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까칠한 재석이가 사라졌다 (양장) ㅣ 까칠한 재석이
고정욱 지음 / 애플북스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해마다 12월 즈음이면 구족화가들의 연하장을 구입한다. 카드에 그린 그림만 보면 그림 실력이 좋은 화가의 작품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구도도 좋고 그림의 내용도 좋다. 그러나 그 그림이 정상적인 손을 이용해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입과 발을 이용해서 그린 그림임을 생각하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사지육신 멀쩡한 일반인들도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라하면 막막해지기 마련인데, 이렇게 놀라운 그림실력을 뽐내면서 모두가 즐겨 찾는 연하장을 장식하는 그림을 그려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이 그 그림을 그려내기까지 치러냈을 고통을 생각하면 그저 안타깝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드는 반면, 나의 신체가 온전하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여전히 적극적으로 살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게 느껴진다.
작가 고정욱 선생님은 스스로가 1급 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를 주제로 한 동화책을 많이 쓰셨다. ‘까칠한 재석이가 사라졌다’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때까지 고정욱 선생님의 목표가 의사였다는 것, 그러나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아픔을 견디고 문과로 전향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인이 스스로의 장애를 딛고 당당하게 섰기 때문인지 몰라도 고정욱 선생님의 글은 늘 힘에 넘친다. 보통 정상적인 신체를 타고 난 작가들이 우울한 글을 많이 써내는 것과 참 대조적이라 생각된다.
주인공 재석이, 무능력했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지하방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며 겪었던 수모를 주먹으로 해결하며 고등학생이 되었다. 담배는 기본이고 학교 폭력서클에 가입해 나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친한 친구 민성이의 복수극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재석은 노인복지관에서 2주일간 봉사를 하게 된다. 처음엔 터질 것 같은 분노만 가득 안고 봉사를 다녔던 재석이 서예 선생님으로 오시는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서서히 바뀐다. 전기 감전 사고로 오른쪽 모두 의수와 의족을 하고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생활 습관을 왼손과 왼발로 바꾸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할아버지. 뇌혈관이 터져 수술을 한 후, 왼손과 왼발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입으로 붓글씨를 쓰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의 손녀 보담이의 당차고 선한 모습을 보며 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삐뚤어진 길로만 가려고 하던 제 모습을 돌아본다. 그리곤 젊음을 낭비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에게 맹세한다.
고정욱 선생님이 지니고 있는 에너지가 글 속에 녹아난 듯 짧지 않은 글을 언제 읽었나 싶을 정도로 금방 읽었다.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요즘의 청소년들에게 좋은 자극이 될 ‘까칠한 재석이가 사라졌다’는 사회봉사 명령을 수행하기 싫어 도망친 재석이가 아니라 불량스런 재석이가 사라지고 힘들게 알을 깨고 나온 재석이를 그린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