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사람들
심윤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서라벌 사람들≫ 심윤경, 실천문학사

 

  하품만 계속 나오는 5교시 국사시간. 졸음을 쫓으려 창문도 열어보고, 서서 수업도 들어보고, 앉았다 일어서기도 해보지만 여전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옛날 옛적 이야기. 사극TV프로그램의 주 무대인 조선시대 이야기라면 그래도 재밌게 들을 수 있겠는데, 나에게 멀고도 먼 삼국시대 이야기. 왕은 또 왜 이렇게나 많은지!

  하지만, 나는 고글리(고정희 청소년 문학상을 통해 글도 쓰고 문화작업도 하는 마을 리里)에서 계획하고 있는 ‘경주여행스쿨’을 위해 신라를, 경주를 해체해야만 했다. 향찰인가 뭐시기로 적었다는 향가를 외우고, 배경설화를 찾아가고,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고. 삼국유사에 향가 14수만 전해진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오, 신이시여! 하지만, 부족했다. 내 상상력은 교과서를 벗어날 수 없었고, 삼국유사를 해체할 수 없었다. 내 머리 속의 화랑은 그저 용맹할 뿐이었고, 불교는 그저 신라를 대표하는 국교일 뿐이었다.

  심윤경의 ≪서라벌 사람들≫은 내 머릿속의 신라, 그러니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열아홉 살의 교과서적인 신라를 해체하고 말았다.

  “화랑이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들일 것 같애? 불교는 아무렇지 않게 신라에 정착한 게 아냐. 진골도 왕위를 세습하게 됐을 때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궁금하지 않아? 신라의 그 여자와 그 남자들 로맨스는 궁금하지 않아?”

  ‘차라리 심윤경작가가 내 국사선생님이었다면 좋았을 걸. 그랬더라면 난 학교를 나오지 않았을지도 몰라!’ 책을 읽는 내내 한참을 중얼거렸고, 어느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파안대소를 했으며, 그 여자와 그 남자 로맨스이야기에서는 얼굴을 붉히며 나도 모르게 킥킥대었다.

  맞다. 아주 먼 옛날, 신라에서는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교합제를 자주 치렀을지도 모를 일이고, 용맹하고 무예가 출중하다는 화랑들은 사실 쌔끈하고 섹시할지도 모른다. 신라의 그 여자들은 화랑들의 동성애를 질투해 남몰래 일을 벌였을 지도, 화랑들은 동성애와 이성애 가운데서 혼란스러워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조금씩 신라의 그 여자, 그 남자들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김현아작가의 책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의 한 문장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신라 시대를 상상한다는 것은 내 머릿속의 구조망을 다 해체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천오백 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 기억이 끝나는 곳에서, 내 단단한 이성이 허물어지는 곳에서 새롭게 발견됩니다.(p. 52)”

  천오백 년전 그 여자 그 남자 이야기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풋풋한 열아홉에게 ‘딱딱한 교과서’로만 기억된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나를 거쳐 간 수많은 국사선생님은 나에게 왜 섹시한 신라, 쌔끈한 화랑을 소개시켜주지 않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수많은 국어선생님은 향가를 왜 그렇게 재미없게 가르쳤는지. 문법/용법 다 갖다버리고 서동과 선화공주의 로맨스 이야기나 해줄 것이지. 지금의 촛불정국과 안민가를 엮어 내 맘에 콕콕 와 닿게 해줄 것이지. 선생님들은 나에게 왜 그랬을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덩어리.

다시 ≪서라벌 사람들≫이야기로 돌아와서, 글 전체적으로 신라에 중국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국교가 토착종교에서 불교로 바뀌는 과정을 꽤나 재밌게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말했던 ‘선데이 서라벌’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선덕여왕을 향한 마음에 불덩이가 되었던 돌쇠 지귀에서부터, 21세기의 천민으로서는 감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성골 진덕여왕까지. 그 여자 그 남자 이야기들은 로맨틱하면서도 흥미롭다. 열아홉의 상상력에 불을 지른, 분자생물학과를 졸업했으면서도 글을 쓰고 있는 이상한, 내 단단한 고정관념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심윤경작가의 책을 딱딱하고 재미없는 국사수업과 국어수업을 받고 있는 그대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모의고사에 지친 그대여, 나와 함께 섹시한 신라로 떠나지 않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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