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 산티아고 길 위에서의 46일
이혜림 지음 / 허들링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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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 문득 세계여행이 떠나고 싶어져서 남편에게 떠나자고 말을 꺼낸 한 새댁. 걷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그녀의 말에 남편은 장난이겠거니 그냥 넘긴다. 이에 재차 남편에게 세계 여행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고 세 번째로 그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서야 남편은 이게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 그들은 세계여행의 준비운동(?) 삼아 그곳으로 떠나게 된다. 그 힘들다는 800km 산티아고 순례길로 말이다. 그런데 순례길을 떠난는 이 새댁의 이유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남편의 인생 버킷 리스트로 꼭 가고 싶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는 차마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다.

걷는 것, 힘든 것, 땀 흘리는 것을 모두 감수하겠다는 결심을 한 만큼,

나는 남편에게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지만,

내가 가야 할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남편이 가고 싶어하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남편을 위해 걷는 길.

800km쯤이야 하루 20km씩 걸으면 40일이면 끝나니까, 

40일 딱 참고 걸어보지 뭐.

하루 2km씩도 안 걸어본 여자가 결국 이렇게 외치게 됐다.

"그래, 가자! 까짓 거, 산티아고!"

- p. 12 中 - 

    남들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 지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싶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데, 저자인 그녀는 순정파다. 남편에게 좋은 아내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이것 저것 재는 거 없이 남편을 따라 순례길로 떠난다. (그녀는 결혼생활의 보험 하나를 제대로 든 거나 마찬가지다. 참 현명한 아내가 아닌가 싶다.)



   온 세상이 핑크빛이고 모든 게 행복할 신혼의 단꿈에 젖은 이 부부는 인생의 1학년답게 아무런 사전 정보도, 준비도 없이 무작정 순례길의 시작점이라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장피에드포르로 간다.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더라는 이야기만 믿고 노란 화살표를 찾으나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다행히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배낭을 멘 사람들의 무리를 보고 그들을 따라 걷기 시작하며 이 부부는 드디어 순례길 대장정의 문을 열게 된다. 

   남들보다 느린 발걸음에 속도는 자꾸 처지게 되고, 심지어 남편과 같이 걷다가 결국은 이들 부부 사이에서도 시간차가 생겨 남편은 먼저 걸어나가고 저자는 뒤에서 남편을 따라가는 형세로 가게 된다. 먼저 간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만나서 걷게 되는 등 함께 나란히 순례길을 걷는 게 아니라 어느새 자기만의 속도로 각자 걷게 된 것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이 곳까지 와서 함께 걸을 수 없음에 속상해하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순례길도 자기만의 속도로 걸어야 함을 알게 되었고, 또 부부가 무조건 함께 해야 할 게 아니라 때로는 함께, 때로는 또 따로 걷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것이 인생의 이치라는 큰 지혜를 몸소 깨닫는다. 

    말로만 듣던 베드버그를 만나 고생을 하며 점점 알베르게 생활에 익숙해져갔고, 여러 사람들과의 어울림을 불편해 하던 그녀가 어느 새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어울리게 되었으며,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상황의 불편함을 이겨내고 어쩔 수 없는 것들은 그냥 흘러가게 두는 것임을 깨닫게 되며 점점 강인해져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내가 뿌듯했다. 마치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철부지 여동생이 제법 야무지고 옹골차게 성장해서 드디어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감을 지켜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 중 무엇보다 그녀의 가장 큰 성장과정이 있었으니 순례길에서 인생의 지혜를 깨닫게 된 것이다.


 순례길은 정말 인생의 축소판 같다.

삶의 끝엔 죽음이라는 허무함이 남는 것처럼,

어쩌면 이 길의 끝에도 내게는 허무만 남게 될까.

우리가 죽음을 목표로 하고 살지 않는 것처럼

이 길도 완주를 바라보며 걷기보다 

이 여정 자체를 즐겨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중간 생략 )

그런 친구들을 옆에서 쭉 지켜보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하나, 그들의 속도는 내 여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

둘, 그러니 내가 아닌 남과 비교하며 조급해하거나 우쭐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걸 깨닫고 나니 내 속도로 나의 길을 걷는데 마음이 무척이나 편안해졌다.

앞으로 살면서 남과 비교하며 괴로워하는 것으로 

내 인생을 허비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 p. 196~197 中 -

    그녀는 이렇게 46일간 3개의 펜을 쓰며 노트에 일상을 기록하는 야무진 순례길을 완주하고 매 순간 순간의 고생과 감동과 추억을 고스란히 담아 이 책까지 펴내게 된다. 나보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참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남편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순례길을 걷기 위해 떠나고, 힘든 순간순간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삶의 지혜를 터득하며, 잊지 않기 위해 그걸 또 기록하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앞으로의 결혼생활 및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스스로에게 당부하는 당찬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묘한 동질감 및 대리만족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저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 많은 순례길에 관한 책들도 읽지 않고 보이는 족족 다 패스하고 무시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를 보며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나도 그녀처럼 도전해보고 싶고, 이왕이면 더 나이들기 전에 남편과 함께 다녀와야겠다 싶다는 포부마저 생겨난다. 나에게 이런 도전정신을 심어 준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나가는 그녀가 쓴 세계여행 기행문이 또 책으로 출간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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