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한 달을 살다 낯선 곳에서 살아보기
전혜인 글.사진 / 알비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에 대한 낯가림이 있는 나는 프롤로그, 여는말, 서문 등 책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는 책 소개 및 저자의 책을 쓰게 된 동기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내용만 봐도 이 책이 쉽게 소화가 될 책인지, 오래 두고 꼭꼭 씹어 읽어야 할 책인지, 씹어 삼켜도 소화불량으로 가슴이 답답해질 책인지 어느 정도의 감이 온다. 물론 늘 그 예감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중률 80% 정도의 나름 신빙성 있는 나만의 직감이다. 책 표지부터 상큼하게 다가온 이 책은 본 내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프롤로그를 읽다말고 그만 저자에게 격한 공감을 하며 씹을 새도 없이 소화가 다 되어버렸다. 마치 내 마음을 열어보고 그대로 옮겨놓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건 아마도 내가 '서른을 넘긴 직장인 유부녀'가 되었기 때문일겁니다. 낯선 곳에서 혼자 한 달을 보내는 자유는 이제 내가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되어 버린 걸까요?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안정감'이라는 녀석은 '유부녀', '며느리', '성실한 직장인' 같은 여러 겹의 코르셋을 가지고 제 인생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덕분에 나는 항상 신나는 일을 벌이는 '나'의 본모습을 어딘가 묻어둔 채, '서른을 넘긴, 직장인, 유부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내가 어느새 '나'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 프롤로그 인용 -

       '유부녀, 며느리, 성실한 직장인 같은 여러 겹의 코르셋', '서른을 넘긴 직장인 유부녀의 역할', '내가 어느새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는 구절을 읽는데  어쩜 이렇게 콕 찝어 표현을 잘하는지 나보다도 어린 저자가 퍽 대견하고도 기특(?)하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현재 나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다. 한 집안의 맏딸, 또 다른 집안의 며느리, 한 남자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 마흔을 넘긴  직장인 등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내 몸도 역시 '여러 겹의 코르셋'으로 꽁꽁 싸매져 있다. 때로는 숨이 막히고 답답해서 코르셋을 벗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 코르셋들로 답답하리만치 싸매져 살다보니 나의 본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심지어 내 모습을 잃어가는 것 같은 불안감에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도 종종 있는데, 저자는 현명하게도 실천을 한 것이다. 파리에서 한 달간 살아보는 것으로 말이다. 그야말로 대박사건이다. '여행'이 아닌 '살기'라니....... 그것도 한 달이나 말이다.

 

 

 

      이제 30대 초반의 나이인 저자에게 하나 배운 게 있다. 평소 '결정장애'를 앓고 있는 나로서는 여러 개의 물건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사야할 때 그야말로 심사숙고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뿐 아니라, 양자택일의 상황인 경우에는 더더욱 고민에 고민을 더하다보니 그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저자가 소개하는 '엄마로부터 배운 인생공식' 덕분에 앞으로 더 이상 '결정장애'로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름하여 '50살 척도'. 쉰을 넘긴 엄마가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는 말을 듣다가 떠올리게 된 인생 공식이다.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결정의 주체를 지금의 내가 아닌 50살의 나로 가정하는 것이다. 나이 오십이 된 내가 지금 이 순간을 회상한다면 어떤 말을 할까. 파리에 가서 한 달을 살아 보라고 할까, 아니면 평소처럼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할까? 워커홀릭 성향이 다분해서 놀 때보다 일 할 때 마음이 편한 현재의 나는 '소처럼 일이나 해서 성과를 잘 내겠다'고 대답하겠지만, 쉰 살의 나는 그렇게 말할 것 같지 않았다. 망설이지 말라고, 나이에는 무게가 있어서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엉덩이를 떼는데 점점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지금이 바로 기회라고, 그렇게 나의 등을 떠밀 게 분명했다.

                                    - 본문 14~15쪽 인용 -

      '50살 척도' 덕분에 앞으로는 선택하기가 좀 쉬울 듯 하다. 무엇을 사야할 지, 어디로 가야할 지, 무엇을 해야할 지 등 내가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 이제껏 늘 그랬듯이 소극적인 자세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던지, 꼬리를 슬그머니 내리는 행동 따위는 더이상 하지 않을 것 같다. 좀 더 대범하게, 좀 더 자신있게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자신감지수가 상승함이 느껴진다.

 

 

 

        남편은 물론이요 친정, 시댁 식구들의 동의를 얻었을 뿐 아니라, 직장동료들의 양해를 구하여 한 달이라는 시간을 확보한 저자는 에어비앤비 사이트를 통해 파리에 있는 월세 스튜디오를 한 달간 빌리게 된다. 여기서 스튜디오란 사진을 찍는 작가들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풀옵션 레지던스'같은 집을 말하는 것이란다. 파리의 동남쪽 베르시(Bercy) 쪽에 위치한 2층짜리 다세대 주택인데, 관광지가 아닌 현지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고 싶어 주거 중심지역으로 집을 구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찬찬히 동네를 둘러본다. 나를 무엇보다 기쁘게 한 것은 스튜디오가 위치한 골목의 상점들이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정면에 보이는 빵집, 가게 바깥에까지 동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빵을 사 먹는 걸 보니 대단한 맛집이 틀림없다. 빵집 옆엔 구린 냄새를 풍기는 치즈 가게가, 그리고 맞은편엔 예쁜 꽃을 파는 소담한 꽃가게가 있다. 골목의 끝엔 멋스러운 테라스 카페가 파리다움을 뽐내고 있고, 그 건너편엔 모노프리라는 대형마트가 있다. 오 분쯤 걸어나가면 인근에 지하철역이 두 개나 있고, 근방엔 밥집과 카페가 줄을 잇는다.

                           - 본문 26쪽 인용 -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향긋한 빵냄새가 골목 가득 퍼져있고, 골목길 따라 얌전히 자리잡고 있는 치즈 가게, 꽃집, 카페의 모습들이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어쩜 이렇게 집을 골라도 야무지게 골랐을까나. 그 집이 어디인지 알아내어 내가 가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저자는 한 달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동안 바쁜 여행객처럼 수학여행 다니듯 파리의 유명한 곳들만 골라 골라 다니는 게 아니라 동네를 시작으로 이 길, 저 길 따라 여유있게 걸아다니며 점점 파리의 여유로움과 낭만에 대해 알아간다. 센 강가를 걸으며 여유로운 사색에도 잠겨보고, 동네 로컬 상점을 찾아다니며 쇼핑도 하고, 책도 사며 벼룩시장에서 인생템이 될만한 물건도 구입한다. 뿐만 아니라 메뉴 주문을 잘못해서 육회를 먹게 되는 상황에도 처해보고 뜻하지 않게 쌀국수 맛집을 발견하게 되는 행운도 안게된다. 파티에도 초대되어 영화속에서나 볼법한 무도회의 분위기도 느껴보는 등 한 달이라는 일정동안 그야말로 수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 저자의 모습을 보면서, 점점 삶의 여유를 찾고 인간관계에서 생겨난 상처들이 하나 둘 치유되어 가며 그야말로 힐링되어 가는 저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 내 마음을 제일 흔드는 장면이 있었다. 심금을 울렸다고나 할까?

         아침이 되면 쏟아지는 햇살에 슬며시 눈을 뜬다. 띠디디띠 띠띠띠, 띠띠디띠 띠띠띠 하고 울리는 알람 따위는 파리에 도착한 첫날 밤에 진작 삭제해 버렸다. 휴일에 소파에 누워 '미드'를 보다가도 나를 흠칫 놀라게 했던 전 세계인의 공통 알람, 바로 아이폰의 알람을. 이 시점부터 나의 행복은 시작된다. 알람 없는 일상이라니! 필요한 만큼 푹 자서 저절로 눈이 떠지면 아침햇살에게 꽃이라도 선물 받은 양 기분이 좋다. 기지개를 쭉 켜고 팔을 좌우로 흔들흔들 하다 보면 두 팔을 프로펠러 삼아 붕-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큼 몸도 가볍다.

                        - 본문 27~28쪽 인용 -

 

 

      이 역시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저자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어느새 그 모습이 내 모습이 된다. 그야말로 모든 현대인들의 로망이 아닐까 싶다. 알람이 없는 세상....... 기상시간에 제약받지 않고,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에 저절로 몸이 깨어나는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인 기상이니 몸이 절로 건강해질 것만 같다. 저자가 여기 저기 다니며 구경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쁜 물건을 사고 하는 것도 부러웠지만 그것보다 더 부러운 게 바로 이 자연친화적인 기상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언제쯤 나도 해볼 수 있을까? 마냥 저자가 부럽다.

 

 

 

         한때 '제주에서 한 달 살기' 붐이 일던 적이 있었다. 잠시 사그러드나 싶더니 어느 연예인의 민박운영이 컨셉이 된 한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요즘 다시 제주도 열풍이 부는 것 같다. 그런 열풍과는 상관없이 난 예전부터 제주에서 살고 싶은 작은 꿈이 있었다. 마냥 도피해서 숨어사는 게 아니라, 주말이 되기 무섭게 고향집으로 달려가서 엄마가 해주시는 집밥을 먹으며 한 템포 쉬어가는 대학가의 자취생처럼 나도 힘들때면 제주도로 가서 한 달간 숨고르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그것도 나 혼자서 말이다. 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 혼자서 되뇌이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저자의 한 달간의 파리 체류 기록을 보면서 내가 조금 변했음이 느껴진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과 마음의 성장판'이 닫힐 줄만 알았는데 그게 다시 열린 것 같다고나 할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꼭 실천해보리라 다짐을 해본다. 저자처럼 파리까지 가보지는 못하겠지만, 늘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제주에서 한 달....아니면 두 달..... 살기를 해보리라고.  '몸과 마음의 성장판'이 닫히기 전에 꼭 실천해보리가 다짐에 다짐을 하게 해 준 저자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