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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해 쉽게 풀어쓴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 4 -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들 ㅣ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 4
이이화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책제목 :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 4.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들
지은이 : 이이화 / 펴낸곳 : 주니어김영사
이 책 한 권으로 나라를 빛내고 역사를 있게 한 많은 훌륭한 인물들을 만났다. 책은 인물 한국사답게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들이 총 3부로 나뉘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인물에 대해 태생부터 죽기 전까지의 업적에 대해 상세한 설명과 사진첨부가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책을 넘어 사전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인물에 대해서 적당히 줄거리만 늘어놓던 기존의 책들과 달리 이 책은 당시 인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나 자료를 꼼꼼하게 찾아 인터뷰한 내용 등을 첨부해 신빙성을 더한 것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책을 덮은 후에도 어느 인물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을 때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고 이 책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는 게 더욱 마음에 든다.
책은 1부 동학 지도자, 2부 개화기 지식인, 3부 독립 운동가로 만날 수 있다. 동학 지도자로 소개된 인물들은 ‘송대화, 김개남, 최달곤, 김학진, 홍낙관, 전봉준’이며 개화기 지식인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들로는 ’김옥균, 황현, 최익현, 유길준, 박은식, 장지연, 주시경, 신채호, 김윤식, 김홍집, 민영준, 이완용, 박영효, 서재필‘이고 독립 운동가로 소개된 인물들은 ‘안중근, 홍범도, 신돌석, 김좌진, 이상재, 장지필, 방정환, 이회영, 김구, 김창숙, 여운형’이다.
아쉬운 점은 인물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은 좋으나 어려운 한자나 용어사용 등이 많아서 인물에 대해 이해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서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야했다. 물론 독자대상이 청소년이긴 해도 인물마다 주요업적이나 어려운 용어 등은 따로 설명을 해놓은 페이지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던 ‘서재필’에 대해서도 오해와 진실을 깨닫게 하는 등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다.
서재필, 과연 진정한 독립 운동가인가? 로 시작한 본문은 마치 열렬한 독립 운동가인 양 이미지가 조작된 대표적인 인물이 그라고 한다. 그의 행적을 돌아보면 역사인물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고 지은이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 동안 알고 있던 서재필은 대개 열렬한 개화파 민족주의자로 젊은 나이에 갑신정변을 주도했고, 이어 사대모화의 상징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며 <독립신문>을 간행했다가 수구파의 미움을 받아 미국으로 쫓겨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로서 생업을 꾸리면서 열렬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파산하여 어려운 생활을 꾸렸고, 해방 뒤 귀국했다가 이승만의 견제로 다시 실의 속에서 미국으로 돌아가 죽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정말 그랬을까?
그는 스무 살이라는 최연소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고, 이듬해 일본의 하사관학교에 유학해 일본어를 배우고 돌아왔을 때 조정의 촉망을 받았다. 개화파였던 그는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하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의 가족은 음독자살하는 비극을 연출했고, 박영효 등과 일본으로 망명한다. 약 5개월 후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미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의학공부를 해 면허를 취득하고 인턴 생활을 한다.
1890년 미국으로 귀화하여 ‘필립 제이슨’이 되었고, 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의 번역 일을 맡아보며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는 미국 여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 후 병원을 개업하나 백인의 인종차별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일본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개화정권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박영효를 다시 불러들였다. 박영효는 일본의 힘을 배경으로 권력을 잡아나갔는데, 이때 옛 동료 서재필을 국내로 불러들였다. 그는 고국을 떠나 망명한 지 11년 만에 미국 국적을 갖고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돌아왔다. 고국에서 중추원고문이 되어 막대한 월급을 받으며 미국인 행세를 했다. 특히 그는 ‘서재필’로 행세하지 않았고 ‘제손 박사’로 기명하며 미국인의 풍습을 강조하면서 생활도 미국인처럼 했다고 한다.
미국의 신문물을 익혀 온 그는 조선에도 신문을 발행하여 자기들의 뜻을 펴는 언론 매체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립신문>발간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이를 개인 소유로 등록했고 주택구입비도 받고 월급도 후하게 받았다. 그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어느 고관보다도 윤택한 생활을 누렸다. 또한 신문을 발행하면서 자신이 논설을 자주 썼는데 위장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말을 거의 잊어버려서 영어로 쓰고 이를 번역해 게재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벌인 그의 업적 중에 독립협회의 결성과 독립문의 건립이 두드러진다. 그는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정부정책의 시비를 가리고 민중이 참여한 개혁운동을 펼치는 기관으로 삼으려 했다. 그리고 1897년 독립문을 완공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자서전에서 ‘나는 돌아오는 길로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고 했으며, 또 독립문을 세울 적에 그 비용을 모두 자신이 냈다고 쓰고 있다. 이 기록에 따라 그 뒤의 국내 역사기록 대부분은 이를 믿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독립의지가 강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기록은 모두 틀렸을 뿐만 아니라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첫째로, 영은문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일부 헐려 있었다. 영은문은 명나라 때부터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사대모화의 상징물이었다. 그런 탓으로 일본은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구실을 붙여 청나라의 입김을 배제하고 조선을 마음대로 요리하려는 책동의 하나로 영은문을 파괴했던 것이다. 서재필은 귀국한 뒤 서대문 언저리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 집 바로 뒤에 영은문이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이 문을 바라보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자리에 프랑스의 개선문 같은 조선 독립의 상징물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독립문을 세우려는 운동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벌어졌다.
구한말의 황실과 각계각층에서 돈을 거두어 그 경비를 충당했다. <독립신문>에도 그 모금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그가 이 경비를 모두 냈다는 기록은 당시 열화 같은 건립 참여의 학생, 관료, 시민의 의지를 모두 자신의 공으로 돌린 것이 된다.
<한국인명대사전>에는 이 대목에 대해 그가 1897년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출국이 강요되어 미국으로 되돌아갔다고 쓰고 있다. 또 다른 곳에 관한 글이나 심지어 교과서에조차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독립문은 자금이 모자라 개선문의 규모로 짓지 못했다. 설계도는 스위스 사람, 공사는 교회를 지은 경험이 있는 목수를 동원했으나 개선문과 같이 대리석을 쓰지도 못했고 규모도 축소했다. 그런데 여기의 독립은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후기의 독립의 의미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한다.
한편 그는 미국의 정책을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중추원의 고문직에서 사임이 강요되자 10년 계약의 남은 기간의 월급을 모두 지불한다면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그리하여 계약의 남은 기간인 7년 10개월분의 봉급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까지 챙겨 받아냈다. 대한제국의 재정형편이 말이 아니었는데 그는 미국식 계약과 미국의 힘을 내세워 이를 몽땅 받아낸 것이다.
조선을 남의 나라, 미국이 자기 나라라는 말투로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하여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미국이 아시아에 식민지를 갖는 것을 열렬히 환영한다고도 주장했고, 3・1운동 직후 한인연합대회를 가질 때에 애국가가 아닌 미국 국가를 부르게 했다 한다. 그는 이처럼 완전히 미국인으로 살면서 우리나라에서 챙겨간 돈으로 사업을 벌이며 잘 살았다. 그는 의사개업에서 재미를 못보고 다른 사업을 벌였다. 미국에서 미국 여인과 함께 살면서 독립운동에 나서지도 않았다.
그가 다시 고국에 돌아온 것은 1947년이다. 미군정에서 그를 정문관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철저한 친미파인 그를 미군정에서는 활용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별 역할도 못하다가 1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우리글과 우리말이 아주 서툴러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했다 한다.
그는 우리나라가 식민지 상황을 겪을 때에 미국에서 편안히 살았다. 친미파로서 이름을 바꾸고 미국 시민권을 얻고 미국인 행세를 했다. 더욱이 그는 모든 조선 사람의 생활풍습이나 가치관도 미국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민족혼이나 민족전통을 부정했던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밝히며 어려운 대한제국을 상대로 온갖 이익을 모두 챙겨갔다. 그리고 모든 일을 벌일 때 적당히 끼어들었다가 정세가 여의치 않으면 물러나서는 모든 지원과 경비가 자신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고 둘러댄 것이다.
그러면 이런 그가 왜 우리 역사에서 부각되었는가? 무엇보다도 미군정 당국이나 친미파들이 그를 대단한 독립운동가로 이미지 조작을 한 것이다. 그리고 또 그가 언론인이었던 탓으로 언론계에서 지나치게 그의 활동을 떠벌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탓으로 지금도 그의 고향 전남 보성에는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고 동상도 세워져 있다. 더욱이 교과서 같은 데에서 그의 활동을 지나치게 기술한 탓으로 대중들의 머릿속에는 그가 대단한 독립운동가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바른 역사를 위해 진실의 토대 위에서 역사인물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이렇듯 이 책은 그 동안 우리들이 잘못 알고 있던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많은 역사책 등에서 인물들의 업적에 대해 간결하게 요점정리 하듯 서술이 되어있어서 아쉬움이 남았었다. 역사 속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이야기 흐름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은 인물에 대해서 집중 탐구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겠다. 인물에 대해서 모을 수 있는 자료들은 빠짐없이 모아서 집필한 흔적이나 정성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긴 듯 상세하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해석도 분명하게 해놓아서 우리들이 역사를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할 듯해 마음에 든다.
궁금한 역사인물에 대해서 분명한 진실을 알기 원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