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이순원 지음 / 세계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 열 아홉이었을 적에.
- 이순원의 《19세》를 읽고 -
04. 08. 31)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샐 줄 모른다'는 속담과 함께, 내가 남들보다 사춘기를 늦게 겪어 당신 마음을 무던하게도 힘들게 했음을 강조하시곤 한다. 내가 생각해도 그때 그 일 이후로 내 삶의 틀이 많이 달라졌고, 지금도 크게 보아 그때 바뀐 틀 안에서 아직도 버둥거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면, 그 일은 내 삶에 있어 여간한 일은 아니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일도 아니지만 그 당시로는 나에게 있어서나 주변사람들에게 있어서나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 지금도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는 한 친구는 '나'에 대해 휴학이나 이혼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을 아이로 생각했었다면서 결혼도 자기보다 내가 빨리 할거라고 장담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스무살 겨울의 나의 그 사고(?)를 놀라했다. 참고로 벌써 그 배신녀는 나보다 일찍 시집갔다.)
  스무살 겨울의 난데없는 '휴학'. 그러니까 나의 '19세'는 아주 훗날, 복학을 한 이듬해인 스무 두 살의 봄 정도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열 세 살의 나이로 성장이 멈추었다, 삶에 대해 더 알 것이 없어졌다(7쪽)'라고 하고, 소설 《19세》의 '나'의 경우는 열 아홉에 이미 '어른으로 가는 슬픔의 강을 건너버렸다(187쪽)' 라고도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정수)'에 대한 부러움으로 절절했던 대목이 바로 이 점이다. 좀 더 일찍 "앓이와 찾기"를 할 수 있었다면......, 나에게는 그 시기가 너무나 늦게 온 것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소설 속 '나'가 상고를 잘못 가서 뒤늦게 후회하는 것만큼이나 아쉬운 대목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를 끌어당기는 주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분명 《19세》의 '나(정수)'는 스물 둘이 되기 전의 나와는 성향부터가 달랐다. 《19세》의 '나(정수)'는 상당히 자아가 강하고 저돌적인 면이 많은 아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끝까지 관철시켜 얻어낼 수 있는 의지와 지혜가 있다. 친구 승태를 통한 성 지식 습득, 상고 진학, 가출, 고랭지 농사의 성공 등. 하긴 자아가 강한 그의 진면모는 이미 그의 나이 13세, '콘사이스와 검정필' 때부터 드러나긴 했다.
  그러나 스무 살에 사고(?)를 치기 전의 나의 모습은 지극히 얌전한 모범생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극복과 고생 많은 어머니의 기대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된 지향이었다. 때문에 주위의 기대도 나를 가둬두는 틀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나 스스로가 '엄마 말 잘 듣는 범생이'의 틀 안에서 편안하게 살기를 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또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억압'이었다.
  스무 살 이전의 나의 모습은. 내가 이루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그러했던 만큼이나 성에 관한 것도 다분히 억압적인 면이 많았다. 그것은 물론 환경의 탓도 무시할 수 없다. 내가 첫 생리를 했을 때(-주 :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마 《19세》의 '나(정수)'가 거시기에 털이 나서 고민했던 것만큼이나)나 그 이전이고 그 이후고 간에, 생리를 비롯한 2차 성징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변화와 충격에 대해 안정적으로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또 만만하게 물어볼 이도 없었다. 어머니가 생리대 사용법에 대해 처음으로 설명해주기는 했어도 내가 첫 생리 때문에 얼마나 충격스러워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소상하고 편안한 가르침은 없었다. 가정시간에 배우는 객관적인 사실들과 친구들과 조심스레 떠드는 농담이 전부였을 뿐. 한마디로 성교육 부재의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라는 내내 성에 관한 얘기를 하면 괜히 죄스러지고 거북해지곤 했다. 억압과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나날들이었다.
  내가 포르노를 본 것은 내 나이, 스물 하고도 여덟의 겨울이었는데, 우습게도 나는 그전까지 본 진한 애로 영화가 포르노인 줄 알았다. 영화는 중학교 3학년 때 나보다 2살 많던 옆집언니(-주 : 집에 비디오가 많았음. 또 돈도 많았음. 그러나 그 언니 부모님은 자식교육에 관심은 없었음)가 자기 집에 놀러온 나를 꼬드겨 같이 보자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전라의 여성과 남성의 뒷모습과 측면에서 찍은 성교 장면을 대략적으로 비추어 보인 장면들이었는데, 자세하게 몸이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과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첫 생리를 할 때처럼. 가관인 것은 그 때부터 스무 살이 훨씬 지난 나이가 되어서도 그것을 포르노라 착각하고 그때의 기억을 많이도 부끄러워했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뚜렷하게 학습하며 자라게 된 계기였다. 얼마나 나 자신을 학대하고 억압했으면. 차라리 여기저기에다 그런 사실들을 떠들고 다녔더라면(-주 : 그래서 병은 소문을 내라고 하는구나), 또 《19세》'나(정수)'의 반만큼이라도 되는 주변머리가 있었더라면.  비단 성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나의 스무 살의 사고(?)또한 좀 더 그 시기를 당길 수 있었을 텐데.
  환경의 차이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19세》의 '나(정수)'의 경우도 승태 말고는 대화의 창구가 없는 막막한 고립지원의 상황이었다. 노골적으로 '나'를 억압하며 자신의 인생관에 동생의 자아를 맞춰 넣으려는 형, '나'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선생님. 그 즈음의 '나(정수)'에게 있어 '대관령'은 바로 승태와 승태 누나였다. 그런데도 나와는 다른 노란싹(?)을 틔울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남녀차이도 분명한 경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구차한 설명을 보태지 않아도 대한민국에서 성에 있어서나 자아 성취적인 면에 있어서나 그 억압이 더 심한 쪽은 여자이다. 우리학교 애들만 봐도 다를 바 없는데, 남자애들은 여선생 앞에서도 성적인 농담을 곧잘 주고받는 반면에, 여학생들은 남선생은 말 할 것도 없고, 여선생한테마저도 눈치를 보며 조심한다. (-주 : 하긴, 옛날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다. 수업시간에 생리통 때문에 아파서 화장실 간다는 말도 주춤거림 없이 하는 것을 보면.) 또,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여학생이 훨씬 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직업을 갖고 싶어한다. 
  나 열 아홉이었을 적에 나의 '대관령'은 엄마말, 선생말 잘 듣는 범생이, 그리고 그것을 통한 참한 국어 선생 되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도 《19세》의 '나(정수)'마냥 노란싹(?)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내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부자처럼 부풀어오르곤 한다. 지금 다이어리 같은 조그마한 책자에다 내가 손수 지은 시를 보석처럼 다듬어넣곤 했던 나, 때로는 친구들에게 그 보석을 선물하기도 했던 나, 미술선생님의 격려로 개성적인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던 나, 영어 수학시간보다 음악, 미술 시간을 더 좋아했던 나(이 '대관령'은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처럼.
  문제는 《19세》'나(정수)'가 '대관령'에서 펼친 고랭지 농사를 향한 강한 매진과 실천이, 나에게는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나는 중학교 시절에 뜻도 모를 김수영 시집도 읽어내고, 나름대로 폼생폼사로 글을 짓기도 했지만 그것을 스무 살이 넘은 나이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대관령'까지 넘어가진 못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당시 내가 쓴 시들은 김수영 시를 비롯한 어른들의 시와 어투를 흉내낸 것들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자 이런 치기 어린 모습들이 너무나 싫어졌다. 이런 상황에 무섭게 덤벼든 것이 '범생이 틀'이라는 억압이었다. 또 하나 나를 누르는 것은 성의 은폐에서 배운 부끄러움이라는 성향이었다. 그리고 그러했던 부정적인 나의 한 성향은 마치 삼투압처럼 나의 또 다른 긍정적인 성향마저 삼켜버렸다. 그래서 중학교 이후로는 글쓰기를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부끄러운 채로, 억압당한 채로, 범생이의 틀 안에서 근신하기를 마음먹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과정 속에 그 억압과 부끄러움은 더욱 덩치를 키워갔다. 그런 상태가 스무살 겨울까지 이어진 것이다. 아주 긴 터널이었다. 터널이 폭발하듯 내가 빠져나오기 이전에는.  
  《19세》의 '나(정수)'는 '대관령'에서 자기의 꿈을 죄다 이루어보았던, 또 250씨씨 혼다로 최고속력을 누려보았던 이후로 다시는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은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그 꿈이 의미가 없는 것이라 보지는 않는다. 현재의 모습과 현재의 꿈과는 다른 것이라 해도. '대관령' 꿈꾸기는 또 다른 '대관령'을 꿈꾸게 한다. 이번 방학동안 EBS에 책따세 대표 송승훈 선생님이 독서에 관해 아이들, 부모님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프로가 있었다. 한 부모님이 자기 아이에 대해 고민을 상담하는 내용이었다. 아이가 책을 많이 읽는 면은 좋은데, 그 때문인지 학교시험에 독서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언제나 답을 틀린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매번 참고서나 선생님이 미리 가르쳐주는 '정답'을 적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답을 적기 때문이란다. 그것 때문에 그 아이의 부모님은 아이의 성적이 안 좋아 상당히 노파심에 전전긍긍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송승훈 선생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오히려 중학교 초등학교 때 주체적 독서활동을 많이 한 아이들이 나중에 고등학교가면 독서를 비롯한 모든 문제상황을 주체적으로 해결을 할 수 있게 되고, 또 그런 능력을 점점 쌓을 수 있게 될 거라고, "소탐대실"이 아니라 "소실대탐"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거라고.'  《19세》의 '나(정수)'는 19세의 '대관령'을 더 이상 꿈꾸지 않는 대신에 그 거대한 대관령에게서 문제해결능력을 배웠다. 그리고 앞으로 또 다른 '대관령'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러므로 '대관령'의 존재와 '대관령'을 찾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문제이다. 앞으로 나의 '대관령'은, 또 그것을 찾아가는 방식은 어떠한 것일까.
   '휴학'이라는 터널을 탈출한 이후로 못된 버릇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간직하던 그릇이 깨져버리면 크게 두 가지 행동을 취하는 것 같다. 그 깨진 그릇을 '울며 겨자 먹기'로 떼우고 붙여 고이고이 이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깨진 그릇 재료들을 다시 빻아 새 그릇을 만들거나 또 다른 그릇을 찾아 나서는 사람. 그런데 나는 후자 쪽의 성향이 더 짙은 것 같다.(물론 두 성향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고 본다.)  지금도 일을 할 때나 뭔가를 선택할 때 '이건 아닌데' 싶으면 중도하차나 포기를 거듭해 나 자신이 힘든 것은 둘째치고, 간혹 남들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은 힘드나 일, 하나 만큼은 기대에 부합되게 만들어내곤 한다.  이런 내 성격의 한 면은 또는 나름대로의 문제해결능력(-주 : 좀 부끄럽다. 사실은 안 그럴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뿐.)은 내 나이 스무 살이 저물어가던 그 겨울에 움이 텄다. 긴 긴 터널 속의 '열 아홉'에는 꿈도 꾸지 못한. 그 때가 나에게 있어서는 '사춘기의 방황(우리 어머니 버전)'이었고, '자아 찾기 (소설《19세》의 '나'의 버전)'의 첫 단추였다. 채우는 것이었건 푸는 것이었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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