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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읽어주는 여자 -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음식에 관하여
모리시타 노리코 지음, 지희정 옮김 / 어바웃어북 / 2018년 1월
평점 :
평소 나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주부경력 16년에 비해 딱히 요리실력이라고 내세울 것은 없다. 그래도
그럭저럭 하루하루 밥은 해먹고 살고 있으니 아주 나쁜 편만은 아니다. 해가 갈수록 전업주부로 살고 싶은 맘은 간절해지는데 현실은 직장과
가사일을 병행해야 하는 워킹맘이다보니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드는 음식보다는 단시간에 상위에 올릴 수 있는 레시피 위주로 만들어야 한다는게 가슴
아프긴 하나 평소 온.오프라인을 통해 원하던 레시피를 얻게 되면 꼭 시간을 내어 만들어서 가족들 밥상위에 자랑스럽게 올리곤 한다. 그러면서 나름
'요리 할 줄 아는 여자'라고 스스로 위안 삼으며 뿌듯해 하곤 한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다고 잘 먹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몇 시간동안
부엌에서 실랑이 하느라 지친 몸에 다시 힘이 샘솟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어른들 말씀처럼 내 새끼 입에 음식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걸
오롯이 느끼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우리 아이들 기억속에 추억의 편린이 되어 오래오래 남아있길 잠시나마 기원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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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 분명 사람을 그 날 그 때의 기분이나 인상을 함께
먹게 된다. 그것은 음식과 함께 입으로 들어가 몸속 깊은 곳에 축적된다. 그리고 어느 날 같은 맛 혹은 비슷한 맛과 만나면, 책 사이에 끼워둔
책갈피 끈을 잡아당겨 페이지를 폈을 때처럼 맛의 감정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 본문 239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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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음식을 통해 살아온 세월들을 추억하는 놀라운 감성의 소유자다. 물론 음식에 담긴 추억과 사연들이 있어서 특별한 날,
또는 힘들고 지친 날 그 음식을 찾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음식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그야말로 '소울 푸드'가 무한한
멋진 사람이다. 어릴 적 먹었던 오므라이스부터 시작해서 일본 전통 음식들, 다양한 간식들, 심지어 편의점 패스트푸드까지 그녀는 미각과 후각을
총동원해 만든 추억들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녀가 소개하는 다양한 음식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제목붙인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죽이었다. 그녀가 중학교 2학년이던 때, 고열로 며칠을 시달리다가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어머니가 두툼한 질냄비에 끓여 나무 국자로 떠
주신 죽........ 그녀는 그 음식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한다. 순간 코가 싸해졌다.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가득 담긴
죽이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문자로만 읽고 있는 나에게조차 마치 그 죽을 방금 한 숟갈 떠먹은 것같은 가슴 찡함이 전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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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말이야, 이걸로 쒀야 맛있어!"
그렇게 말씀하시며 어머니께서 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나무 국자로 너구리처럼 생긴 질냄비에서 죽을 떠 밥공기에 담아주셨다. 그때 났던 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국자가 질냄비 가장자리에 닿을 때마다
"툭, 툭"소리가 났다. 금속과 금속이 서로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와는 달리 질냄비와 나무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둥글고 부드러웠다.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두툼한 질냄비에 끓여 나무 국자로 뜬 죽은 포근포근하고 부드러웠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식탁 위에서 죽 알갱이들이 반들반들
빛났다.
- 본문 231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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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역시 바쁜 직장일로 인해 제대로 요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늘 어머니께 부엌을 맡긴 채 지내오다가 저자가
50대 중반이 된 어느날, 어머니가 건강상의 이유로 부엌일을 그만하셔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 맛들을 글로 풀어낼
줄만 알았지, 직접 만들어본 적이라고 없는 저자는 그동안 다양한 음식들을 먹어 본 경험들을 떠올려 하나 둘 만들기 시작하며 어머니께 대접하게
된다. 어머니가 맛있게 드시는 모습에 용기를 얻은 저자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누군가가 기쁘게 먹어준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새삼 깨닫게 되며
점점 요리의 세계로 한 걸음씩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그동안 먹고 비울 줄만 알았던 그녀가 재료의 신선도, 조리법, 계절 변화 등
음식 맛을 좌우하는 미묘한 차이도 터득하게 되었다니 이제 맛 칼럼니스트에서 요리사로 거듭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저자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와 함께, 음식에 관한 묘사 및 설명, 음식의 역사 등 다양한 상식들을 소개하고 있어 얼핏 보면
음식도감같은 책이기도 한데,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상식이 쌓인 것보다 마음 한 켠이 따뜻해져오는 묘한 느낌이 든다. 마치 누군가 나를 꼬옥
안아주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읽다보면 먹고싶어져서 책 커버에 써있는 문구처럼 이 책은 '한밤중에 읽으면 위험한 글'이긴 하지만 마음이 외롭고
누군가에게 마냥 의지하고 싶은 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난 후 이 책을 읽으면 금방 치유가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이제 이 책을
서재에 잘 보이는 책꽂이에 꽂아두어서 마음에 탈이 나는 날이면 언제든 꺼낼 수 있는 나만의 비상약으로 사용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