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새벽>을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예약자 5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늘 크고작은 놀람을 안겨주는 저술가이므로 별난 일이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처럼 '독서'를 주저하는 시대에 예약자 5인은 와~하게 만든다. 그레이버가 유명 연구자라서? 아니면 새로운 계몽이 도래할 시대에 머무를 자리를 지시하는 예고편일 수 있어서? 


그레이버는 <부채 ...>에서 자유노동을 통한 인간 존엄을 가치 이론으로 설명했다.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 명예에 기반한 인간 경제론은 화폐가 만든 비인간화된 부채 경제가 어떤 폭력을 토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대조적으로 추적한다. 그러면서 "전적인 선물 경제나 전적인 상품 경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다시 모스에게로 되돌아간 그레이버는 비판이론이 황량한 세계, 파괴된, 찌그러진 세계만을 비춰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레이버가 전개하는 인류학적 비판이론은 이분법을 넘어선 (무한한) 사회적 관계의 확장에 닿는다.


* 그레이버의 책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매하고, 작은 서재방에서 불어오는 새소리를 벗삼아 책장을 넘기며 새로운 비판이론을 창작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러러면 얼마나 벌어야 할까. 단칸 월세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에 인문서들의 책값이 두렵다. <자본을 읽자>는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이 거절되더라. 이 시대는 온갖 것들이 경연하고, 수많은 가능성들이 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지만, 내가 취할 수 있는 생활은 그런 것들을 대부분 허용하지 않는다. 현대 비판이론은 그레이버의 <불쉿잡>의 지적처럼 노동 가치가 복원될 수 있는 밧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상황은 가뭄으로 말라 생기를 품을 수 없는 대지처럼 건조하다. 얼마전 성원권과 환대를 주장하던 베스트셀러 작가가 부정선거를 주장한 글을 올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론의 쓸모가 무엇인가를 더 회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자리가 있으리라 믿는 한 줌의 숨이 아직은 붙어있다. 낮술 한 잔과 그레이버의 <모든 것의 새벽>에 몇 마디 주절거린다. 장식 없이 살아도 괜찮은 세상을 희망한다.



"P. 339

이런 식으로 볼 때 ‘농경의 기원’은 경제적인 변천이라기보다는 미디어 혁명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또한 텃밭 농사에서 건축, 수학, 열역학에 이르는, 그리고 종교에서 젠더 역할의 재규정에 이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회적 혁명이기도 하다. 이 신세계에서 누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여성의 작업과 지식이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서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전체 과정은 환경적 재앙이나 인구통계학적 위기 상황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라 매우 여유 있고 장난스럽기까지 했고 대규모의 폭력적 갈등은 눈에 띄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들은 모두 근본적인 불평등이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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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피노키오와 자라지 않는 세상에서 무럭무럭 커지는 aaa, 자기증식 드라이브를 썼었다. 당시 썼던 글을 찾아내 캡쳐도구를 사용해서 자기증식을 해봤다. 피노키오는 꼭두각시 인형이지만 역경을 이겨내 훌륭한 소년이 된다. 목수인 제페토가 정성으로 빚은 까닭에 때로는 아담의 은유로 받아들여지기 한다. 인간 소년이 되기 위해 배우고 익힌 사회적 약속은 피노키오를 진짜-사실이 되도록 한다.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자란다. 증식한다. 나는 늘 자기증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무릎을 치곤 했다. 하얀 거짓말, 분홍 거짓말, 검은 거짓말 등 많은 거짓말은 선함과 약함의 구속과 충돌지점을 표시할 뿐 도덕적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아감벤이 <피노키오의 모험>의 인형은 사람도, 가면도 아닌 '어떻게'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피노키를 통해 인간다움의 의미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기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생명철학자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을 통해 알려진 정치철학자다. 피노키오가 마지막에 내뱉은 말을 자꾸 되풀이한다. “꼭두각시였을 때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 


소개말 중에서) "더 나아가 아감벤은 말한다. 동화이길 거부하지만 동화스러운 이 이야기는 하이브리드 문학의 전형이라고. 세상에 ‘내던져진’ 나무토막이 그 본성에 어긋나는 근대 질서와 규약, 제도를 거부하고, 꿈속의 꿈 이야기로 마무리되면서, 인간성에 대해 되묻는다고. 언제나 놀라운 메시지를 던지는 사상가 아감벤은 이번 책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문학적’으로 통찰한다.

아감벤은 인간 내면에 야생성, 동물성, 인간성이 있는데 섞여 있지 않고 접촉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이 야생으로부터 동물로, 그리고 현재 모습의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피노키오가 그렇듯 변한 적이 없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꼭두각시가 인간이 된 적은 없는, 둘이 분리된 채 끝나는 피노키오 서사는, 인간을 정의하는 근대성이라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거나 혹은 오작동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언제나 그렇듯 ‘생명철학자’ 아감벤만이 전할 수 있는 놀랍고 충격적인 메시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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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들고 한번 흔들자 여러 장의 얇고 조그만 티슈들이 우슈슈 쏟아져 나왔다. 어느 의자에 걸터앉아 건들거리는 나뭇잎들을 올려다 보느라 읽은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한 장의 휴지를 끼워넣은 데서 시작했다. 다음에도 뭔가 표시할 방법이 없어 처음 썼던 휴지를 조각 내서 끼워넣은 탓에 이래저래 책이 두툼해지고 말았다. 휴지로 만든 벽에 한숨이 고이고 나뭇잎과 건들거림이 묻어서 더 축축해지고 있었다. <개념의 정념들> 읽기 시작한 지 꽤 되어간다. 수많은 괄호에 지치기도 하고 되돌이표를 얹은 자동피아노가 연주되는 듯도 하는 동안 비가 열 번은 내린 듯하다. 이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왜 계속 읽어야 하는지를 내게 묻고 싶었다. 



<개념의 정념들> 읽기 두 번째 걸음은 역사와 진리를 따로 물어야 하는지에 있다. 우리에게 심상하게 들리는 '진리의 역사'라는 단정에는 뭔가 마음을 옭아매는 매듭들이 있다. 발리바르는 파스칼의 "교회의 역사는 진리의 역사라 고유하게 불려야 한다"를 여러 각도로 파헤치며 다시 또 묻는다. '진리의 발명'을 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전통'을 확신하는 성 이레네오 등을 뛰어넘어 가로지르는 파스칼의 언명에는 시대의 저울추가 기울었음을 느끼게 한다. 


"타락과 구원의, 혹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에 관한 예언적 역사는 역사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하나의 표시물을 제시하는데 진리의 역사와 혼동되지 않는다"


파스칼에게는 신앙의 권위와 신비가 교회라는 제도와 어긋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파스칼은 정신의 질서로 물체들의 질서를 사유할 수는 있다고 말하면서도 비가시적인 아가페적 질서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실증과학에 박식한 파스칼은 수학적 사고 형식으로도 얼마든지 신앙을 빛 속에 세울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파스칼은 데카르트가 형이상학으로 구성한 세계에 있기를 거부한다. 이성을 신앙으로 통합하는 파스칼은 무엇을 하기 위해 인간 정신의 질서가 세워져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성과 신앙을' 통합하는 게 아니다.


역사를 배운다고 할 때 먼저 떠오르는 장은 사건과 실재다. 교회의 역사라고 하면 경험적인 역사 속에서 기원과 기능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교회라는 제도는 자기자신의 권위를 어떻게 확보했는가. 이단을 규정하고 처단할 정당성을 판가름하던 질서를 교회의 역사로 취급할 수 있는가. 오늘날 교회를 놓고 보자면 교리와 믿음의 질서를 구현해내면서 진리를 생산하는 교회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파스칼의 시대가 남달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초월적 장소를 열망하는 정신운동을 교회의 역사 속에 마련하고자 한 의도는 확실하다.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위해서 성령 자신이 계시한 신앙의 신비를 위해 감각과 이성에 감춰진 신비들에 우리의 믿음을 이끄는 이런 정신의 복종을 남겨둔다."(노엘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중)


아무래도 발리바르는 대립물의 일치를 구성적으로 보여주려 한다. [캉길렘의 정식은 "진리의 역사만을 만들고자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의 허상적 역사를 만들어 버린다. 진리만의 역사란 모순적 통념이라는 보그단 수호돌스키 씨의 주장은 이 점에서 옳다." 그 공통점은 진리의 역사가 오류의 역사를 통과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벤치오 베리타치스와 그 전진을 설명하는 진정한 방식이다.]


교회를 경험적 역사 과정으로부터 분리해서 종교적 신비 그 자체로 곧 추상적이고 완전한 진리로 전제하면 교회의 정의는 어디에 위치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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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를 향한 의심의 조각들은 여전하다. 마키아벨리의 '주저 없이 사악해지라'는 발언에 비난도 숭배도 따라 다녔다. 독점적 지배욕에 파묻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자기 영혼의 타락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는 맥락에 이르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라는 영웅을 요청하는 셈이다. 여러 독자들은 마키아벨리의 필요에 따른 정치 기술 '교활한' 전략에 놀라면서도, 그가 과거 역사를 교훈적이고 고른 평면으로 만들지 않고 낯설게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 흥미를 가졌다.


마키아벨리 독자로서) 발리바르의 특색은 비대칭적 관계 성립 과정에서 권력을 사유하며 현 정세를 파악하고 담론을 전위시키는 인식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데 있다. <개념의 정념>이라는 관념의 발생은 마키아벨리를 적대를 함축하는 권력론의 저자로 설명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마키아벨리가 영향을 미치길 희망하는 독자들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글을 쓰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인민에게 글을 쓰고 있다는 루소의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이 모든 장소들에서의 모든 부분들이라고, 하지만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그러하다고 말하고자 한다. 나는 저술가로서의 마키아벨리가 하나의 유일한 텍스트, 하지만 서로 다른 두 독자 집단을 위한 서로 다른 두 의미를 내포하는 하나의 유일한 텍스트를 구성하기에 성공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가 "글쓰기의 양식 위에서 자신의 현행성"을 구성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그가 공화주의자냐 아니냐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게 된다. 


* 공쟝쟝님 서재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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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테뉴는 왕정을 쫓아낸 자리에 새로운 군주를 앉히려고 발버둥치는 여론을 비판했다. 신도들이 마비된 이성으로 "앙심과 탐욕"을 의무로 둔갑시키는 여론과 관습에 중독되어 있다고 봤다. 그런 의미에서 몽테뉴 이성은 지배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다. 
  • 몽테뉴에게 세계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그네와 같다. 자기자신에게서 변덕스러운 형상을 발견하게 되는 인식만이 자신을 개방적인 세계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성적 존재가 아닌 불완전하고 터무니 없는 존재로서 인간을 해석했다.
  • 그래서 몽테뉴에게는 하나의 사회가 만든 정상성이 다른 사회에서는 비정상과 타락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했다. 몽테뉴의 이런 개방적 회의주의는, 어쩌면 스스로가 지닌 병을 진단할 수 있어야만 타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또다른 여론과 관습에 취한 것일 수도 있다. 

  • 그보다는 몽테뉴 시대가 만들어 낸 어떤 분열이 있었음을 직시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 109) 
  • "우리는 어떤 풍습에 대해 내적으로 완벽하게 자유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  외적으로는 그 풍습에 대해 전적으로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 몽테뉴는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지켜야 할 규칙 중의 규칙이며 
  • 법률 중의 법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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