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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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비난하는 말에 두 가지가 있다고 가르쳐준 사람은 혼다씨였다. 나이프의 말. 십자가의 말. "이 두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 ...(중략)...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져야 하는 말이지. 그 말을 등에 진 채 계속 걸어가야 해.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발길을 멈출수도 없어. 걷고 있는 한, 즉 살아 있는 한 계속 그 말을 등에 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 (p.74)

신문이나 TV에서 '왕따'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왕따 문제를 무겁게 말하는 평론가나 앵커가 있으면 '왕따는 교육의 황폐화나 마음 속의 어둠처럼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야!' 라고 반박하고 싶었는데, 반대로 가볍게 다루어도 화가 치밀었다. 중년의 대학교수가 청소년들을 격려할 생각으로, 왕따 따위에 지지 말고 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TV에서 말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티슈 상자를 움켜쥐고 짓눌러 버렸을 정도였다. (p.217)

사유 집에 있을 때면 테니스부 친구들로부터 잇달아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 때마다 사유는 항상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통화가 길어지지 않도록 일찍 끝냈다. 처음에는 그 미안함이 나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새 전화를 건 상대에게로 바뀌어서, 아쉬운 듯 한숨을 쉬면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일이 늘었다. (p.282)

절친이라는 것은 죽고 싶을 정도의 고민이 있을 때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인 동시에, 털어놓지 않아도 눈치를 채거나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도 뭔가를 해주려고 하는 상대이다. 너는 그렇게 간단한 것도 몰랐단 말인가? 후지슌의 입가가 움직인다. 눈이 부신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움직인다. 그래도 유 짱은 내 절친이야. (p.330)

 

* 책 정보

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2013,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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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왕따 한번 당해보지 않은 사람 있을까. 이 때 청소년 드라마나 신문의 사회면에나 나올 법한 자극적인 집단 따돌림은 나의 경험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일은 소용없다. 셔틀빵이 아니라도, 일진 놀이의 피해자가 되는 끔찍한 장기적인 따돌림이 아니라도, 공동체내에서 은근한 따돌림이란 시시각각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비단 청소년에게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충분히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이성적으로 사리분별을 할 줄 알 거라 기대되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어디 따돌림만 그러할까.

소설의 화자인 사나다 군은 중학생이다. 그런데 그의 학우 중에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던 슌스케가 어느날 자살을 하며 유서를 남긴다. 바로'절친 유짱 고마워," 라는 언급을 , 포함한 글을. 이 때문에 사실은 죽은 슌스케와 절친이 아니었던 사나다 군은 졸지에 유일하게 가해자의 비난을 피해갈 수 있는 '절친'이라는 말을 등 위의 짐으로 지고 살아가게 된다. 물론 이것은 '죽은 사람은 절친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사나다 스스로도 슌스케를 간접적으로 따돌림 했다는 죄의식'이 되어 그의 일생을 내내 따라다닌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일찍이 짐짓 눈치 챈 슌스케의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과 정신적으로, 혹은 시간적으로 엮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소설에서 말하는, 십자가다.

십자가는 사실 누군가 자살을 한다면, 그의 자살을 일생의 트라우마로 가져가야 하는 사람들은 주로 누가 될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야기로 보인다. 가족은 물론이겠거니와, 그를 죽음으로 내몬 가해자들 또한 상처를 준 것의 배 이상으로 상처를 받는다. 그 가해자들은 직접적으로 그에게 정신적 고통을 준 사람일 수도 있고, 극중 사유리처럼 그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게 한 짝사랑 대상자일 수도 있다. 비록 어떤 참견과 가담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을 방관해야 했던 학우들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무게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자살한 소년의 고통 그 자체와는 질적으로는 다르지만, 충분히 오랜 시간 주변인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울 수 있는 사람들의 인생의 짐을 묘사한다. 결국에 우리가 간접적, 직접적으로 사회 구성원을 구석으로 내 모는 일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잔혹한가에 대해 묻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물을 위해서 선택된 소설의 아쉬운 장치는, 어른들의 태도 같다. 기자 다하라는, 슌스케의 분향소를 찾은 같은반 학생들의 단체 사진을 불시에 촬영하며 가해자들의 표정을 사진기에 담으려고 한다. 기자 혼다도 마찬가지다. 작품에서는 사유리와 사나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상처를 섬세하게 관찰해주고 슌스케 가족과의 화해를 도와주려는듯 하지만, 그녀도 마찬가지로 권위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후지슌, 즉 슌스케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동급생들의 기나긴 여행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길고 괴로울 것이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게다가 슌스케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절친'이라고 묘사한 친구에게, 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냐며 대뜸 멱살을 잡는다. 그의 부인이자 슌스케의 어머니는 자꾸만 사나다군과 사유리를 불러내 그들을 슌스케의 그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이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닌, 간접적인 가해자들 혹은 방관자들이라는 점은 이 소설의 메시지를 자신이 사회 문제의 주범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전달하기 유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나다를 향한 슌스케에 대한 예의와 의무가 강요될 수록,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어떤 계몽 정신을 위해 가공된, 옳은 것을 옳게 보여주기 위해 조성된 캐릭터라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난다.

이 소설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몰염치가 일생에 일으키는 정신적 외상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면, 주인공의 행적인 성인인 상태에서 더 많은 '십자가'를 묘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방관자의 경험을 갖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것을 반복하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어른말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도 화자는 성인이다. 지난 20년을 회고하는 듯한 발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의 2/3 묘사는 어른 이전의 나이다. 자신들의 방관과 무의식적인 잔혹한 행위가 어떤 형체인지 제대로 교육 받아본 적도 없었을, 중학생 화자가 자신이 친구의 자살을 방관하고 일조한 것을 책임지는 행위는 또 하나의 가혹한 가해 행위 같이 느껴진다.

다하라씨도, 혼다씨고, 슌스케 학급의 선생님도, 또 슌스케의 아버지 조차도. 모두 슌스케의 자살을 방관한 학급생들을 혐오했다. 물론 학생들은 잘못했다. 하지만 그 잘못을 알고 저지른 일일까 생각해보면 이 소설에서 묘사된 기성 세대의 태도는 다소 지나치다.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명명한 단체 가해자라는 비난과 악마의 아이들이라는 혐오는 자신들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도덕적 우월감이 없고서야 나올 수 없다. 심지어 그들의 반성문을 잡지에 기고했다. 하지만 따돌림이 성인이 되어서도 없을까? 부조리한 일들을 말리지 못하는 것이 성인이 되어서도 없는가? 자신들의 치명적인 방관에 대한 죄책감을 참을 수 없었던 성인들의 자책은 무고하지는 않지만, 무지할 수도 있었던 아이들에게 향한 것은 아니었을까.

 

 

* 추천하기 전에

사실상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의 20년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닌 것 같다. 분량 면에서나, 인물의 행보 면에서나, 20년에 걸친 이야기가 나타나 있지는 않다. 20년 뒤의 이야기라면 모를까. 점진적으로 번져나가는 생의 나비효과를 기대했는데, 중간에 압축되고 생략된 시간이 꽤 길었던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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