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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보는 마음 - 우리 시대의 시인 8인에게 묻다
노지영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11월
평점 :
아마도 팬데믹의 시절을 어둑한 시간이었다고 기억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두려운 시간이었고 한 순간에 자의가 아닌 채로 홀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세대가 아니었을까 한다. 형벌로써의 고립이나 혹은 열반의 조건으로서의 고립을 상상하고 이야기할 때와는 다르게 지난 몇년의 고립은 타인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이루어진 고립이었기에 그 고립의 의미는 실은 남달라야 했다. 그러나 그 시간동안의 고립이 쓰디쓴 사회의 안정망을 확인하는 데에 불과했기때문에 우리는 우리 사회의 연대를 오히려 잃어버리고 만 기분이 든다.
그때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던 글들이 몇 편이 있다. 노지영 평론가의 글이 그 중 하나였다. 그이는 2022년 아르떼에 공존을 모색하는 약하고 꾸준한 연결이라는 글을 썼는데 그 글은 나에게는 위안이 되는 글이었다. 강한 연결; 혈연이나 학연, 같은 계급성을 가진 이들과의 끊어지지 않는 고리 속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이해되고 너무나도 쉽게 강렬한 감정을 보이는 이들이 오히려 약한 연결; 하나의 사회속에서 정의로 규정될 우리라는 연결에 대해서는 파편화되다 못해 결코 나아가지 못할 와해된 감정선들만을 흩날리는 모습을 관찰하고 노지영 평론가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결코 강한 유대로 이어진 사회보다는 우연히도 그렇지만 지속적으로 만나게 될 약한 연결들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강한 유대, 강한 연민, 강한 사랑 등의 붙은 강한이라는 말이 어쩌면 우리를 강제하고 우리의 고립을 더 한층 맹목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나에게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글이 단지 시대를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귀기울이고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할 기회를 충분히 주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한없이 따뜻한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노지영 평론가의 아르떼의 칼럼 외에 다른 글을 먼저 읽었다. 어느 시의 평론이었는데 그 시에서 말하는 작은 속삭임, 무의미하다고 여겨질만한 소리들을 귀담고 그 소리들을 다시 부드럽게 호명하여 나에게까지 울리게 하는 그 글들에 속수무책으로 귀를 열수 밖에 없었다.
그 노지영 평론가가 8명의 시인을 대면하고 시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 이야기를 다시 말하는 모습을 담은 "뒤를 보는 마음"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망설임 없이 책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의 대담집을 읽으며 나는 시의 자리와 육화된 시인의 음성을 상상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미 사멸되고 불투명화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거라고 믿어지는 시의 모습을 눈을 감고 복원하는 꿈을 꾸었다. 게다가 무기력하게 갇혔다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이젠 미련한 것이라고 체념하듯 받아들였던 나와 그 와중에 버렸던 작은 것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 접속사들이 유효하다고 결코 버려선 안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뒤를 보는 마음"을 추천한다. 빛이 물위에서 반짝이는 건 굴절하기 때문이 아닌가? 세상이 살만한 빛을 가진 건 이처럼 세상의 이치라고 여겨지는 대세에 흡수되는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튕겨지고 그래서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시와 그 시를 들어서 다시 말하는 마음때문이 아닌가?
노지영 평론가는 이처럼 시를 다시 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역시 수많은 속삭임들을 들어보고 다시 소리내어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해 본다.
끝으로 이 대담집을 시작으로 노지영 평론가의 더 깊은 속 마음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