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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한껏 부풀려진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야생의 삶을 결코 잊지 못하는 존재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그냥 동물로 인식하고 싶어한다. 『노루인간』의 다음 구절을 보자. "열일곱 살이 되자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숲에서 보내기로 작정했어. 그리고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치르는 날에 반항심은 절정에 달했어." 저자는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홈스쿨링을 해야 했던, 사회부적응으로 문제를 겪는 소년이었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생활세계에서도 인간의 굴레가 족쇄처럼 주어져 있다고 느꼈다. 그러던 저자는 숲이 자신을 맞이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노루와 같은 동물들과 섞여 살면서 비로소 "나를 사물의 질서 속에 있는 나의 진정한 자리로 되돌려 주었"다고 고백한다.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책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동물의 관계를 구축한 저자의 경험은 탈자본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영감이 될 수 있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수사슴과 정면으로 마주쳤어. 늦여름에 사슴이 빽빽 우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과감하게 다가간 적은 없었어. 열 살 짜리 소년에게 한밤중에 들리는 거친 울음소리는 너무나 위협적이었어.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나는 겁이 나서 돌처럼 굳어버렸어. 내 앞 1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육중한 몸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진동하면서 내는 그 생물이 발산하는 힘에 압도당하고 말았어. 심장이 얼마나 쿵쿵 뛰던지 그 소리가 수백 미터 주위에서도 들릴 지경이었어. 돌연 그가 나를 향하더니 쉰 목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어.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암사슴들이 그보다는 조금 낮지만 강력한 소리로 화답하기 시작했어.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덜덜 떨렸어. 하이파이 시스템의 저주파처럼 말이야. 마침내 수사슴이 방향을 바꾸었어. 나도 뒤돌아섰어. 그 수사슴 때문에 거기 갔던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이었어. 숲의 우여곡절이 두 존재를 만나게 했듯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어. 얼마 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면서 그 수사슴이 내 짧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교훈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동물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야 했어. 야생이 세계는 초심자에게는 문을 열지 않아. "(『노루인간』)


그렇다면 이 책의 소개말에서  "우리는 자연에 복종함으로써만 자연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보자.  늑대를 개로 길들이듯이 노루를 길들이지 않고, 자신의 몸을 노루에 맞춰 길들임으로써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나무랄 데가 없는 해석같기도 하다. 또 인류세로 접어든 인간의 반성과도 같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자면 자연에 대한 뭔가 초월적인 믿음으로도 들린다. 저자가 노루와 함께 했던 7년의 생활에 대해서는 상상력 말고는 달리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왜 그곳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는 더듬거리며 이해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모아놓은 다음의 말들도 읽어본다.  "무례한 인간의 행동, 숲의 삶을 더 큰 관점에서 생각, 우리 행성 지구의 미래에 대한 존중이라는 기쁨과 걱정, 종種 간의 사려 깊은 동거의 의미 ..." 등은 "도토리를 주워 먹고, 이슬을 받아 물을 마시고, 노루처럼 낮에 쪽잠을 자고, 감기약으로 담쟁이덩굴과 소나무 싹으로 치료를 하며, 노루를 따라 하루 5킬로 정도 이동하며 생활한 7년"동안에도 인간의 <그것들>을 버릴 수 없었음이 아닐까.



절반의 인간, 절반의 노루가 아니다. 노루였던 인간의 고백에서 소외된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낯설음도 없어 보인다. 이토록 이색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저자의 경험을 기꺼이 껴안기 꺼려지는 이유는 아마도 노동하는 인간과 노루의 노동의 간격에 닿아 있다.  인간소외의 문제를 고민하던 마르크스가 자연법을 뛰어넘을 때 중시했던 노동개념을 꺼내들어온다. 노루인간과 기계인간은 노동의 소외를 제거할 수 있을까. 


"더욱이 자연과의 상호 작용은 너무나 긴밀하고 실존적으로 내밀해서, 우리는 자연을 인간 신체의 “비유기적” 확장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노동할 때 자연은 인간적 보철prosthesis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볼 때, 마르크스는 인간들에 관한 최근의 논쟁, 즉 기술을 사용해서 사이보그가 되는 인간들에 관한 논쟁을 [일찌감치] 예견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자연과 관계할 때 이용하는 기계들은 우리의 살만큼이나 우리 신체의 일부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살은 단지 '웨트웨어wetware의 일종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생산으로서의 노동 개념은 아주 급격히 확장된 인간 개념, 즉 자연 전체를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로 통합할 정도로 확장된 인간 개념을 낳는다. 우리 자신의 활동에서 낯설어지면서, 우리는 또한 우리 노동이 포괄하는 더욱 확장된 형태의 인간으로부터도 낯설어진다[소외된다]." (『하우투리드 마르크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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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초원님에게 생스투유~ 책 담아갑니다

초원 2021-11-16 12:18   좋아요 1 | URL
이런 한갓진 곳까지 걸음 해주셨네요.
반갑습니다.

저도 며칠 전 프레이야 님이 올려주신 만요슈, 잘 읽었답니다.
책의 기운을 널리 전하시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이번 주는 따뜻하네요.
고맙습니다.
 

1.

시장과 '조직'은 자본주의 사회를 근거짓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시장의 가능성들이란 …  오늘 아침의 저 푸르고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만끽하는 모든 생물들에게 닿았던, 자유의 향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조직으로부터 시장'이라는 생산양식이 짙게 응축된 봉합경제에서는, 그 편향성으로, 뭉게 구름이 뛰노는 저 하늘마저 즐길 수 없도록 노동자를 몰아대고 있다. 


'신봉건주의'적 틀로 해석하게 될 때야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회의 양상에 주목하길 바랐다. 봉합경제에서는 대결해야 할 지점이 뚜렷하다. 시장을 비판할 게 아니라 '조직'에 주목해야 했다. 누구도 홀로 시장에 참여하지 않는다. 한 명의 자본가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 창의적 아이디어를 마구 쏟아내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날만큼 댓가가 주어질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한 명의 노동자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을 쉬지 않고 노동운동을 하더라도 그 영향은 그렇게 커지지 않는다. 한 명의 학자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을 계급론과 노동가치설을 연구해 보고서를 써내더라도 그 실재는 크게 진동하지 않는다. 주체를 예속적 위치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핏대를 세울 게 아니라, 개체들의 놀이터, 쉼터, 일터, 공터를 돋워야 했다. 체계나 제도, 질서 등의 무생물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생물에 주목해야 했다. 위계질서로 고착된 조직은 '조직'이라 부를 수 없다. 주체를 세울 수 있는 곳은 노동자, 한 사람의 내면이 아니라, '조직'이다. 조직의 주체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역사는 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조직'들의 출현으로 전도된다. 이것이 하나의 계급이다. 


현대 신봉건주의에 상존하는 계급이 있다면 당연히 '시민'이다. 산업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에 부르주아는  여러 굴절을 겪으면서 와해되었다. 부르주아지라고 부를 계급은 이미 제도적으로 체계로 흡수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유연한 '조직'이었다. 부르주아지는 한 명의 부르주아가 변절하느냐에 합류하느냐에 따라 흔들리지 않았다. 그랬다면 계급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조직'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노동이 그들의 생존지위를 흔들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누구나 노동자다. 아이가 태양에게 묻는다. 어제도 그제도 어디갔어요? 하루종일 비만 내렸어요. 태양은 답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느 순간 알게 될 게다.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노동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노동을 어떤 위치에 놓던지 간에 항상성을 갖는 노동자의 위치는 인류 성립의 본질이다. 노동자가 일터로 가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그곳은 일터가 아니라 전쟁터다. 노동자는 적극적으로 생산계약에 참여해야 한다. 그 계약은 근무시간과 보수에 한정하는 고용계약이 아니다. 모든 생산은 사회적 생산이므로, 계약은 총체성을 지녀야 한다. 


2.

하나의 문제틀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 수십 번 대지가 붉으락푸르락 변해가고 있었는데, 아직도 끄적거리고 웅얼거리고 더듬더듬 짚기만 한다. 지지부진 하다가 간혹 참조할 흥미로운 책이나 자료를 발견하게 되면 다시 뽀드락지 올라오듯 서술 욕구가 솟아난다. 지난 달 『불쉿 잡』 목차를 보다가도 그랬다. 세상의 쓸모 여부로 직업을 바라보는 일이 탐탁치 않지만, 경험적이며 실증적인 온갖 자료들을 하나의 문제틀로 만들어 가는 작업은 여전히 힘을 만든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를 신청하려고 했더니 이미 누군가 대출중이었다. 예약을 걸어 놓고 기다리다가 며칠 전 대출해 왔다. 눈대중으로 읽었고 어떤 부분은 착실하게 짚어가며 다시 읽으려 한다. 역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답게 1장에 “마피아 행동 대원은 왜 불쉿 직업이 아닐까?”다. 불쉿 직업이 종사자에게 어떤 고통을 유발하고 있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여러 번 반복되는 사실 중 하나는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을 불쉿이라고 여기면서 정신적 폭력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레이버가 던진 이 문제의식을 한 자락 잡고서 불쉿 직업과 노동 존엄성과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봐야겠다. 그런데 불쉿 직업의 확장이 자본주의의 위기인지 부흥인지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책을 기다렸던 이유인 7장의 “경영 봉건제도하의 정치와 문화는 '원망의 균형'으로 유지된다”의 한 단락이다. 


"경제의 금융화와 정보산업의 만개, 그리고 불쉿 직업의 확산 사이에는 원천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기존 자본주의 형태의 재측정이나 재조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방식으로 과거의 것들과 깊은 단절을 가져왔다. 이렣게 말할 수도 있겠다. 불쉿 직업의 존재가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 증식하는 한 가지 이유는 현재 시스템이 자본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아니면 적어도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혹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 밀턴 프리드먼의 연구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자본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점점 더 지대 추출 시스템rent extraction으로 변해간다.


이 시스템의 내적 논리, 마르크스주의자가 좋아하는 표현으로는 이 시스템의 “운동 법칙”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경제와 정치의 필수 조건들이 대체로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이것은 영주, 봉신, 가신의 끝없는 계층제를 만들어 내는 똑같은 성향을 드러내는 중세의 고전적 봉건제도와 닮았다. 다른 면에서는(특히 그 경영주의적 에토스는) 심오하게 다르다." (313~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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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는 머루밤이다. "門을 연다 머루빛밤한울에 송이버슷 내음새가 났다"에 가깝다. 검은밤이 아니라 머룻빛 밤이다. 새송이버섯은 알지만 송이버섯 냄새는 모른다. 그래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백석의 시는  머루 밤의 말방울 소리다. 소금을 나르는 당나귀가 서둘러 돌아오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머루 밤만 그득하다. 


여우난곬족族첫 머리는 명절날 엄매 아배 따라 큰집으로 가는 아이가 있다. 아이를 따라 개도 간다. 


"저녁술을놓은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달리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하고 숨국막질을하고 꼬리잡이를하고 가마타고시집가는노름 말타고장가가는노름을하고 이렇게 밤이어둡도록 북적하니논다"


「오리 망아지 토끼」에는, 아배 지게 위에 올라타 산으로 간 까닭에 토끼잡이라도 하려다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난 토끼가 아쉬워 울상을 하는 아이가 있다. 아배는 망아지 사달라 조르는 아이를 달래려 망아지더러 이리 오너라 한다.


"장날아츰에 앞행길로 엄지딸어지나가는망아지를내라고 나는 졸으면

아배는행길을향해서 크다란소리로

-매지야오나라

-매지야오나라"


아이는 자라고, 여승을 만나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을 함께 한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방 안에서 쫓겨난 거미 가족들을 염려하는 어른이 된다.

"거미새끼하나 방바닥에 날인것을 나는아모생각없시 문밖으로 쓸어벌인다

차디찬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쓸려나간곧에 큰거미가왔다

나는 가슴이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쓸어 문밖으로 벌이며

찬밖이라도 새끼있는데로가라고하며 설어워한다"


백석 詩의 아이는, "노란 싸릿잎이 한벌 깔린 토방에 햇칡방석을 깔고" "호박떡을 맛있게도 먹던" 아이는, 산새도 오리도 노루도 토끼도 놀던 아이는, 무섭고 아픈 기억을 넘어선 어른이 되어 있다. 마술이다. "어치라는 산새는 벌배 먹어 고읍다는 골에서 돌배 먹고 아픈 배를" "아이들은 띨배 먹고 나았다고 하였다"는 


가끔 문학은 쓰라린 무엇이 아닌가 싶어진다. 아름다운 동화로 읽으면 더없이 맑다. 낮에 놀던 태양이 밤에 다시 떠서 발밑을 밝혀내는 마술 같다. 그러다 그 세계 속 무엇 하나 내 것은 없구나 싶어지면 그만 가슴이 덜컹거린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된다. "잠자리 조을던 무너진 성터"에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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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자신을 파괴하고 거듭 생성되는 불꽃으로 남고자 했다. 결코 삶을 완성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삶을 느껴보려 한 것이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 광적인 그의 노예로서 말이다. 츠바이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삶은 위대했다, 운명에 대한 주권을 운명에게 되돌려주었다. 19세기 유럽의 상황을 생각하면 굳이 저 먼 고대의 운명론을 끌어 와서 근대적 주권이라는 개념에 연결시킨 점이 특이하다. 


츠바이크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역설적 인간으로 믿는 이유는 다음의 구절에서 슬쩍 엿보인다.

 

“매년 유럽에서 생산되는 오십만 권의 책들, 그 책을 한번 읽어 보라. 대체 이 책들이 무엇에 관해 씌어져 있는가? 바로 행복이다. 대개는 한 남자를 원하는 여인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디킨스가 가장 소망하던 것은 명랑한 어린이들과 함께 초원의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이다. 발자크는 수백만금의 부 및 귀족의원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성에서 지내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거리, 상점, 값싼 선술집, 밝은 무도회장을 한 번 둘러보라. 그곳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원하는가? 하나같이 다들 행복하고 만족한 부자와 권력가가 되길 원한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크의 인물들 중 이를 원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한 사람도 이를 원치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어느 곳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행복의 순간에도 정지하려 들지 않는다.”(121)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발자크, 디킨스, 빅토르 위고, 괴테 등의 작가와 선명한 경계선이 그어지는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다고, 츠바이크는 연신 감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 정도의 찬사는 당연한 듯도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자판에서 두드릴 때마다 독수리 타법이 된다. 러시아 이름은 왜 이리 길고 거칠까.) 


그렇지만 츠바이크가 그 근거로 가져오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해석을 보자면, 잠시 망설여진다. 그들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같이 범죄 인간들이다. 사기, 폭력 등의 일과를 황홀감에 빠져드는 순환의 고리로 읽어낸다. 


“욕망은 후회로 변하고, 후회는 또다시 행동으로, 결국 범죄는 고백으로, 고백은 다시 그 황홀감에 빠져들게 하는 순환이 계속된다. 이윽고 운명의 모든 길은 이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추락하는 최후까지, 또 다른 이가 그들을 때려눕히기까지 서로 맞닿아 있다.”(211)

 

츠바이크는 당연하게도 카라카조프 가의 사람들에 나오는 인물들을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읽으면 바보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상식적인 사람들에게도 그 소설 속 인물들은 정신병원에 가야할 이상한 인간들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비정상의 인간들을 지구상에 있는 예사로운 인간으로 소설을 통해서 살려낸다. 


“세상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뜻을 두지 않으며, 자기주장을 관철하려고도 정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아낌없이 소모하며, 그 어떤 것도 계산하려 하지 않으며, 아니 영원히 비타산적 인간이 되려 한다. 그들은 스스로 삶을 느끼려 하고, 삶의 그림자나 반영된 이미지, 외적 현실이 아닌 신비스럽고 위대한 근본요소들, 우주의 힘, 생존하는 실존의 느낌을 감지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으로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곳곳에서 매우 원초적인 식물과 같은 삶, 즉 그 삶에 대한 가장 원초적 욕망의 샘이, 그리고 행복도 고통도 원치 않는 근원적 정욕이 솟구친다. 이 원초적 욕망은 이미 삶의 개별형식이 되어 버린, 가치인정 내지 가치구분이 아니라, 숨쉴 때 느끼듯, 완전히 일치된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209)


도스토예프스키는 영원한 세계를 위해 현실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실존의 황홀감을 감각한다. 다른 작가들이 현실의 크고작은 혼란을 경험하면서, 저항하면서, 끝내 조화를 이뤄내려는 인물을 창조할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영혼을 구원해 낸다. 긴장을 자아내는 범죄 장면에서조차 그 비참을 비껴가지 않고 통과한다. 숭고한 것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단락을 읽어 보자. 1인칭 소설이지만 루소처럼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쓴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진실한 고백록으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필연이 절대 질병도 부패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단 저지른 일은 절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하는 것을 강렬하게 의식하고 그걸 빌미로 남몰래 속으로 나 자신에게 이를 갈고 또 갈고 나 자신을 물어뜯고 쥐어뜯으며 못살게 굴고, 그러다 보면 쓰라림이 마침내는 어떤 치욕적이고 저주스러운 감미로움으로 바뀌고, 마침내는 단연코 진지한 쾌감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렇다. 쾌감, 그야말로 쾌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주장한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낸 건 늘 정확히 알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들도 이런 쾌감을 맛볼 때가 있을까? 내 여러분에게 설명해 주겠다. 이 경우 쾌감은 바로, 자신의 굴욕을 너무도 선명하게 의식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었다. 즉, 막다른 벽에 다다랐다는 것을, 이건 추악하기 짝이 없지만 달리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더 이상 출구도 없고 절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설령 뭐든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원하지 않을 것임을, 설령 원한다고 한들 사실상 마땅히 변할 대상이 전혀 없을 테니까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쾌감이 생기는 것이다. “(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발전하는 인류도 아니고, 질서를 찾는 문화인도 아니다. 자신 속에서 영혼을 구원해내고야 만다. 비참한 범죄 인간이 숭고한 것을 찾아서 마침내 승화를 이뤄내고야 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짐작하기로는 아래와 같은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2만 페이지에 달라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그 어디에도, 그 인물들 중 누가 앉고, 먹고, 마시고 하는지는 전혀 씌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느끼고 말하고 투쟁할 뿐이다. 통찰력의 혜안을 가지고 꿈을 꾸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잠자지 않는다. 또한 쉬지도 않으며, 언제나 열병을 앓고, 생각에 잠긴다. 그들은 결코 식물도 짐승도 아니고 무위도식하지도 않으며 멍청하지도 않다. 언제나 움직이고, 흥분하며 긴장하고, 늘 깨어 있다. 지나치게 각성된 인간존재다.”(240)


도스토예프스키 200주년 기념판이 나온 데에, 성평등을 위해 개역을 했다는 문구를 읽고서 떠오른 생각 때문에 다시 이 문제적 인간이 떠올랐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구한 프로이트는 그를 천재 예술가이면서 범죄에  탐닉한 인간이라고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중독자였다. 더구나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소녀를 성폭력한 범죄 경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의식 근처에서 문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다시 책을 뒤적여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대체 도스토예프스키를 어떻게 읽어야 하겠는가. 


영혼의 통증을 느낀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나 그의 주인공들이 아니라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뛰쳐 나간 리자가 아니었을까. 세계문학은 폐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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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는 좋음과 연결되지 않고 옳음과 연결되는데, 이미 좋음과 옳음 이전에 축적들이 있다. 클레멘트가 교부로서 청빈논쟁을 통해 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주장한 일을 떠올려보자. 클레멘트는 1800년 전 인물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성경 구절을 해석한 일로 유명하다. 십계명을 지켰는데 부자라는 이유로 천국에 갈 수 없을까 걱정하는 이들에게, 어렵다고 한 것이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운을 뗀다. 구원은 재산의 여부보다 탐욕과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배고픈 자들을 도울 수 있고 헐 벗은 자들에게 옷을 나눌 수 있단 말이냐고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부자는 그 자신보다는 형제를 위해 재산을 소유하라고 말한다. 


사제가 추구하는 삶은 평신도의 삶과 다르므로 재산을 포기하고 완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제의 청빈의무는 “너희 가운데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성서 구절을 강조한다. 악이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욕이라고 주장하며 그 사용법, 사용기술, 사용기능으로 초점을 전환시킨다. 그렇다고 수도원이 교황이 재물을 갖지 않았겠는가. 수도원이 번성한다는 뜻은 이미 재산이 그득함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생명의 나라처럼 말이다. 


1000년이 지나도 수도원의 부유함이 지속된다. 13세기에 들어서면 그레고리우스 9세 교황이 재화에 대한 소유권은 기증한 자에게 있다고 수도회는 소유권을 가지지 않고 사용권을 가질 뿐이라고 칙서를 공포한다.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수도회 모든 재화에 대해 자신이 소유권자임을 밝힌다. 


2.

만약 이 시대가 변화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선 소유와 채무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소유관계와 부채관계를 뒤져야 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에서 털끝만큼이라도 거리를 두고 싶다면 삶이 누구에게 빚지고 있는지, 삶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낡은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중요성을 갖는 '시대정신'이라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대체로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시대정신이란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가 자신의 정신일 뿐"이라고 한 괴테의 규정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시대정신의 자리를 정해주고 이를 정의할 줄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을까? 시대정신의 발견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면서도 동시에 지성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가의 최고 과제라는 것이 역설적 진리이다." (『의식과 사회』)

"부채는 사회 전체에 대한 ‘공제’ 기계 혹은 ‘포식’ 기계포획 기계이자거시 경제의 규정을 만들고 관리하는 도구인 동시에하나의 소득 재분배 장치이다부채는 또한 집단적 개인적 주체성의 ‘통치’ 및 생산의 장치로서 기능한다.

 

부채 경제는 매우 정치적인 목적을 갖는다. (상호부조연대협력만인을 위한 권리 등과 같은집단행동의 무력화, ‘임금노동자’ 및 ‘프롤레타리아’의 집단 조직행동 및 투쟁 기억의 무력화를 보라대출(금융)을 지렛대 삼아 이룬 경제 성장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갈등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사회 보조은퇴 연금직업 교육 등을 자신들의 투쟁을 통해 획득한 집단적 권리로서 바라보는 주체들과 마주하는 것은 ‘채무자’ 소규모 자산가소액주주를 통치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다"(『부채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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