 경험하셨을 부모님들은 쉽게 발을 뗄 수 없으셨으리라. 정이라는 게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던 나에게는 그저 빨리 떠나고 싶은 장소였다. 다음 날 어김없이 엄청난 양의 물이 마을을 덮었고 또 다시 그 며칠 후 식구들과 다시 찾아간 그곳은 그저 '평화'였다. 푸른 물이 넘실거리고 위로는 다리가 긴 하얀 새들이 파란 하늘 위를 유유히 날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같았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되자 별빛이 쏟아지는 물가를 걸으며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죽음과도 맞닿아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티베트인은 성씨를 따로 쓰지 않고 가문을 인정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모든 생명은 언젠가 내 어머니였던 적이 있고 너의 조상이 언젠가 나의 조상이었으니 이렇게 저렇게 굳이 핏줄을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자유롭고도 아름다운 사상이 아닌가. 그렇게 모두가 하나가 된다. 티베트인들의 이 자유로움은 죽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대부분 메마른 암반층으로 땅을 깊이 팔 수 없는 티베트 고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천장, 조장, 견장, 아니면 어장을 한다고 한다. 천장은 시신을 독수리가 와서 먹도록 하는 장례풍습으로 시신이 하나도 남겨지지 않아야 자유로운 영혼으로 다음 세상에 다시 올 수 있다고 믿는다니 한 편으로는 끔찍하기도 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세 번 울음을 터뜨린 작가의 마음을 책에 늘어놓으신 문장들을 읽으며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인생길에서는 나를 위해 아무도 화살표를 그려주지 않으니 내 스스로 화살표를 그려야 한다는 말씀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렇게 총 3개의 장을 통해 히말라야 순례길들과 산티아고 길을 보여주던 작가는 우리에게 그가 지금 새로운 순례길의 초입을 걷고 있음을 알린다. 이 순례길에 대한 언급은 굳이 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구나 순례자로 태어났기에.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남은 생을 순례한다.
덧붙이는 말 : 작가님의 마지막 순례길, 부디 꽃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내분께 고백하는 글이 참 감동이었습니다. 건강하세요!
※ 산문에 대한 미학을 느끼게 해 준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쫑쫑은 이 책을 감사히 읽고 주관적인 견해로 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