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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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남는다."

나의 이전 직장 상사는 나에게 늘 그런 말씀을 하셨다. 말은 하면서 바로 사라지지만 글은 어떤 모습으로든 남는다고. 언젠가 그 글이 비수가 되서 나를 향할 수도 있다고. 그래서 무언가 글로 남길 때는 항상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리고 사업상 또는 거래상 무언가 확실히 해야할 때와 상대방이 모호한 모습을 보일 때 역시 말이 아닌 '글'로 남길 것을 주문하셨다. 상사의 말씀에 따르면 그만큼 '글'이라는 것은 중요하고도 무서운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할 것이 있다.

누군가가 적어놓은 즉, 글로 된 것들은 모두 그 자체로 믿을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이 글로 쓰여졌을 때 과연 이것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것을 믿어줄 것이냐의 문제가 남아있다.

만약 내가 세상에 실제 존재하고 있는 인물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그 인물의 사생활들을 들춰내어 나의 유려한 글 솜씨로(이건 말그대로 가상이다.) 그 사람에 대한 거짓 글을 하나하나 써내려간다면?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먼지로 사라진 후 누군가가 나의 거짓 글들을 발견한다면? 여러 분들이 생각하기에 어느 쪽이 쉬울까? 세상이 나의 글을 믿지 않는 편과 나의 글을 특종을 건진 것마냥 대서특필하는 편. 세상은 분명 내가 직접 써놓은 글들에 의해 그 사람을 평가할 것이며 그 인물은 그런 인물로 후 세대에 걸쳐 자자손손 평가받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왕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전 세계의 어느 위인전을 보아도 칭찬 일색이다. 그 책들은 과연 왕들이나 그 위인에 의해 손수 쓰여진 것일까? 누군가가 그 분들의 화려한 일대기만을 쏙쏙 뽑아내어 일관된 문체로 그럴 듯하게 쓴 글일까?

어찌 보면 진실과 거짓은 서로 그리 먼 곳에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보통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뉴스나 신문들에 적혀있는 글들을 믿을 수 있는 사실이라 칭한다. 소설은 창작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혼돈 속에 있으며 우리 스스로 제대로 된 주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또 쉽게 거짓을 밝혀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더 나아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이런 질문들 속에서 나는 천재 작가 에르난 다아스의 「TRUST(트러스트)」를 만났다.



이 소설에 대한 서평을 쓰는 지금 나는 나의 이 글이 또다른 독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와 과연 나의 글에 대해 독자들이 얼마나 믿어줄 것이냐 하는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에 휩싸여 있다. (에르난 디아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는 보통 소설책을 접할 때 읽을 때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유지하기 위해 절대 결말을 미리 보거나 중간중간 뒤를 들춰보지 않는다. 아마 어린 시절 코넌도일의 「셜록 홈즈」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읽어가면서 내 몸에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배어든 것 같다. 이 책을 다 읽고보니 나의 모습도 이 책에서 그려진 3명의 여인과 닮아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이런 흥미진진한 소설들을 읽고 친구들에게 긴장감있게 전달해주기를 즐겼다. 마지막 범인을 밝혀내는 순간에 아이들의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에게는 하나의 오락이었고 다른 책을 또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나는 아직도 중학교 2학년 국어수업 시간을 통째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름끼치는 추리 소설 「쥐덫」에 대한 이야기로 장악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래 그때가 참 좋았다.)

'trust'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신뢰, 신임, 신탁 재산이라는 명사적 의미와 사람을 신뢰하다[신임하다/믿다], (무엇이 사실임을 혹은 옮음을) 믿다라는 동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을 가장 처음 집어들었을 때 '트러스트'라는 제목을 보고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나를) 믿어주세요."였다. 다짜고짜 자기를 믿어달라는 이 책. 제목만으로도 꽤 흥미로웠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글쎄.. 이것이 "Trust me."인지 아니면 "Trust you."인지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차라리 책의 제목이 "Pick"이나 "Select"였다면 어땠을까? 그럼 왠지 하나정도는 자신있게 선택할 수 있었으리라.

이 책에는 4가지의 이야기가 묘하게 연결된다.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낸 듯하지는 않지만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그들만의 연결점이 있다.

소설, 자서전, 회고록과 일기라는 4개의 파트는 모두 각각 다른 형식의 글들이다.

이 네 가지 중 당신은 어떤 것을 믿을 것인가?

아마 이 책을 읽기 전 누군가가 나에게 이 네 가지 장르 중 믿을 수 있는 한 가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4번째 파트인 일기라고 답했을 것 같다. 소설은 말 그대로 허구에 가깝다는 기존 관념에서 제외를 시키고 자서전과 회고록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업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사소한 일도 크게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에서 제외를 시켰다. 하지만 일기는? 일기는 다르지 않을까? 내가 하루하루 있었던 일을 적어내려가는거니까. 가장 믿을 수 있는 장르가 아닐까.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이 '일기'라는 것도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른 독자들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게 될 것이다.

첫번째 파트인 '소설'은 전개가 꽤 흥미롭게 진행된다. 여러 세대에 걸쳐 미국 사회와 전세계를 뒤흔들 정도의 가문의 이야기. 아주 밋밋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러브 스토리. 그것마저도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음을 드러내는 강력한 스토리 전개. 한 남자의 성공과 그 남자와 함께 할 수 없었던 미친 아내. 그 아내로 인해 약간의 사람의 냄새를 풍기게 되는 그 남자. 아내를 잃고 난 후 남자와 집안의 쇠퇴.

플롯이 강렬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고전 중의 고전 "제인에어"가 생각났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고전과 전혀 연관성을 찾을 수 없음에도.. 아마 이 책을 읽은 몇몇의 독자들은 내 생각에 동의를 할 것이다.) 그 깊은 인상이 뇌리에 꽂히고 꽂혀 비운의 여주인공 헬렌과 관련된 몇 가지 장면들은 이 책을 손에 쥐고 있던 기간동안 나의 꿈 속에서도 동일하게 재현되었다.

나는 책을 읽어가며 여러 세대에 걸친 인물들만의 특징적인 설명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각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특징을 작은 노트에 하나하나 적어내려갔다.


뭔가 아련함을 남기는 첫번째 파트를 뒤로 하고 나는 두번째 파트인 자서전을 읽으면서 무엇인지 첫번째 파트에서 읽은 내용들이 등장인물의 캐릭터만 약간씩 달라진 채 거의 반복적으로 적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정확하지 않은 문체. 확실히 첫번째 파트에서만큼 다듬어져 있지는 않은 가끔씩 끝이 잘려져있는 형태의 문장들이 보였다. 말 그대로 자서전의 형태였는데 끝으로 갈수록 명확하지 않고 중간중간 빈틈이 보인다. (나는 사실 이 두 번째 파트를 읽었을 때는 번역가의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작가 "에르난 디아스"의 철저하게 계산된 의도였다.)

세번째 파트 회고록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장 하나하나에 마킹을 해나가던 나의 모습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완전히 저자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니.. 나는 그제서야 책의 날개를 펴서 저자의 이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에르난 디아스. 뉴욕대학교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첫 작품만으로도 이미 미국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아주 많은 상을 수상한 인물로 이 작품 「트러스트」는 에르난 디아스가 두번째로 완성한 소설이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그냥 흔해빠진 소설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번역가의 솜씨 역시 눈여겨줄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선택한 각기 다른 문체는 확실히 4개의 파트에서 엄청난 빛을 발하고 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번역가님)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그녀'의 일기인 마지막 파트를 보았다. 일기형식이고 드문드문 암호처럼도 쓰여있기에 앞의 3개 파트보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짐을 느꼈다. 그만큼 결말이 궁금해서인 것도 이유라면 이유이다.

사람이 이렇게나 나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문득 한 남자의 자신의 기가 막히게 총명한 부인에 대한 지나친 열등감이 사람을 이렇게 악하게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벽한 척 할 뿐.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 재력이라는 것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았다. 회고록에서 아이다가 말하고 있듯 '돈'은 허상의 그 무엇이지만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 분명하다. 한 사람의 기록을 송두리째 없애버리기도, 이런 식으로 아예 다른 사람으로 그려놓을 수도 있으니.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는 또 커다란 의문에 휩싸인다. 이 일기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일까? 과연 베벨 부인이 직접 쓴 일기가 맞나? 직접 쓴 일기가 맞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작가는 이 소설의 4개 파트를 써내려가며 여러가지 복선을 둔다. 하지만 알아채고 나면 이미 다른 스토리 위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천재 작가는 우리에게 본인의 소설 역시 추리소설이나 탐정소설을 읽어가듯 결말을 가늠해보게 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긴장을 끈을 놓지 않게 만든다. 어쩌면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가늠이 되지 않는 결말. 혹자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이 바로 이 소설이 시작하는 지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경험은 반드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나 코넌도일의 셜록홈즈 시리즈를 통해서일 필요는 없다. 이 작품 속 아이다의 말을 빌려 추리소설과 탐정소설은 범죄와 혼란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마련이지만 이 소설은 그 이상이다. 질서와 조화가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 이 책은 리딩투데이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무상으로 제공받았으며 쫑쫑이 주관적인 견해를 넣어 이 글을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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