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얼룩말과 함께
김참 / 기린과숲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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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참의 이 시집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전부를 비추고 있는 거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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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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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대하는 한 가지 태도, "모르는 만큼 보인다."
<내 생애의 아이들>을 읽고

 

  90년대 중반에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란 책과 함께 유행되었던 유홍준의 명언이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말도 다시 검증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베트남 여행 때가 그러했고,  <내 생애의 아이들>을 읽고 난 한동안이 그러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란 말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주체성과 개성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다시 이 말도 달리 해석해보면, '아는 만큼 보이기'는 할 터이나, '아는 만큼만 보이기' 때문에 그 알고 있는 이의 사고의 틀을 벗어난 진정한 앎에는 도달하기는 어렵다는 논리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대상 그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라기 보다는 보는 이의 기준과 틀에 따라 대상을 왜곡해서 해석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그 '아는 만큼'은 언제 '편견만큼'이란 뜻으로 둔갑해버릴지 모를 일이다. 베트남 하노이 공항 주변 논에서부터 우리와 전혀 다르게 풍기던 그 곳 특유의 땅 냄새를, 그 이질적인 문화를 도대체 우리의 그 무엇과 관련지어, 혹은 우리가 가진 무엇이 바탕이 되어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기준과 배경지식을 겸허히 접고, 우리의 것과 전혀 다른 별개의 기준, 대상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본성을 가지고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적어도 다른 나라 문화, 다른 나라 사람, 그리고 낯선 이방인을 바라볼 때는.

  소설 속 첫 이야기에서 '나'는 각기 다른 서른 아홉의 이민자의 자녀들과의 만남에 많이 난감해 한다. 처음부터 활달하고 밝은 성격의 아이가 있는가하면, 학교에 오자마자 빽 울어버리는 아이, 같이 온 부모만큼이나 무표정한 아이, 게다가 아버지와 자기를 떼어놓는 '나'에게 화가 나 '나'의 정강이까지 후려쳐 버리는 당돌한 '빈센토' 같은 아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관심은 어느 한 아이에 편중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일률적인 시각으로 아이들을 재단하지도 않는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나'에게 선물을 하려 애쓰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도 공평무사하다. 초콜릿 1파운드 상자를 선물한 '프티-루이'에서부터, 어머니가 남은 실로 손수 싼 덧신을 선물한 '조니', 어머니와 단둘 살림으로 가난고를 겪는 터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클레르'에 이르기까지. '나'에게는 모두 하나같이 가난하지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나'와 너무나 다른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고의 한 정점은 '막내 드미트리오프'를 통한 아버지 드미트리오프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에서 확연하다. '안나'나 다른 교사들의 드리트리오프네 아이들에 대한 비하와 편견은 그 아이들이 풍기는 특유의 가죽냄새만큼 지독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편견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막내 '드리트리오프'에게서 글씨 쓰기 재주를 찾아낸다. 마치 '드리트리오프'를 맡기 전, 그 아이를 만나러 손수 '작은 러시아'로 주섬주섬 가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글씨 쓰기 재주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버지에게 보여줌으로 해서 드리트리오프에 대한 편견을 씻어버리게 만들고, 마침내 그와 그 아버지 사이에도 교감을 이룰 수 있게도 한다. 소설 속 대부분 교사들은 이 드리트리오프네 일가를 괴물 취급한다. 그것은 그들을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이방인으로 본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자기 자신도 드리트리오프네 일가에 대해서 낯선 이방인 일 수 있음을 놓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편견 없는 그런 사고가 없었다면 어떻게 또, 우크라이나 노래나 부르는 가난한 또 하나의 이방인인 '닐'에게서 샘물 같은 안식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러한 '닐'은 어떻게 보면 '나'의 자아의 극대화된 모습으로 보인다. 늙은 이, 정신병자, 혹은 육체나 정신의 고통을 겪는 누구에게나 다름없는 노래로 안식을 주며 그들과 교감을 이루는 '닐'은 바로 이방인을 대하는 편견 없는 '나'의 모습 그 자체이다 . 
  이방인이란 말의 표면적인 뜻 그대로 일반 사람들과 동 떨어져 외진 곳에 사는 '앙드레'에 대한 '나'의 태도는 또 어떤가. 폭설 뒤의 '앙드레'의 귀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도 드러나지만,  며칠째 결석인 '앙드레'를 만나고자 스키를 타고서 그의 집을 어렵게 찾아가 본다거나, 그 곳에서 '앙드레'의 학업을 돕는 '나'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나'의 본성이 드러난다, 마치 '가난'이라는 경계로 일반 사람들과 차별되고 외따로 멀리 떨어져 사는 이방인은 일반인보다 몇 배의 노력을 더 기울여 대하여야 교감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앙드레'를 찾아가 보는 외진 물리적인 길은 '이방인'의 마음을 찾아가는 심리적인 길인 듯하게 느껴졌다.
  한편, 어떻게 보면 '메데릭' 만큼 이방인의 형상을 뚜렷이 갖고 있는 이도 없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인디언의 피가 섞여 있는 혼혈이라는 면이 그러하고 무엇보다 일반 학교교육에 정착하지 못하는 소위 '문제아' 같은 이미지가 그것을 말해준다. 여차하면 일탈할 수 있는 수단인 말을 데리고 다니는 점, 편부 슬하인 점, 일반적이고 정상이라 여기는 학교와 박제된 교과서보다는 자연과 살아 있는 생물(자신의 말, 산의 식물, '찬물 속의 송어'와 같은 것들)에 더 집중하는 모습 등. 청소년기를 '주변기'라 칭하는 학자도 있듯이, 이러한 성향의 아이들은 당연히 학교와 사회적 관습의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런 '메데릭'과도 교감을 이루고야 만다. 그 첫 관문인 '종이 공 사건'에서 메데릭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다름 아닌 '상대에 대한 긍정'이었다. '나'는 마을 사람들처럼 메데릭을 편견을 갖고 보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메데릭을 '나'와 다른 이방인으로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메데릭에게서 자신의 예전 모습을 찾거나, '나'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메데릭이 가지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나' 자신조차도 이방인으로 대상화하여 면밀하게 관찰하려 한 태도를 취하려했다는 점에서 메데릭 대목이야말로 이방인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가 가장 자세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결국엔 메데릭은 아버지 때문에 영영 학교를 떠나게 된다. 메데릭 집의 무거운 가구와 메데릭의 아버지가 즐겨 입는 자연스럽지 못한 정장 풍의 옷이 모든 것을 말해 주듯, 메데릭의 아버지는 아들의 본성을 염려하지 않은 채 학교 교육에만 매어 두려하는 지독한 편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의 아이들 군상은 정도와 영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소외된 이방인의 초상을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공통적이다. 부모와의 심리적 이유를 유독 힘들게 겪는 '빈센토', 늘 가난하고 검소하여 소외 받는 '클레르', 우크라이나라는 주변부의 노래로 주변 모두를 아우르는 '닐', 일반인들이 혐오해마지 않는 지저분한 피혁공장 아들인 '드미트리오프', 외따로 떨어진 집에서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앙드레', 그리고 고독한 반항아 '메데릭'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 아이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안고 마을을 떠난다. 마지막으로 기차가 마을을 휘감고 돌아가듯, '나'는 "내 생애의 아이들"을 맘속에 그리며 떠나간다. 이제 '나'는 읍내로 가 또 다른 '이방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내 생애의 아이들' 만큼이나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간은 이방인일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세대나, 계층, 성격, 취향 등 꼭 언어나 국가, 문화와 같은 확연한 경계가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 때로는 불합리한 관습과 편견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이방인처럼 바라보는가. 우리 모두 정도와 영역의 차이일 뿐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은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면, 이제  '누가 이방인인가'로 서로를 나누는데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이방인(?)과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요컨대, '아는 만큼' 보인다 하여 자신의 '아는' 프리즘으로 상대를 재단할 것이 아니라, '모르는 만큼' 나의 기준과 편견을 일단 유보하고 대상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성과 논리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곧 나 자신을 관찰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다.  '메데릭'의 눈높이에 맞춰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려 노력했던 '나'처럼. 섣불리 자신의 욕심이나 교육적 관점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고, 메데릭이 관심 있어 하는 자연에 관한 공부부터 시작해주려고 백과사전을 권해 주던 '나'처럼. 나는 너의 또 하나의 이방인. 때로는 모르는 만큼 보일 때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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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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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예리한 칼잽이, 춈스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읽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칼의 노래>가 마음 속에 얽히곤 했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라는, 이순신의 칼만큼이나 치열하고 순결한 김훈 선생님의 말씀도 맴을 돌았다. '정치'는 순수한  '정치'의 것으로, '무(武)'는 '무'의 영역 안 그 정확한 자리로, 라고 외치는 칼의 노래.  '정치' 와 '무', 그 둘 사이를 어정쩡하게 흔들리다 간 많은 정객들 틈에서 과거의 이순신은 아스라히 스러져 갔고, 오늘날의 춈스키는 그 '칼'로 자본주의의 구조와 모순의 이면을 가른다. 홍해를 가른 모세의 지팡이가 이처럼 날렵하고 다급했을까.

  내가 춈스키를 처음 알게 된 건 대학에서 변형생성문법을 배울 때였다. 그 때는 그저 언어학 쪽의 신선한 학자정도로만 마음속에서 매김됐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한 신문에서 우연히 포리송 탄원서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룬 뒤의 춈스키와 그의 고언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렴풋한데 아마 이러했던 것 같다. " 내가 누군가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것과, 그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지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책을 쭉 읽으면서도 가장 먼저 눈이 간 대목도 사실 이 글 전체 맥락과 다소 거리는 있으나, "어떤 이유로도 제한될 수 없는 표현의 자유"를 말하면서 프랑스 지식인의 폐쇄성을 꼬집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디 그런 합리적이지 못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에만 있으랴.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토론 문화에 대한 경험이 비천하고 분단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배타성이 벽으로 가로막힌 경우,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예 귓바퀴를 틀어 막아버리거나 적대적인 감정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표현의 내용과 표현의 형식을 '포를 뜨듯이' 아주 합리적이며 예리한 칼날로 갈라 사고하는 진보적 정치 운동가로서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그것만큼이나 새롭고 설레는 과정이었다.
  이 책은 1999년, 현대 정치, 언론, 경제, 지식인의 문제에 대하여 프랑스의 두 언론인(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과 춈스키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대화 형식 그대로 담아놓았다. 우선, '지식인'과 '진실'에 대한 뜻매김부터가 인상적이었다. 춈스키는 '지식인'이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보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라 정의하면서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규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 또 얼마나 저명한지, 그리고 우리 체제 안에 반체제 운동을 하건, 우리 적의 체제 안에서 체제 전복적 활동을 하건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기반 위에서건 진실을 말하는 이가 바로 '지식인'이라 본다.
  그리고 '진실'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 사실"이라 했다. 우리 세계는 '진실'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을 칼로 예리하게 발라 찾아내는 참 지식인(춈스키는 "책임 있는 지식인"이라 했다.)도 거의 없는 듯하다. 춈스키는 진실이란 "의자 위에 있는 책"을 두고 "책이 의자 위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간단하다고 했지만, 우리 세계 속에서 진실은 그처럼 간단하거나 자명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는 지식인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의 세계는 가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판을 친다. 권력의 중심은 부자나라들에 있다.  최강대국들(미국, 일본, EU)과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IBRD, IMF)과 국제기관(WTO)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다. 이러한 체제와 국가 권력 기관은 서로 공생하고 있다. 더욱 암담한 것은 그 속에서 '지식인'의 제대로 된 역할을 감당해야할 언론이나 학교, 인텔리겐차, 그리고 여론에 영향을 미치면서 통제하는 연구기관들이 권력에 동원되어 대중이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권력기관들은 지식인들을 앞세워 대중의 정신을 통제하며 권력을 강화시킨다. 춈스키는 예전에는 폭력적 수단으로 대중을 억압하고 진실을 은폐했는데, 이제는 정교하게 꾸며진 여론조작이라는 전략으로 대중을 통제한다고 "조작된 동의"란 분석 틀을 가지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가짜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주입을 통해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갖게 되면서 장시간 노동은 기꺼이 수용하되, 타인에 대한 연민과 연대와 같은 인간적 가치는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민주주의를 확대시키려는 소수 대중과, 민주주의를 제한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지배계급간의 투쟁만 계속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형편도 춈스키가 분석한 바와 결코 다른 걸음을 걷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미 IMF로 인해 우리 은행들은 대부분이 외국자본으로 넘어가 있는 실정이고, 다른 공공기업도 민영화의 위기를 겪고 있다. 공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공기업을 민간기업이나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넘기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습은 과점형태의 경제활동을 우려케 하므로 우리 경제구조나 사회 전반에 걸친 부작용을 낳을 것임은 분명하다. 또, WTO로 인한 우리 농업경제는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가. 이라크 파병 문제의 저변에는 또 얼마나 큰 경제문제가 걸려있는가. 하루를 멀다하고 쏟아지는 정치권력자들의 부패, 비리는 언제나 경제 경영자들과 짝을 이룬다. 이런 정치와, 경제의 암담하고도 탄탄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체제 속에서 언론이나 지식인의 작태는 또 얼마나 '조작된 동의'를 구하고 있는가.
  춈스키는 이런 곤경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중의 결집된 힘에 있다고 본다.  억압받는 대중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지고 또, 우리 세계가 느리나마 진보의 역사를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여론의 압력, 즉 조직화된 대중의 역량에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언론과 지식인은 민간기업(대기업)에 시청자나 팔아 넘기지 말라고, 이해관계가 밀접히 연결된 국가권력에도 종속되지 말라고, '조작된 동의'의 배달부가 되지는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춈스키의 그러한 예리하면서도 따끔한 충고는 비단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언론과 지식인들만을 겨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언론을 포함한 지식인은 '조작된 동의'가 아닌 '진실'의 배달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식인은 인간 문제에 대한 진지한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진실을 밝혀내고 한편, 언론은 자신의 고유 영역으로 돌아가 진실을 밝혀내는 태도와 모순된 체제에 대한 비판, 깊이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노력에 경주해야 할 것으로 본다. 정치나 다른 경제 분야도 역시 본래 영역과 범위에 충실한 활동과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인간 문제 각 영역의 고유함과 영역이 분명하지 않다 보니, 언론은 정치의 수단이 되고 정치는 경제의 목적이 되고 하는 옳지 못한 구조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춈스키를 읽는 동안 계속 떠올렸었다. 정치적인 알력구조 속에는 절대 자신의 '무'의 세계를 건설하고 싶지 않았던, 너무나도 사실적인 이순신과 그의 외로운 '칼의 노래'가 자꾸 맴돌았던 것이 이 책에 대한 잘못된 읽기가 아니었다면, 어느덧 춈스키는 분리되고 선명해져야 할 세상을 향해 예리한 칼을 갈고 있으리라.
          2004년 5월 4일 쉬는 시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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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이순원 지음 / 세계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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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열 아홉이었을 적에.
- 이순원의 《19세》를 읽고 -
04. 08. 31)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샐 줄 모른다'는 속담과 함께, 내가 남들보다 사춘기를 늦게 겪어 당신 마음을 무던하게도 힘들게 했음을 강조하시곤 한다. 내가 생각해도 그때 그 일 이후로 내 삶의 틀이 많이 달라졌고, 지금도 크게 보아 그때 바뀐 틀 안에서 아직도 버둥거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면, 그 일은 내 삶에 있어 여간한 일은 아니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일도 아니지만 그 당시로는 나에게 있어서나 주변사람들에게 있어서나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 지금도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는 한 친구는 '나'에 대해 휴학이나 이혼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을 아이로 생각했었다면서 결혼도 자기보다 내가 빨리 할거라고 장담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스무살 겨울의 나의 그 사고(?)를 놀라했다. 참고로 벌써 그 배신녀는 나보다 일찍 시집갔다.)
  스무살 겨울의 난데없는 '휴학'. 그러니까 나의 '19세'는 아주 훗날, 복학을 한 이듬해인 스무 두 살의 봄 정도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열 세 살의 나이로 성장이 멈추었다, 삶에 대해 더 알 것이 없어졌다(7쪽)'라고 하고, 소설 《19세》의 '나'의 경우는 열 아홉에 이미 '어른으로 가는 슬픔의 강을 건너버렸다(187쪽)' 라고도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정수)'에 대한 부러움으로 절절했던 대목이 바로 이 점이다. 좀 더 일찍 "앓이와 찾기"를 할 수 있었다면......, 나에게는 그 시기가 너무나 늦게 온 것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소설 속 '나'가 상고를 잘못 가서 뒤늦게 후회하는 것만큼이나 아쉬운 대목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를 끌어당기는 주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분명 《19세》의 '나(정수)'는 스물 둘이 되기 전의 나와는 성향부터가 달랐다. 《19세》의 '나(정수)'는 상당히 자아가 강하고 저돌적인 면이 많은 아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끝까지 관철시켜 얻어낼 수 있는 의지와 지혜가 있다. 친구 승태를 통한 성 지식 습득, 상고 진학, 가출, 고랭지 농사의 성공 등. 하긴 자아가 강한 그의 진면모는 이미 그의 나이 13세, '콘사이스와 검정필' 때부터 드러나긴 했다.
  그러나 스무 살에 사고(?)를 치기 전의 나의 모습은 지극히 얌전한 모범생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극복과 고생 많은 어머니의 기대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된 지향이었다. 때문에 주위의 기대도 나를 가둬두는 틀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나 스스로가 '엄마 말 잘 듣는 범생이'의 틀 안에서 편안하게 살기를 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또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억압'이었다.
  스무 살 이전의 나의 모습은. 내가 이루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그러했던 만큼이나 성에 관한 것도 다분히 억압적인 면이 많았다. 그것은 물론 환경의 탓도 무시할 수 없다. 내가 첫 생리를 했을 때(-주 :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마 《19세》의 '나(정수)'가 거시기에 털이 나서 고민했던 것만큼이나)나 그 이전이고 그 이후고 간에, 생리를 비롯한 2차 성징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변화와 충격에 대해 안정적으로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또 만만하게 물어볼 이도 없었다. 어머니가 생리대 사용법에 대해 처음으로 설명해주기는 했어도 내가 첫 생리 때문에 얼마나 충격스러워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소상하고 편안한 가르침은 없었다. 가정시간에 배우는 객관적인 사실들과 친구들과 조심스레 떠드는 농담이 전부였을 뿐. 한마디로 성교육 부재의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라는 내내 성에 관한 얘기를 하면 괜히 죄스러지고 거북해지곤 했다. 억압과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나날들이었다.
  내가 포르노를 본 것은 내 나이, 스물 하고도 여덟의 겨울이었는데, 우습게도 나는 그전까지 본 진한 애로 영화가 포르노인 줄 알았다. 영화는 중학교 3학년 때 나보다 2살 많던 옆집언니(-주 : 집에 비디오가 많았음. 또 돈도 많았음. 그러나 그 언니 부모님은 자식교육에 관심은 없었음)가 자기 집에 놀러온 나를 꼬드겨 같이 보자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전라의 여성과 남성의 뒷모습과 측면에서 찍은 성교 장면을 대략적으로 비추어 보인 장면들이었는데, 자세하게 몸이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과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첫 생리를 할 때처럼. 가관인 것은 그 때부터 스무 살이 훨씬 지난 나이가 되어서도 그것을 포르노라 착각하고 그때의 기억을 많이도 부끄러워했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뚜렷하게 학습하며 자라게 된 계기였다. 얼마나 나 자신을 학대하고 억압했으면. 차라리 여기저기에다 그런 사실들을 떠들고 다녔더라면(-주 : 그래서 병은 소문을 내라고 하는구나), 또 《19세》'나(정수)'의 반만큼이라도 되는 주변머리가 있었더라면.  비단 성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나의 스무 살의 사고(?)또한 좀 더 그 시기를 당길 수 있었을 텐데.
  환경의 차이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19세》의 '나(정수)'의 경우도 승태 말고는 대화의 창구가 없는 막막한 고립지원의 상황이었다. 노골적으로 '나'를 억압하며 자신의 인생관에 동생의 자아를 맞춰 넣으려는 형, '나'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선생님. 그 즈음의 '나(정수)'에게 있어 '대관령'은 바로 승태와 승태 누나였다. 그런데도 나와는 다른 노란싹(?)을 틔울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남녀차이도 분명한 경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구차한 설명을 보태지 않아도 대한민국에서 성에 있어서나 자아 성취적인 면에 있어서나 그 억압이 더 심한 쪽은 여자이다. 우리학교 애들만 봐도 다를 바 없는데, 남자애들은 여선생 앞에서도 성적인 농담을 곧잘 주고받는 반면에, 여학생들은 남선생은 말 할 것도 없고, 여선생한테마저도 눈치를 보며 조심한다. (-주 : 하긴, 옛날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다. 수업시간에 생리통 때문에 아파서 화장실 간다는 말도 주춤거림 없이 하는 것을 보면.) 또,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여학생이 훨씬 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직업을 갖고 싶어한다. 
  나 열 아홉이었을 적에 나의 '대관령'은 엄마말, 선생말 잘 듣는 범생이, 그리고 그것을 통한 참한 국어 선생 되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도 《19세》의 '나(정수)'마냥 노란싹(?)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내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부자처럼 부풀어오르곤 한다. 지금 다이어리 같은 조그마한 책자에다 내가 손수 지은 시를 보석처럼 다듬어넣곤 했던 나, 때로는 친구들에게 그 보석을 선물하기도 했던 나, 미술선생님의 격려로 개성적인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던 나, 영어 수학시간보다 음악, 미술 시간을 더 좋아했던 나(이 '대관령'은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처럼.
  문제는 《19세》'나(정수)'가 '대관령'에서 펼친 고랭지 농사를 향한 강한 매진과 실천이, 나에게는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나는 중학교 시절에 뜻도 모를 김수영 시집도 읽어내고, 나름대로 폼생폼사로 글을 짓기도 했지만 그것을 스무 살이 넘은 나이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대관령'까지 넘어가진 못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당시 내가 쓴 시들은 김수영 시를 비롯한 어른들의 시와 어투를 흉내낸 것들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자 이런 치기 어린 모습들이 너무나 싫어졌다. 이런 상황에 무섭게 덤벼든 것이 '범생이 틀'이라는 억압이었다. 또 하나 나를 누르는 것은 성의 은폐에서 배운 부끄러움이라는 성향이었다. 그리고 그러했던 부정적인 나의 한 성향은 마치 삼투압처럼 나의 또 다른 긍정적인 성향마저 삼켜버렸다. 그래서 중학교 이후로는 글쓰기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부끄러운 채로, 억압당한 채로, 범생이의 틀 안에서 근신하기를 마음먹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과정 속에 그 억압과 부끄러움은 더욱 덩치를 키워갔다. 그런 상태가 스무살 겨울까지 이어진 것이다. 아주 긴 터널이었다. 터널이 폭발하듯 내가 빠져나오기 이전에는.  
  《19세》의 '나(정수)'는 '대관령'에서 자기의 꿈을 죄다 이루어보았던, 또 250씨씨 혼다로 최고속력을 누려보았던 이후로 다시는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은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그 꿈이 의미가 없는 것이라 보지는 않는다. 현재의 모습과 현재의 꿈과는 다른 것이라 해도. '대관령' 꿈꾸기는 또 다른 '대관령'을 꿈꾸게 한다. 이번 방학동안 EBS에 책따세 대표 송승훈 선생님이 독서에 관해 아이들, 부모님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프로가 있었다. 한 부모님이 자기 아이에 대해 고민을 상담하는 내용이었다. 아이가 책을 많이 읽는 면은 좋은데, 그 때문인지 학교시험에 독서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언제나 답을 틀린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매번 참고서나 선생님이 미리 가르쳐주는 '정답'을 적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답을 적기 때문이란다. 그것 때문에 그 아이의 부모님은 아이의 성적이 안 좋아 상당히 노파심에 전전긍긍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송승훈 선생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오히려 중학교 초등학교 때 주체적 독서활동을 많이 한 아이들이 나중에 고등학교가면 독서를 비롯한 모든 문제상황을 주체적으로 해결을 할 수 있게 되고, 또 그런 능력을 점점 쌓을 수 있게 될 거라고, "소탐대실"이 아니라 "소실대탐"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거라고.'  《19세》의 '나(정수)'는 19세의 '대관령'을 더 이상 꿈꾸지 않는 대신에 그 거대한 대관령에게서 문제해결능력을 배웠다. 그리고 앞으로 또 다른 '대관령'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러므로 '대관령'의 존재와 '대관령'을 찾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문제이다. 앞으로 나의 '대관령'은, 또 그것을 찾아가는 방식은 어떠한 것일까.
   '휴학'이라는 터널을 탈출한 이후로 못된 버릇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간직하던 그릇이 깨져버리면 크게 두 가지 행동을 취하는 것 같다. 그 깨진 그릇을 '울며 겨자 먹기'로 떼우고 붙여 고이고이 이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깨진 그릇 재료들을 다시 빻아 새 그릇을 만들거나 또 다른 그릇을 찾아 나서는 사람. 그런데 나는 후자 쪽의 성향이 더 짙은 것 같다.(물론 두 성향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고 본다.)  지금도 일을 할 때나 뭔가를 선택할 때 '이건 아닌데' 싶으면 중도하차나 포기를 거듭해 나 자신이 힘든 것은 둘째치고, 간혹 남들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은 힘드나 일, 하나 만큼은 기대에 부합되게 만들어내곤 한다.  이런 내 성격의 한 면은 또는 나름대로의 문제해결능력(-주 : 좀 부끄럽다. 사실은 안 그럴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뿐.)은 내 나이 스무 살이 저물어가던 그 겨울에 움이 텄다. 긴 긴 터널 속의 '열 아홉'에는 꿈도 꾸지 못한. 그 때가 나에게 있어서는 '사춘기의 방황(우리 어머니 버전)'이었고, '자아 찾기 (소설《19세》의 '나'의 버전)'의 첫 단추였다. 채우는 것이었건 푸는 것이었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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