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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식당 (특별판) ㅣ 특별한 서재 특별판 시리즈
박현숙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7월
평점 :
어릴 때 '전설의 고향'이라는 유명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여름이면 납량특집으로 귀신이 나오고, 무덤이 갈라지고 하는 등 그야말로 오싹한 이야기들을 방영하곤 했는데, 그 더운 날씨에 동생들이랑 이불 뒤집어쓰고 보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 때 '구미호'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한자를 모르던 어린 시절이라 '구미호'가 무슨 뜻인지는 당연히 몰랐고,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가 공중제비를 돌고 입가에 피를 묻혀가며 소나 사람의 간을 먹는 모습들은 유년시절의 나에겐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에는 항상 안내문구가 먼저 나오곤 했다. 어린이나 노약자, 임산부들은 시청하지 말라는 내용의 문구가 꼭 나왔지만 순간 순간 시청자 모두를 놀래키던 순간순간의 명장면들을 놓칠 수 없었기에 꼬박꼬박 챙겨보곤 하던 그 시절이 이젠 추억 속의 한 장면이 되었다.
그 때 무서움에 떨며 본 '구미호'는 내게 '무서운 귀신', '영악한 요물'의 이미지를 각인시켜주었기에 '구미호 식당'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오싹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구미호가 운영하는 식당 이야기인가?' ,'구미호가 식당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유혹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100명을 잡아먹어서 사람으로 환생하는 이야기인가?' 등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보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아저씨'와 '나'는 망각의 강을 건너기 전에 구미호인 '서호'를 만난다. 그리고 서호의 달콤한 제의를 듣게 된다.
" 어차피 다시 살아난다는 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와도 같은 확률이지.
거기에 매달리는 대신 나에게 그 확률을 판다면 훨씬 이익이 될 거야.
확실하게 사십구일 동안의 시간을 보장하거든.
그 시간 동안 이승에 머무를 수 있어.
대가는 오직 뜨거운 피 한 모금이야.
판단은 알아서 하고 결정도 오로지 너희들 몫이야.
예상치 못한 이별 때문에 마음 아프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지?
사십구일의 시간을 버는 거, 그거 쉬운 일 아니다.
나를 만난 것은 행운 중에 행운이야."
- p. 9 -
결국 '아저씨'와 '나'는 각각 뜨거운 피 한 모금과 사십구일을 맞바꾸게 된다. 단, 원래 자신의 얼굴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로 살아야 하며, '서호'가 준비해 준 '구미호 식당'에서만 지내야 하고 문 밖으로 나가게 되면 극도의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 주의사항이었다.
호텔 요리사였던 '아저씨'는 뛰어난 요리 솜씨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게 되었고, 결국 대표메뉴였던 '크림말랑' 이벤트로 인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서지영'을 만나게 된다. '나' 역시 애증의 관계였던 할머니와 이복형을 만나게 되며 '아저씨'와 '나'는 각자 삶의 정리를 다시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서호'가 준 사십구일의 시간이 없었다면 '아저씨'와 '나'는 어땠을까? 아마 원망과 분노, 미움으로 가득한 채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뜨거운 피 한 모금과 바꾼 사십구일은,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함으로 인해 차기차게 식어버린 그 두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사랑이 과도한 나머지 집착이 되어 결국 상대방을 힘들게 만들고 그 부메랑으로 인해 본인의 마음조차 멍이 든 '아저씨'. 가족의 사랑을 받고 싶었으나 늘 거친 말과 욕설을 들으며 따뜻한 정을 느끼지 못한 '나'. 어찌 보면 이들의 모습이 곧 우리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연인, 친구, 자녀 등)을 나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그들을 힘들게 하진 않는지,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 가족들에게 그 감정 쓰레기들을 무단 투척하여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만들지는 않는지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폭이 좁은 책이라 들고 보기에 좋고 금방 한 자리에서 다 읽어지는 책이라 가볍게 읽겠거니 했는데, 웬걸!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여운이 남으며 '죽음'에 관해 이런 저런 사색에 잠기게 한다. 스티브 잡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음'이라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최고의 발명품을 선물로 받아야한다. 거절할 수도 없고 언제 어디에서 받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 작은 한 편의 소설책이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해 무겁지 않게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어디선가 '서호'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을 것만 같다.
" 어때? 순간순간이 귀하다는 거 이제 알겠지? 정신 바짝 차리고 인생 똑바로 살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