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디 할머니 - 소설가가 사랑하는 박완서 단편 베스트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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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박완서 작가 타계 15주기를 기리며 후배 소설가들이 엄선한 단편으로 구성된 단편집이 나왔다.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사명감이 들었다.


10개의 단편은 전쟁과 분단과 민주화 시대를 지나면서

가족 상실, 가난, 도시화, 소외 등을 겪으며 살아가는 다양한 인생을

마치 옆에서 보는 것과 같은 묘사를 통해 보여준다.

짧은 분량에 긴 여운을 남기는 단편들을 모아 보고 있으니 여러모로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1.

지금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특히 「애 보기가 쉽다고?」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번듯한 노신사 맹범의 딸 부부는 맹범에게 9개월 된 손자를 덥석 맡겨 놓고 외출을 한다.

그때부터 이 소설은 내 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맹범과 크게 다르지 않을 내 친정아버지 4시간 동안 애를 맡긴다면?

소파에서 한밤중에 깔깔깔 웃고야 말았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했든 어디에 살든 어떤 사람이든 개의치 않고 난리를 피우고,

할아버지는 아기를 어떻게 할 수 없어 데리고 생전 처음으로 전철을 타고 어쩌다가 재개발 지역에 다녀오면서

낯선 곳에서 번듯한 삶에 해 보지 않은 도움들을 청하고 종국엔 구걸까지 하며 4시간 동안 4년은 늙어버린다.


낮잠 잘 때가 가깝다는 말은 믿을 게 못 되는 게

아이의 눈은 초롱초롱하다 못해 심상치 않은 적의마저 번득이고 있었다.(p.45)

어떻게 하든지 울리지를 말아야지

한번 울기 시작하면 끝이 없이 울음 끝이 질기다는 데 맹범씨는 거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p.48)


이 작품이 1985년작이니 무려 40년 전의 단편인데도 마치 지금의 내 일상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아기를 제대로 키워보지 않고서야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런 육아에 대한 묘사가

너만, 지금만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니 괜찮다며 내 일상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아기들은 아기를 키우는 모두에게 이런 놀라운 시간을 매일매일 선사한다.


방금 경험한 네 시간은 그가 여직껏 살아온 고르고 유연하게 흐르던 시간과는

전혀 단위가 다른 시간이었으므로.(p.69)


2.

이렇게 웃음을 주는가 하면, 전쟁과 분단. 민주화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아픔을 그린 작품들 앞에서는 몹시 숙연해진다.

전쟁 속에 젊은 여성들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혹은 이렇게라도 젊은 군인들을 살릴 수 있을까 하고

이미 다 늙어버린 몸이지만 남자들에게 기꺼이 내어놓는, 노파라고 하기엔 '여자'인 그들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전쟁 중에 한쪽이 내 오빠의 몸에 총질을 하고 다른 쪽이 내 아빠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죽음에 이르게 해도

입도 뻥끗 못해서 결국 가슴에 구멍이 나 버린 모녀 (「부처님 근처」).

학생 운동 시절 아들을 쇠 파이프에 잃고 별다른 의미도 없는 은하계 주문을 외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던 어머니(「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정말 이런 지독한 삶을 다 누군가가 살아냈을 것만 같고, 그래서 아찔하기도 하다.



그 독한 세상을 우리가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p.263)


3.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들이다 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그 시대를 살아낸 가족이 떠오른다.

이산가족 상봉은 모두가 바라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외할머니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이북에 이복동생 두 분과 할머님을 두고 10대 때 혼자 내려오셨다.

한참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것을 할 때 이복동생들을 만나볼까 하다가 고민 끝에 찾지 않겠다고 하셨다는데

그 이야기를 들었던 어린 시절에는 왜 가족을 안 찾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재이산」을 보고 비로소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감동이 차오르는 게 아니라 '온몸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해서 꼼짝 못하게'(p.163) 되어버리고 말 만남이라면,

만남의 끝이 결국 갈등일 것 같다면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극 T라고 느껴질 만큼 어떤 면에선 차가웠던 우리 할머니도

얼싸안고 행복에 겨워질 것 같지가 않아서 그냥 안 만나고 말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 책에 선정된 단편들은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쓰인 작품들이다.

지금으로부터 못해도 30년에서 50년 가까이 지난 글들인데 어쩌면 이렇게 글이 살아있는 것 같을까.

2026년에서 단번에 그 시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언급한 작품들 말고도 여기 있는 모든 단편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아서 오랜만에 정말 좋은 글을 읽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밥 먹다가도 생각나는 책. 꼭 소장해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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