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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평점 :
古여성들을 찾아 떠나는 新여성들의 여행, 그리고 향연
해 질 무렵, 어둑어둑하고 축축한 거리를 나 혼자 걷는다.
‘선덕여왕릉이 도대체 어디야?’ 불평, 푸념만 틱틱 튀어나오기 일쑤. 쀼루퉁한 얼굴로 지나가는 아줌마에게 묻는다. 저리로 가란다. 가보니 이미 양 갈래 길이다. 해는 졌고, 왼편은 커다란 통나무가 가로막고 있고, 오른 쪽 길은 소나무로 가득한 것이 꼭 ‘저 세상 길’ 인 듯싶어 이내 발길을 돌리고 만다.
선덕여왕을 만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이 책을 붙잡았을까? 이 책 역시, 선덕여왕릉으로 향하는 여정의 소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길은 수없이 갈라지는데도 표지판은 한두 개가 고작인 옛 여성들의 흔적. 이 세상의 반인 남성을 제외하면, 반은 엄연히 여성의 것인데 유독 역사는 남성들의 흔적들뿐이다.
해외여행이 판을 치고 있는 지금, ‘유학’, ‘이민’ 등이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르는 현대사회 속에서 그녀는 ‘우리나라’ 라는 재미없는 키워드를 외치는 마이너리티일지도. 그녀는 마이너 중의 마이너인, 억압받고 감춰져왔던 ‘여성’ 을 외친다. 그것도 新여성이 아닌, 古여성을!
지루하고 따분한 그 키워드, ‘여성의 역사, 그리고 흔적’ 을 에로틱하고 섹시하게, 때론 파격적이고 비판적이게, 감성적이고 아른거리게 풀어내는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단순한 기행문이겠거니’ 라는 오만함으로 가득 찬 그녀는 날 신랄하게 비판하며 질문거리를 던진다. ‘古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라는 질문에서부터, ‘how to write?’ 글쓰기에 대한 고찰, 그리고 ‘네가 아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야!’ 까지.
古여성들은 은밀하게 감춰지고, 또 감춰졌다. 국사교과서 맨 첫 페이지에 나와 있는 역사의 정의를 떠올려보자.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 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운다고 할 때, 이것은 역사가들이 선정하여 연구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책의 한마디를 떠올려보자.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렇게 역사가들이 직접 편찬한 역사는 국사책 전반에 수록되어있다. 삼국사기 김부식이라던지, 삼국유사의 일연처럼. 하지만 우리는 ‘역사가들이 선정한 역사’ 를 아무 비판 없이 수용하고 만다. 우리는 착한 학생이어야만 하니까. 나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니까.
하지만 진실의 색은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짙고 매혹적이다. 철저히 남성적인 시각으로 비춰졌던 역사를 그녀는 다시 되짚고자 한다. 타의적으로 현모양처가 된 사임당, 지고지순의 대명사로 망부석이 되었던 박제상부인, 신라의 전성기를 마련했던 선덕여왕, 은밀하고 조용해야만 했던 것을 터뜨려 화를 일으킨 나혜석까지. 이 책은 특이하게도 숨겨지고 은폐되어지고 철저히 외면당해야만 했던 古여성들을 재조명한다. 그녀들의 묘를 방문하고, 그녀들의 흔적, 숨결을 더듬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해 쉽고도 재미있게, 그리고 섹시하고 에로틱하게 풀어낸다, 여성 주의적 시각으로.
신라 시대를 상상한다는 것은 내 머릿속의 구조망을 다 해체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천오백 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 기억이 끝나는 곳에서, 내 단단한 이성이 허물어지는 곳에서 새롭게 발견됩니다. (p. 52)
작가가 이 글을 쓰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글 전체에서 느낄 수 있다. ‘자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새롭게 해보자!’ 에서부터 시작된 그녀의 원고는 수백 번 걸려넘어졌을 거다. 그녀들의 흔적은 보존은커녕 방치되어 있을 뿐이고, ‘그’에 관한 논문은 넘치고 넘치지만, ‘그녀’ 에 관한 논문은 찾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천 오백년 전 그녀들의 이야기를, 천오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의 시각으로 그녀들을 이해하고, 다시 재구성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다. 그녀 자신도 이 글을 쓰며 수백 번 감탄했을 것이고, 수천 번 문제의식을 느꼈으며, 수만 번이나 얼른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新여성이 古여성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녀의 말처럼 그럴 때가 됐다.
이제 사백 년 전 한 여성이 보내고자 한 그 편지의 봉인을 뜯을 때다. (p. 169)
또한 新여성으로서의 참신한 소제목과 표현들도 간간히 읽는 재미를 더한다. [16세기 조선 여성의 '살짝' 르네상스] 라든지, ‘대략난감’ 이라든지.
하지만, 경주-강릉-부안-수덕사-해남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전반부엔 신나다가 결국은 조금 어렵고 지루하게 끝나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 개인적으로 경주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앞부분은 밑줄 치며 신나게 읽었지만 수덕사에 들어가면서부터(근대여성이 등장하면서부터) 조금은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또한, 책의 전반부는 古중의 古여성을 다루려다보니(천오 백 년 전 신라이야기 등),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당시의 역사와 여성, 그리고 여행기를 한꺼번에 다루려다 충돌해버린 지점이리라. 경주와 강릉부분에선 책이 좀 더 두꺼워지더라도 여행지를 좀 더 길게 서술했으면 하는 못내 아쉬운 맘이 든다.
이제 시작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古여성들을 찾아 떠나는 新여성들의 여행, 축제, 그리고 향연을 향한 맘은 이 책이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http://book.metaschool.org/isbn/8988526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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