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론 나남신서 690
조지훈 지음 / 나남출판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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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는 갈등의 연속이다. 해방 이후에 반민족주의와 반민주주의가 기득권을 형성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 혼란 속에서 사는 인생은 갈등 선택의 연속이다. 이 선택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에 관한 것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선택의 것도 있다. 특히 후자는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사이의 갈등에서 발생하는 선택이다. 어떤 선택의 결과가 자신에게 물질적 안락을 이루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는 자신의 신념과 역사 법칙에 위배되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에서 온다. 

지금 우리는 매 순간이 선택의 과정에 놓여 있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에서 비롯하여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이념에서 어디를 지지할 것인가는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매우 어렵기도 하지만 매우 쉽기도 하다. 양자의 견해를 들어서 합리적 선택을 하려는 경우도 있지만 한 쪽 귀를 완전히 닫아버리고 마이 웨이를 하는가 하면, 모든 것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선택, 자신의 입장에 대한 자신만의 선택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근래 100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는 우리는 극명하게 볼 수 있다. 이처럼 선택이 생사를 좌우하는 경우는 선택을 신중하게 해야 하면서도 선택한 결정을 외부의 타인에게 알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한다.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표현하고 말하는 것을 고민하기 마련이다. 이런 고민은 지금을 살아가는 현세대만의 것은 아니었다. 우리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인생 경험이 일천한 20대의 젊은이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 지를 몰라서 허둥지둥하다가 고귀하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기 일수이다. 시대정신과 미래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지남차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인생 스승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살짝 크게 뜨고 선배를 찾아본다면 어렵지 않게 우리의 선택에 조언을 해줄 선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동탁 조지훈이다. 그는 경북 영양 출신으로 경상도 선비의 자세를 지니고 있으면서 우리의 인생길에 길잡이를 해 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인생 선배 중의 한 분이다. 그는 4.19의거의 중심에 섰고 박정희 군사 독재에 맞서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인식되기보다는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청록파는 매서운 일제의 칼날이 춤을 추고 있을 때에 현실을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고 하여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냉소적인 비판 아닌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이는 청록파의 시들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世事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고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우리의 시흥을 돋우고 우리의 입가에 빛깔나는 붉은 빛을 드리우게 했던 시인이 세상을 향해서는 쓴 소리를 내뱉고 있다. '지조론'은 1960년대 즈음에 동탁이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념 갈등, 세대 갈등, 기독교 문제, 한일 간의 관계 등에 대해서 자신만의 견해를 군사독재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피력하고 싶은 말을 '사상계'와 '고대 신문', '동아일보(지금의 동아일보와는 질적으로 다름)'에 기고한 글을 모아 놓은 것으로 동탁의 역사관, 시대관, 인생관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50여 년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아직도 그 때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오늘날에도 요긴하게 참고할만한 내용의 글로 묶여 있다.

몇 해 전에 영국에서 앤서니 기든스라는 정치학자의 '제3의 길'이라는 것이 바람을 불어서, 이 바람으로 노동당이 정권을 잡았다. 그런데 그 집권의 결과는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도 유쾌하지는 않았다. 특히 외교적으로는 '부시의 푸들'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이런 제3의 길은 좌우가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유용한 것으로 보이기도 해서 여기에 현혹된 지식인들도 있었다. 지금도 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생각이 짧은 어린(遇) 백성이 많은 것으로 안다. 우리는 지난 10년의 민주 정부가 한국적 제3의 길을 가려다가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런데도 그 경험을 벌써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에 흔히 '중도'라는 제 3의 길을 선택한다. 이는 양자의 견해를 절충하고 종합하는 것으로 보여서 매우 멋지게 보인다. 모든 관점을 종합하여서 장점만을 취사선택한 것처럼 보여서 매우 매력적이라고 자기 위안을 한다. 그런데 동탁은 '중도주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경계한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전혀 다른 상반된 것을 양쪽에 매달아 놓고 엄정 중립으로 중용을 잡겠다고 하는 것은 허망한 관념의 윤리라고 한다. 이런 중간주의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비지성적이라는 것이다. 이 중간주의는 대개의 경우에 기회주의로 통한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에서도 중도라는 입장의 위험성을 알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이 땅에는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간의 이념적 사고의 차이가 매우 크다. 기성세대는 썩었으므로 물러가라고 외치기 시작했던 구호는 4월혁명 이후부터 유효한 구호가 되었다.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가 어리고 버릇이 없어서 철부지처럼 행동하여서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한다.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은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와 관련이 된다. 그러면서도 양 세대는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를 좀더 성의 있게 관찰하고 이해하고 인식함으로써 서로를 어루만지며 각자에게 주어진 새롭고 정당한 사명의 횃불이 필요하다고 한다. 자칫 양자는 모조리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갈지도 모른다. 동탁은 기성 세대는 자라면서부터 저유를 만끽한 젊은이들을 감옥 속의 처신을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 젊은 세대는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기성 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한다.      

현재 기독교와 불교의 갈등도 치열한 불꽃을 튀기며 점입가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것의 발단은 기독교는 모든 것을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본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지금까지 가꾸어 온 문화와 전통도 그들의 세계관으로 재단한다. 불교는 우리의 전통과 뗄내야 뗄 수 없는 것인데, 이런 것들도 불교의 색채가 있어서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배척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급기야는 통일신라의 처용가는 불교적인 것이므로 처용가 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기독교의 막가파식 사고는 동탁이 살던 시절에도 문제가 되었는가 보다. 그는 한국 교회는 3.1운동 이후에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서 지나친 정치 참여로 현실의 부패에 부동함으로써 교회가 자기 폐쇄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하였다. 당시의 교회는 본 바닥의 신학에만 몰두한 나머지 기독교 정신을 이 땅에 뿌리박기 위한 한국의 사상적 통양의 연구에 관심이 너무 없는  것 가타고 한다. 그는 교회 내부를 이끌 지성의 인물과 사회에 무한한 사랑의 손길을 뻗치지 못하는 교회의 활동에 아쉬움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50여 년전에 이 땅을 바라본 인생 선배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한 치의 오차도 벗어나지 않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현실의 이야기였다.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에 우리는 물질적으로 변화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으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동탁이 바라보는 현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그가 걱정했던 현실의 문제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동탁의 관전과 병행하여 50년의 역사에 우리의 인생 선배들은 '우리'라는 대의를 위해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골방의 툇간으로 물러나서 종요히 있어야 할 이들이 오로지 나이가 많다는 심정만으로 현실 문제를 나대는 것은 과분한 행동이라고 본다. 또한 젊은이들은 기성 세대와는 다른 형태의 존재론적인 삶이 필요하다. 마냥 과거만을 비판하다가는 과거를 답습할 수 있고 다시 50년 후에 자신들도 지금처럼 무개념의 노인네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동탁이 제시했던 수많은 현실의 문제는 앞으로도 미제의 상태로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들은 이 땅을 갈등의 상태로 남겨 놓을 것이다. 이 갈등은 지금보다 더 낳은 미래를 꿈꾸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거짓을 진실인 냥 포장을 해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을 어렵게 하거나 선택을 후회하게 한다. 이는 정치 영역이나 사회 영역 전반에 퍼졌다. 경제만 살리면 도덕은 필요없다고 외치고 정치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는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선진화'라는 허울좋은 겉포장으로만 어린 백성을 현혹시킬 뿐이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오히려 뻔뻔하게 법치주의를 주장하여 민주주의에 혐오감을 갖게 할 뿐이다. 그러면서 민주주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치게 한다.    

요즘처럼 사람을 헷갈리게 하던 시대는 없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무식하거나 정보 수단의 미비로 허위가 진실을 압도했다. 그런데 지금에는 교육 수준도 높고 교통 수단이 최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양두구육의 수단은 더욱 발달하여 관심이 없는 것이 오히려 편한 세상이 되고 있다. 동탁의 시대에 민족 고대라고 자부하는 대학의 고대 신문이나 일간지에는 자기 집단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보수적이고 퇴영적인 글이 넘쳐난다. 미래지향적인 글보다는 과거지향적인 글들이 훨씬 더 많다. 이런 현상으로 학교 신문은 대다수 학우들에게서 외면당한다. 프락치나 거지 근성을 보이는 신문 편집위원들도 한 몫한다. 지금도 자기의 신념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타협하지 않고 항거하여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로 무장된 지조있는 선비정신으로 무장된 지성인들은 지금도 필요한 시대이다. 이제는 기존의 언론을 통해서 정보를 얻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지성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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