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장강명은 『고백』부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까지 총 5편의 장편소설을 낸 주목받는 작가로 이미 문단에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작가였다. 그런 이력을 보니 너무 궁금해져서 먼저 최근에 나온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부터 주문하고 기다렸다. 의도치 않았지만, 받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2시간 만에 읽어버리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기존의 소설이 흔히 가지는 신파조의 감정선이나 불필요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빠진 채 그냥 담백하게 써나가고 있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게다가 읽다보면 마음 한 구석이 묵직하게 울림이 있는 슬픔이 책 곳곳에 배여 있는 묘한 냄새가 나는 글이었다.

이 소설은 남자, 여자, 아주머니가 주인공이며, TV에서 종종 해줬던 단막극을 본 거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몰입도가 뛰어났던 소설이었고, 남자의 이름이 강씨라는 것과 여자의 개명전 이름은 이보람이란 정도만 최소한의 정보만 알려주는 불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우선 이야기들의 순서가 너무나 잘 버물어진 비빔밥처럼 현재와 과거가 잘 연결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과거 고등학교 시절 괴롭히던 일진 동급생을 죽이게 된 주인공의 속죄의식이 곳곳에 베여있어 따끔따끔 콕콕 내 마음을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을 지켜주는 동창생 여자 또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힘들게 살아온 아픈 과거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가 나오는데, 주인공 남자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피해자의 어머니인 아주머니가 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OO이니?
남자가 전화를 끊었다. 조금 뒤에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가 끈질기게 몸을 떨었다. 화면에 ‘부재중 전화 7통’이라는 문구가 떴을 때 남자는 기계를 집어 들었다.
(중략)
전화번호 바꿨더라. 너? 네.
왜애? 왜 바꿨어?
(본문 22쪽)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는 피해자 엄마는 어디선가 불시에 나타나서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죄를 묻고 죽은 아들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주장하고 주인공의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를 방해하고 있다. 오히려 과거에선 피해자의 엄마였을지 몰라도 현재는 스토킹을 하는 가해자일 뿐이다.
아주머니는 우편물을 보고 조금이라도 정보가 될 만한 것들은 모두 가방 안에 넣었다. 전화요금 고지서 같은 것도 가방에 넣었다. 아주머니는 불편한 자세로 우편함 옆 벽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 남자를 기다렸다.
(본문 45쪽)
이 부분을 읽고서 나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주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또한 가해자가 정당방위로 9년 만에 나왔을 때 아마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이젠 멈출 수 없어 가해자를 쫓고 괴롭히면서 그 세월을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남자가 겪었을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과 절망, 억지로 주입되는 속죄의식의 강요행위들을 보니 막연히 아주머니의 편을 들 수는 없었다. 아주머니는 남자에게 너무 집요했고 너무 잔인한 모습을 책 속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도 그 긴 세월 고치지 못할 집착이 뼛속 깊이 베어 들어간 거 같아 한편으론 안타깝고 멈출 수 없는 그 15년이 불쌍했다.
경찰서, 소년교도소, 일반교도소, 병원. 남자가 대답했다. 소년교도소에 있다가 나이가 차면 일반교도소로 가게 돼.
의사들이 의식을 흐리는 약을 주었다. 약보다는 스스로의 의지로 소년은 자신의 패턴들을 지웠다.
(본문 8쪽)
주인공인 남자의 입장에선 사건충격으로 장기간의 정신과 치료로 기억이 잘 안 나는 상태에서 이제 겨우 소설을 쓰고 새로운 삶을 꿈꾸면서 과거 사랑을 겨우 찾았는데, 숨 막히게 조이는 피해자 엄마의 스토킹을 감당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남들과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그것을 밖으로 뱉아냈다는 이유로 괴롭힘만 당하다 일진이었던 피해자를 죽이고만 남자. 평생 그에겐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달렸고 새로운 삶을 살려 하면 피해자의 엄마가 주변에 사실을 알려 떠돌아다니게 만든다. 얼마나 제대로 살고 싶었을까. 그가 마포구 일대를 돌아다니며 그 동네에 숨겨진 설화나 이름에 얽힌 이야기들을 추적하는 과정만 봐도 자리 잡고 싶은 그의 마음 한 구석이 느껴져 내 마음까지 아렸다.
그 때 남자아이가 캐비닛 안에서 여자아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여자아이의 몸이 앞으로 기울며 캐비닛 안에서 두 아이의 입술이 맞닿았다. 베이비로션 냄새. 겨드랑이 냄새. 비냄새. 젖은 나무와 이끼 냄새. 다크초콜릿 냄새. 강아지 발바닥 냄새. 그 밖의 온갖 강렬하고 유혹적인 냄새들.
(본문 95쪽)
그 남자에게도 지우고 싶었던 고등학교 시절 사랑이 있었다. 힘든 약물치료도 이겨낸 첫사랑의 기억...책에선 첫사랑이란 언급은 없었지만 글에서 풋풋함이 묻어났다. 그냥 첫사랑의 기억이라고, 그 남자에게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 한편에 숨겨둔 사랑이었다고 나혼자 지레짐작하고 그렇게 여기고 싶은 예쁜 감정들이다.
어쩜 로맨스에 약하다던 저자의 표현력에 솔직히 이 정도면 됐지 아니한가, 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감정들이 조심스럽게 느껴졌고 남자와 여자의 과거 만남이 가볍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의 과거를 받아들이고 그를 사랑하게 된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만남을 제지시키고 싶어 하는 피해자 엄마가 나타날 때 마다 남자의 편이 되어 대변해주는 여자의 마음이, 그 사랑이 대단해보였다.
난 내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싫었어. 어렸을 때부터 이름을 불러주면 상대방이 그걸 제대로 받아적을 때가 없었어. 주로 ‘강’지를 ‘광’자로 알아들었지. 한강 할 때 강입니다, 라고 매번 알려줘야 했어. (중략) 대중을 상대로 하지 않을 사람, 그냥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 특이한 이름을 쓰면 되게 피곤해. (중략) 그래서 이름을 바꾼 거야? 여자가 물었다. 쫓겨다니는 것 같아서? 응. 남자가 대답했다.
(본문 96-97쪽)
남자와 여자는 이름 때문에 나누는 이야기가 많았다. 여자는 너무 평범한 이름 때문에 겪었던 일 때문에 개명까지 해야 했고 남자는 특이한 이름 때문에 조용히 살기 힘들어 개명하게 된다. 둘은 이름이라는 같은 주제의 고민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서로 더 이해해주고 끌리지 않았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저자 또한 장강명이란 특이한 이름을 가졌다. 특이한 이름을 가져 힘들어하는 남자란 설정이 많이 공감되고 바로 와 닿았다. 내 이름은 그 여자처럼 오히려 평범한 이름이라 고민이었는데, 항상 같은 반에 한두 명은 내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믐이라 그래.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거든. 그래서 쉽게 볼 수 없지.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어. 남자가 말했다. 낮에는 너무 가느다랗고 빛이 희미해서 볼 수가 없어.
(본문 140쪽)
남자는 스스로 그믐달이라 생각했던 거 같다.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는 존재, 남자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게 내 코끝을 시큰거리게 했다. 시공간에서 있다가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는 남자가 그 빛을 보여주겠다고 말할 때에는 이들이 내가 볼 수 없는 시공간으로 사라질까봐 불안해졌다. 다음 장을 넘길 때에도 그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내 예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질 때 허무하게 긴장이 스르륵 풀려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중략)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공간연속체 속에서 그 모든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있는 중이었다.
(본문 148쪽)
이 말은 평소 내가 꼭 듣고 싶은 말이어서 솔직히 남자의 여자가 부러웠다. 이 말은 책의 끝머리 저자의 당선소감에 똑같은 문장으로 '그리고 HJ에게,'만 넣어서 또 등장한다. 아마도 저자의 부인에게 고마움과 진심을 담아 고백조로 읇조리는 말이었으리라.

마치 남편이 내게 해줬으면 하는 말 같아 바쁘다는 핑계로 내게 무심했던 남편에게 이 글귀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보았다. 나도 이름이 HJ였기에, 뜨끔하면서 내 마음이 통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가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와 기분이 좋았다. 가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달콤함 문장은 현실에 없지만 이렇듯 가끔은 투덜거려볼 만하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소설 안에서 주인공 남자가 썼던 바로 그 소설 『우주 알 이야기』의 형식처럼 되어 있다. 출판사 편집자인 여자가 우연히 남자의 출품작인 『우주 알 이야기』를 몇 장 떨어뜨리고 만다. 그런데 그 안을 살펴보니 사건들이 시간별로 나열되지도, 쪽 번호가 매겨있지도 않아 순서대로 완벽하게 나열할 수는 없었다. 결국 사건들이 일어나는 시간 순서대로 정렬되지 않은 이야기,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으면 결코 순서를 맞출 수 없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진짜 소설도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간다. 결국 영화 인터스텔라 처럼 시공간이 생겨 아빠와 딸이 만나듯이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 패턴에서 벗어나 주인공들이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 건 아닐까. 우리에게 저자는 이런 방식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수상작들은 신인작가의 등용문답게 젊은 작가의 패기와 조금은 어설프거나 농익지 않은 표현들이 툭툭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저자가 꼼꼼히 설정하지 않은 글들이 별로 없었다. 군더더기가 적어 오히려 매끈하다.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많은 등장인물에 대한 부연설명, 신파적 구성요소도 없어 담백하다 못해 심심한 편이다. 하지만 장강명 작가가 이야기 하고 싶어 했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공대 출신 기자로서 간결한 언어로 기사를 썼던 그 기억이 담겨있음에 분명했다.
그가 쓴 생활언어의 매력은 솔직히 매혹적이다. 내가 어느 순간 시공간을 넘어가 돌아가신 아버지랑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상상까지 하게 만들어줬으니까 말이다.
지금 다른 시공간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의 준비가 된 독자라면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당장 펼쳐들고 보라고 외치고 싶다. 신비한 체험은 나눌수록 좋은 게 아닌가. 그 남자처럼, 그 여자처럼...그리고 나에게도, 내 남자에게도...그대에게도, 그대의 연인에게도...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