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저녁 먹기 전이면 항상 tv 앞에 앉아서 보던 만화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빨강 머리 앤'이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상냥하고 귀여운 빨강 머리 앤~ 외-롭고 슬프지만 굳세게 자라~"
만화영화가 시작되기 전 흘러나오던 주제가를 따라 부르며 어서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까딱 박자까지 맞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정도로 '빨강 머리 앤'은 나에게 있어 그야말로 '인생 만화 영화'였다. 다소 소극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나에게는 씩씩하고 밝고 명랑한 앤이 선망의 대상이자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랬던 추억의 친구 앤이 '5년 일기장'같은 책으로 나를 찾아왔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앤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어서 너무 반가웠다. 마치 나에게 "많이 힘들지? 내가 매일매일 힘이 되어줄게~!" 라고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서둘러 책표지를 넘겨보니 매일매일 앤이 질문 한 개씩을 던지고 있는데, 5년동안 같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한글 뿐 아니라 영문으로도 질문을 제시하고 있어서 영어 공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어로 답을 써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한 번 씩 영어로 쓰고 싶은 날에 영어로 답을 써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렇게 질문에 대한 답을 또박또박 정성껏 쓰다보니 정말 앤과 둘이서만 대화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안그래도 최근 직장일도 바쁜데다 4월에 있을 이사준비로 몸과 마음이 정신없이 바쁜데 공교롭게도 25일 질문이 '이번 주에 가장 무리했던 일은 뭐였어?'였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만난 앤에게 요즘 힘들었던 일들을 가볍게 털어놓았다. 그야말로 힐링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 어떤 질문이 있는지 내심 기대가 되어 페이지 너머 빼꼼히 고개 들이밀고 보고 싶기도 했다.
매일매일 앤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참 좋은데, 이렇게 주고받는 걸 무려 5년이나 할 수 있다니 너무 든든하다. 5년 동안의 힐링을 저축해 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젠 표지만 봐도 표지 그림 속 앤처럼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난 아직도 앤의 열렬한 팬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라 그런지 평생친구처럼 언제 봐도 좋은 앤! 그래서 나의 물건들 중에는 '빨강 머리 앤' 캐릭터가 그려진 게 많다.
머그컵, 다양한 접시들, 가방, 카드수첩, 에어팟 케이스, 머리끈, 책갈피, 휴대폰 케이스, dvd, 탁상달력....... 이젠 이 책까지 도합 11종류이다. 요즘 나는 이사준비로 미니멀 리스트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 물건들은 절대로 처분할 생각이 없다. 안그래도 딸아이가 엄마는 어른이면서 무슨 만화 캐릭터 그림을 좋아하냐며 갸우뚱거린다. 나에게 있어 앤은 그냥 만화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다. 나의 힘든 시절을 함께 보내 준 소울 메이트이다. 그런 친구가 5년 간 나에게 와서 하루에 하나씩 나를 찾아가는 질문들을 던져 준다고 생각하니 너무 행복하다. 앞으로 5년간의 시간들이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