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랜드에 있는 앨리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너나 없이 활발하고 어린이'다운' 소녀를 떠올린다. 그런데 루이스 캐롤이 누구를 모델로 이야기를 썼는지를 들여다보면 조금 달라진 감각을 갖게 된다. 루이스 캐롤은 자신의 본명을 라틴어로 재해석하면서 만든 이름이고, 앨리스는 자신이 근무하던 직장 상사인 수학과 학과장의 둘째 딸을 그려낸 인물이다. 캐롤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 앨리스는 빅토리아시대에는 흔하디 흔한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캐롤에 의해 표현된 앨리스는 학대자의 시선 아래 노출된 가엾은 인물이 아니다. 앨리스를 그리는 캐롤의 전개에는 탁한 욕망의 관점이라고 하기에는 또 다른 차원의 시선들이 있다. 앨리스는 하트 여왕이 목을 치라는 명령을 내릴 때 조차 강압에 맞서는 용기를 가진다. 시대는 순진무구한 덕목으로 치장된 소녀상을 요구하지만,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앨리스는 동시대의 비동시성을 표현하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캐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원더랜드에서 마지막 하얀 기사의 등장은 예정되어 있었다. 하얀 기사는 앨리스를 돕고자 한다. 아니 구원하고자 한다. 앨리스가 여행 중 제일 먼저 떠올리는 장면이 하얀 기사의 부드럽고 친절한 미소였다는 사실은 뭔가 시사적이다. 그러나 캐롤은 수학자답게 혹은 현실주의자답게, 앨리스를 하얀 기사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지 못한다. 캐롤은 거꾸로 가는 세상에서 모험을 해야 할 앨리스를 위한 이야기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알 수 있을까. 어떤 세상에 서 있음이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장치라도 되는 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문학이라는 세계가 어떻게 삶을 흔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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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코레트 2025-07-2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쓴 글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아챌 감각이 동시대성인지 반시대성인지 헷갈리고
싸구려 글이 갖는 효용이 싸구려 커피만큼 있다면
 

<브뤼메르 18일>은 워낙에 잘 알려진 역사가 반복된다는 문구로 자주 불려나온다. 그런데 '반복'이라고 말하지만 동일하게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다시 돌아오는 역사란 무엇일까. 이상한 문법인데 또 자연스럽다. 무엇이 반복인지 어떻게 반복인지 반복해 묻게 된다.


"영원한 재출발의 철학자" 마르크스는 "잘 팠다, 늙은 두더지여!"를 외치면서 끝없이 새로 시작하고자 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무력해지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마르크스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마르크스'의 생명이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십 년 전의 내가 그랬듯이- 자본주의라는 무대는 사라지지 않을거고, 그래서 마르크스 변증법도 소멸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조언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십 년 후 내가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믿는 편인데- 마르크스는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에서 잠들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을 담론의 질서 위에 올려놓으면서, 국가도 정치도 경제도 심지어 인간도 계속 갱신되어야 할 대자적 무엇에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마르크스가 다룬 특별한 서사로서 '혁명주체'는 역사와 사회 앞에서 성숙한 계급 구성원으로서 분열 모순을 극복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통해 혁명적 국가를 구상한 사회개혁가였는가.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비관적 역사 과정에서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들을 냉소적으로 채색하는 현실주의 연구자에 가깝다. 이런 생각 덕분에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은 하나의 궤로 읽혀지기를 거부한다. 그는 역사 기억을 무대 위로 옮겨 온 후 온갖 셰익스피어적 배우들을 동원한 인간극을 반복한다. 마르크스는 영웅의 역할을 수행한 보나파르트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시대 정세 속에서 사회적 관계들에 집중한다


P. 158 역사적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마르크스는 '투쟁'이라고 답했다. 마르크스 당대의 현실을 볼 때 그 투쟁은 노동계급의 해방을 통한 자유를 향해 있었을 것이다. 유럽 내 혁명가들에게 공산주의란 하나의 국가정치체가 아니었다. 국제 연대는 그렇게 아슬아슬한 형태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마르크스와 투쟁가들의 혁명전은 짧았고 무참했다. 브뤼메르 18일을 쓰게 된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미리 말하고 싶었을까. 저 무수한 나폴레옹들이 싸워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싸움을 투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을까. 


1871년 노동자 자치정부를 이끌고 끝까지 코뮌을 지키려다 살해당한 파리코뮌의 노동자들은 '투쟁-존재'를 실제로 증명한다. <프랑스 내전>에서 이러한 마르크스의 관점이 투명해 보인다. 투쟁-존재는 희망사항이 아니라 현실존재였다. 그런데 무수한 나폴레옹들이나 그를 지지했던 농민들은 어떤가. 자본주의적 부패를 끌어가는, 전쟁을 도구삼아 권력을 쟁탈하려는 세력들은 어떤가. 그들이 자신들을 위한 필연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다면 주장한다면 그들은 어째서 투쟁-존재가 아닐 수 있는가. 마르크스 입장에서 투쟁은 역사를 만드는 일이며, 그것은 추상적 인류애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투쟁-존재는 역사를 세우는 실천 주체이다. 이 주체들은 인간 본질로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무엇을 찾으려면 자기자신을 찾으려는 무대가 필요하게 된다. 


더불어 '두더지'는 어떻게 투쟁-존재가 될 수 있는가. 무조건 실천하는 주체를 우선시 할 수도 없다는 숙고의 표현으로 사용된다. 말없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두더지의 전진이야말로 투쟁-존재의 반성적 실천의 모습이다. 예니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도 두더지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고 한다.  


“모든 곳에서 지진의 신호가 보이고 사원과 상점이라는 기단 위에 서 있는 사회의 와해 신호가 도처에서 보이지 않니? 나는 시대의 두더지(Der Maulwurf Zeit)가 더 이상 지하를 파지(wühlen) 않을 거라고 믿어.”


이 시대의 두더지들은 무수하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출현하지 않는 듯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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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새벽>을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예약자 5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늘 크고작은 놀람을 안겨주는 저술가이므로 별난 일이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처럼 '독서'를 주저하는 시대에 예약자 5인은 와~하게 만든다. 그레이버가 유명 연구자라서? 아니면 새로운 계몽이 도래할 시대에 머무를 자리를 지시하는 예고편일 수 있어서? 


그레이버는 <부채 ...>에서 자유노동을 통한 인간 존엄을 가치 이론으로 설명했다.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 명예에 기반한 인간 경제론은 화폐가 만든 비인간화된 부채 경제가 어떤 폭력을 토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대조적으로 추적한다. 그러면서 "전적인 선물 경제나 전적인 상품 경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다시 모스에게로 되돌아간 그레이버는 비판이론이 황량한 세계, 파괴된, 찌그러진 세계만을 비춰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레이버가 전개하는 인류학적 비판이론은 이분법을 넘어선 (무한한) 사회적 관계의 확장에 닿는다.


* 그레이버의 책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매하고, 작은 서재방에서 불어오는 새소리를 벗삼아 책장을 넘기며 새로운 비판이론을 창작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러러면 얼마나 벌어야 할까. 단칸 월세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에 인문서들의 책값이 두렵다. <자본을 읽자>는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이 거절되더라. 이 시대는 온갖 것들이 경연하고, 수많은 가능성들이 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지만, 내가 취할 수 있는 생활은 그런 것들을 대부분 허용하지 않는다. 현대 비판이론은 그레이버의 <불쉿잡>의 지적처럼 노동 가치가 복원될 수 있는 밧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상황은 가뭄으로 말라 생기를 품을 수 없는 대지처럼 건조하다. 얼마전 성원권과 환대를 주장하던 베스트셀러 작가가 부정선거를 주장한 글을 올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론의 쓸모가 무엇인가를 더 회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자리가 있으리라 믿는 한 줌의 숨이 아직은 붙어있다. 낮술 한 잔과 그레이버의 <모든 것의 새벽>에 몇 마디 주절거린다. 장식 없이 살아도 괜찮은 세상을 희망한다.



"P. 339

이런 식으로 볼 때 ‘농경의 기원’은 경제적인 변천이라기보다는 미디어 혁명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또한 텃밭 농사에서 건축, 수학, 열역학에 이르는, 그리고 종교에서 젠더 역할의 재규정에 이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회적 혁명이기도 하다. 이 신세계에서 누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여성의 작업과 지식이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서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전체 과정은 환경적 재앙이나 인구통계학적 위기 상황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라 매우 여유 있고 장난스럽기까지 했고 대규모의 폭력적 갈등은 눈에 띄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들은 모두 근본적인 불평등이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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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피노키오와 자라지 않는 세상에서 무럭무럭 커지는 aaa, 자기증식 드라이브를 썼었다. 당시 썼던 글을 찾아내 캡쳐도구를 사용해서 자기증식을 해봤다. 피노키오는 꼭두각시 인형이지만 역경을 이겨내 훌륭한 소년이 된다. 목수인 제페토가 정성으로 빚은 까닭에 때로는 아담의 은유로 받아들여지기 한다. 인간 소년이 되기 위해 배우고 익힌 사회적 약속은 피노키오를 진짜-사실이 되도록 한다.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자란다. 증식한다. 나는 늘 자기증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무릎을 치곤 했다. 하얀 거짓말, 분홍 거짓말, 검은 거짓말 등 많은 거짓말은 선함과 약함의 구속과 충돌지점을 표시할 뿐 도덕적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아감벤이 <피노키오의 모험>의 인형은 사람도, 가면도 아닌 '어떻게'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피노키를 통해 인간다움의 의미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기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생명철학자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을 통해 알려진 정치철학자다. 피노키오가 마지막에 내뱉은 말을 자꾸 되풀이한다. “꼭두각시였을 때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 


소개말 중에서) "더 나아가 아감벤은 말한다. 동화이길 거부하지만 동화스러운 이 이야기는 하이브리드 문학의 전형이라고. 세상에 ‘내던져진’ 나무토막이 그 본성에 어긋나는 근대 질서와 규약, 제도를 거부하고, 꿈속의 꿈 이야기로 마무리되면서, 인간성에 대해 되묻는다고. 언제나 놀라운 메시지를 던지는 사상가 아감벤은 이번 책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문학적’으로 통찰한다.

아감벤은 인간 내면에 야생성, 동물성, 인간성이 있는데 섞여 있지 않고 접촉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이 야생으로부터 동물로, 그리고 현재 모습의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피노키오가 그렇듯 변한 적이 없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꼭두각시가 인간이 된 적은 없는, 둘이 분리된 채 끝나는 피노키오 서사는, 인간을 정의하는 근대성이라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거나 혹은 오작동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언제나 그렇듯 ‘생명철학자’ 아감벤만이 전할 수 있는 놀랍고 충격적인 메시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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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들고 한번 흔들자 여러 장의 얇고 조그만 티슈들이 우슈슈 쏟아져 나왔다. 어느 의자에 걸터앉아 건들거리는 나뭇잎들을 올려다 보느라 읽은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한 장의 휴지를 끼워넣은 데서 시작했다. 다음에도 뭔가 표시할 방법이 없어 처음 썼던 휴지를 조각 내서 끼워넣은 탓에 이래저래 책이 두툼해지고 말았다. 휴지로 만든 벽에 한숨이 고이고 나뭇잎과 건들거림이 묻어서 더 축축해지고 있었다. <개념의 정념들> 읽기 시작한 지 꽤 되어간다. 수많은 괄호에 지치기도 하고 되돌이표를 얹은 자동피아노가 연주되는 듯도 하는 동안 비가 열 번은 내린 듯하다. 이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왜 계속 읽어야 하는지를 내게 묻고 싶었다. 



<개념의 정념들> 읽기 두 번째 걸음은 역사와 진리를 따로 물어야 하는지에 있다. 우리에게 심상하게 들리는 '진리의 역사'라는 단정에는 뭔가 마음을 옭아매는 매듭들이 있다. 발리바르는 파스칼의 "교회의 역사는 진리의 역사라 고유하게 불려야 한다"를 여러 각도로 파헤치며 다시 또 묻는다. '진리의 발명'을 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전통'을 확신하는 성 이레네오 등을 뛰어넘어 가로지르는 파스칼의 언명에는 시대의 저울추가 기울었음을 느끼게 한다. 


"타락과 구원의, 혹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에 관한 예언적 역사는 역사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하나의 표시물을 제시하는데 진리의 역사와 혼동되지 않는다"


파스칼에게는 신앙의 권위와 신비가 교회라는 제도와 어긋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파스칼은 정신의 질서로 물체들의 질서를 사유할 수는 있다고 말하면서도 비가시적인 아가페적 질서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실증과학에 박식한 파스칼은 수학적 사고 형식으로도 얼마든지 신앙을 빛 속에 세울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파스칼은 데카르트가 형이상학으로 구성한 세계에 있기를 거부한다. 이성을 신앙으로 통합하는 파스칼은 무엇을 하기 위해 인간 정신의 질서가 세워져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성과 신앙을' 통합하는 게 아니다.


역사를 배운다고 할 때 먼저 떠오르는 장은 사건과 실재다. 교회의 역사라고 하면 경험적인 역사 속에서 기원과 기능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교회라는 제도는 자기자신의 권위를 어떻게 확보했는가. 이단을 규정하고 처단할 정당성을 판가름하던 질서를 교회의 역사로 취급할 수 있는가. 오늘날 교회를 놓고 보자면 교리와 믿음의 질서를 구현해내면서 진리를 생산하는 교회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파스칼의 시대가 남달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초월적 장소를 열망하는 정신운동을 교회의 역사 속에 마련하고자 한 의도는 확실하다.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위해서 성령 자신이 계시한 신앙의 신비를 위해 감각과 이성에 감춰진 신비들에 우리의 믿음을 이끄는 이런 정신의 복종을 남겨둔다."(노엘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중)


아무래도 발리바르는 대립물의 일치를 구성적으로 보여주려 한다. [캉길렘의 정식은 "진리의 역사만을 만들고자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의 허상적 역사를 만들어 버린다. 진리만의 역사란 모순적 통념이라는 보그단 수호돌스키 씨의 주장은 이 점에서 옳다." 그 공통점은 진리의 역사가 오류의 역사를 통과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벤치오 베리타치스와 그 전진을 설명하는 진정한 방식이다.]


교회를 경험적 역사 과정으로부터 분리해서 종교적 신비 그 자체로 곧 추상적이고 완전한 진리로 전제하면 교회의 정의는 어디에 위치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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