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를 채우는 한 끼 - 99가지 음식 처방전
임성용 지음, 김지은 그림 / 책장속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어릴 적부터 입이 짧았던 나는 늘 부모님의 근심거리였다. 온 가족들이 둘러앉아 삼겹살을 구워먹어도 냄새와 연기를 피해 방으로 피신하던 나. 맛있는 고기를 왜 안 먹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내 덕분(?)에 자신들의 몫이 늘어남에 기뻐하던 동생들에게 그렇게 나는 본의 아니게 양보의 미덕을 베풀곤 했다. 삼겹살이 맛이 없는 건 아닌데 먹고 나면 어김없이 배에 가스가 차고 배탈이 나기 일쑤였기에 난 그렇게 서서히 고기와 멀어지고 있었다. 어른이 되면서 점점 나아지긴 했으나 마법에 걸린 날 돼지 고기를 먹으면 열이면 열 배탈이 나고 두통이 오며 심지어 구토까지 하기를 여러번 겪고 나서는 나에게 돼지고기는 잘 맞지않는다는 것, 그리고 마법에 걸린 날에는 더더욱 먹지 말아야 할 음식임을 결론 내리고 그 뒤로는 철저히 조심하고 있다. 그리고 점점 내 몸에 맞는 식재료와 맞지 않는 식재료를 하나 둘 분류해가다보니 점점 '음식궁합'에 관심을 가지고 식사준비를 할 때도 참고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도 늘 전문가의 조언이 궁금해서 필요할 때마다 인터넷을 검색하곤 했는데, 이번에 출간된 <나를 채우는 한 끼> 책 덕분에 검색의 수고를 훨씬 덜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한의사 선생님이 '레이디경향'에 <임성용의 보약밥상>이라는 제목으로 2년간 연재한 식재료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 펴낸 보약같은 책이다. 단순히 음식의 효능 뿐만 아니라 이 식재료가 우리나라에 언제 어떻게 소개됐는지, 선조들은 이것으로 어떤 요리를 했는지를 비롯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음식 상식들을 소개하고자 했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신뢰가 갔다. 평소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기에 그 누구보다 식재료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저자는 총 12개의 주제로 나누어 식재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무기력함, 피곤함, 예민함, 긴장감, 차가움, 불편함, 아름다움, 무거움, 갑갑함, 아픔 등을 다스릴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식재료 뿐 아니라 '나'의 소중함을 채우고, '특별한 당신'을 위한 식재료들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마침 딸아이와 한 바탕 전쟁을 치루고 난 후 속이 상한 나머지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고 있었는데 문득 이 책에서 읽었던 '깻잎'이야기가 떠올라 저녁 밥상에 얼른 깻잎을 올렸더랬다. 고기 반찬 없이 그냥 깻잎에 밥과 쌈장을 올려서 싸먹었는데 '한국의 허브'답게 쌉싸름한 깻잎 특유의 향에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한 깻잎의 제목이 '날뛰는 기분 가라앉히고 싶은 날'이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가슴에 있는 담과 기운을 내려가게 하는' 성질을 가진 깻잎은 아로마를 이용해 정서적 치료를 하는 유사점이 있다더니 이 날 나의 화를 그렇게 가라앉혀준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휴식이 필요한 날 <포도>', '괜스레 누가 미워지는 날 <죽순>', '갑작스러운 불안감에 가슴이 쿵쾅거리는 날 <바나나>, '어제도 체하고 오늘도 체한 날 <당근>, ' 가스가 차서 배가 팽팽한 날 <부추>' 등 언제 어느 때에 먹으면 좋을지 쉽게 써놓은 각 식재료의 제목 덕분에 목차만 봐도 필요 때마다 얼른 얼른 찾아볼 수 있어서 급할 때 혹은 필요시에 요긴하게 펼쳐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마음이 허기지고 몸이 지친 날 이 책을 펼쳐들고 음식 처방전을 찾으려고 한다. 음식이 곧 보약이랬는데 앞으로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귀한 보약 한 재를 지어온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