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루의 신화 - 김진송의 역사 실험, 모두의 이야기면서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
김진송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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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6천년전 한반도에 가부루라는 석기시대 부족이 있었다. 이 부족은 새 발자국에서 본뜬 문자인 조족문을 사용했다. 한자가 있기 이전의 일이다. 세계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무서운 사실이다. 단군신화 이전에 문명이 존재했고 한글보다 수천년 앞선 문자가 있었던 셈이다.
 
책 <가부루의 신화>는 가부루의 조족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국어학자 장근호씨가 1989년 강원도 고성군 미산면에 있는 중미산의 한 동굴에서 조족문이 찍힌 수백점의 점토판을 발견한다. 10년 동안 이 고대문자를 해독한 끝에 고도의 문명이 단군신화 이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고대문자 해독을 통해 가부루의 역사와 신화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점토판이 있던 동굴 주변에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물이 동굴로 스며들어 수백점의 점토판은 진흙으로 녹아버리고 만다. 역사적 증거물이 사라져 버린 셈이다. 학계 발표를 앞둔 학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신이 해독한 자료를 제자에게 유물로 남긴다. 그 유물을 바탕으로 쓴 책이 <가부루의 신화>라고 저자 김진송은 머리말에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증거는 없지만 분명한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아무런 근거를 남기지 못한 역사는 사라져 버리고 신화로만 남을 것이다. 신화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다시 허구로 변해 버릴 것이다. (중략) 소설은 허구를 사실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지만 사실을 허구처럼 보이기 위해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가부루 조족문의 사실을 강조했다. 이 책 표지에 적힌 부제도 "모두의 이야기면서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라고 되어 있다.
이 책에는 장근호씨가 가부루의 문자를 발견하고 해독한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이어 가부루의 신화와 역사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이 역사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못하고 책으로 출판하게 된 배경도 적혀 있다.

책을 덮고 혼란스러웠다. 장근호라는 이름의 국어학자를 들어본 적이 없다. 또 가부루라는 부족이 있었다면 이미 하계나 언론을 통해 알려졌을 법하다. 책의 모든 내용이 생소하다. 이런 고민에 빠지다니, 참 순진했다. "설마 저자가 머리말에까지 허구를 진실처럼 미화했을까"라고 방심했다.
이 책은 허구 즉 소설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확인해보아도 장근호라는 국어학자는 없으며 강원도 고성군 미산면이라는 행정구역도 없다. 또 책에 "역사 실험"이라는 문구가 표기되어 있다. 게다가 가부루의 고대문자를 해독했다고는 하나 가부루족의 당시 생활이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점도 의심할 대목이다.

저자가 허구를 역사적 사실처럼 쓴 이유는 무엇일까? 독점 또는 독식의 병폐를 꼬집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가부루는 조족문이라는 문자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면서 인근 부족을 점령하며 막강한 문명의 권력을 휘두른다. 결국, 인근 부족들의 반란으로 가부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내용이 있다.
또 가부루의 문자를 발견한 학자도 10년 동안 발견 자체를 세상에 밝히지 않는다. 독점적으로 연구 성과를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독식은 결국 점토판이 물에 녹아 진흙으로 변하는 것으로 종말을 맞이한다. 역사적 증거물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역사가 신화나 전설로만 남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가부루 부족과 국어학자의 공통점은 문자를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의 저자는 우리의 역사도 허구일 수도 있다는 시각을 던지고 있다. 역사란 물적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역사로 둔갑될 수 있다는 내용이 이 책 말미에 나온다. 화자와 화자의 친구인 대학 교수의 대화에서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오류를 짚어내고 있다. 물적 증거가 없어도 유명 학자의 연구와 주장은 학계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책을 읽고 한동안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러나 서평을 쓰면서 허구인 것이 명확해졌을 뿐 아니라 저자의 의도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잘 짜인 미스터리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다빈치 코드>보다 현실적인 미스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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